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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5)화 (45/292)
  • 45화 

    하지만 손가방을 든 내내 몸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도 없었다. 기계가 웅웅 작동하는 낌새 정도는 손가방 안에서도 충분히 느껴질 텐데.

    전혀 몰랐다.

    도대체 언제 탐지기가 작동했던 걸까?

    “…아마 봉인은 아닐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오토마톤을 마주했을 땐 마류 탐지기가 하얗게 빛났던 것 말입니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이 시간에 새로운 봉인이 나타난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요. 붉은 빛의 원인은 따로 연구해 봐야 될 것 같군요.”

    “그럼 지금 당장은 괜찮은 거예요?”

    “아마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시아는 라크시스의 모호한 반응에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붉은 빛을 내는 마류 탐지기가 왜인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붉게 빛나는 걸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류 탐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라크시스는 탐지기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침묵이 맴돌았다.

    이럴 땐 딴짓이라도 해야 좋은데. 짐은 라크시스 덕에 죄다 가방에 넣어버려서 더는 할 것도 없었다. 신기하긴 하네. 이렇게 닫아놓으면 평범한 가방처럼 보이는데.

    이번엔 도리어 라크시스가 긴장한 듯 보였다. 마류 탐지기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끼긴 한 모양인데. 알려주려 하질 않으니 먼저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라크.”

    “네.”

    고택의 일부처럼 자리하던 방 한편의 오래된 괘종시계의 바늘이 찰칵, 소리를 내며 꼭대기를 가리켰다. 기다란 황동 추가 뎅뎅 흔들리며 조그마한 새가 튀어나와 열 한 번이나 뻐꾹거렸다.

    그 말인즉, 밤 열한 시가 되도록 헨리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퇴근하고 연락을 준다 했는데. 당직인가 싶었는데 라크시스가 출퇴근 일지를 몰래 가져와선 확인해 주었다. 헨리가 6시에 정시 퇴근을 했다는 것을.

    라크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재키 레이븐으로서 로렌 허슬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어둑한 하늘엔 밤에도 보일 만큼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요 며칠 맑다 싶었는데, 모르간 특유의 습도 높은 우중충함이 다시금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준비는 완벽해요. 내가 짠 계획이니까.”

    그래도 비는 안 왔으면 좋겠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텅 빈 거리의 살인마. 그 둘의 조합은 기막히게 완벽하고 또 무서웠다.

    마리의 성화를 못 이기고 봤던 뮤지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재키 레이븐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던 그 장면에서 번개 같은 조명이 내리꽂히던 게 아직도 오싹하다.

    열린 창문으로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도 라크시스는 젖지 않은 깃털처럼 홀로 고고했다.

    어느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긋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돌아온 고대 마법사에 이유 모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라크시스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까 보여줬던 헨리의 신상은 다 숙지했죠?”

    “그럼요. 그래서 이 밤에 이런 원피스도 입었잖아요?”

    “그럼 문제 될 건 없네요.”

    찰나 무늬 없는 검은 망토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망토를 흔드는 라크시스의 손이 망토 자락에 먹혀 사라졌다.

    “난 여기에 숨어있을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투명해졌다고 해야 하나. 라크시스는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헨리의 집에서 재키 레이븐의 흔적을 찾을 것이다.

    “당신은 이걸 놈에게 붙이기만 하면 돼죠.”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내민 건 딱정벌레처럼 생긴 아주 작은 태엽 장치였다. 딱딱한 등껍질 부분을 누르자 태엽이 돌아가더니 여섯 개의 날카로운 황동 다리가 철컥 날을 세웠다.

    이 다리가 헨리의 살갗을 파고들면 마력이 주입될 것이다. 라크시스는 이 장치에 담긴 마법이 무엇인지는 헨리를 보고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정말로 이러면 끝날까요?”

    “날 뭘로 보고. 왜, 내 마법이 못 미더워요?”

    “라크의 마법은 믿죠.”

    라크시스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는?”

    “…당신도 믿고요.”

    라크시스의 표정이 이제야 좀 펴진다. 그래, 믿을 수밖에 없다. 칠십 년 전의 이 낯선 시대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라크시스밖에 없었고,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그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첫 시간 여행 때 라크시스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슈나이더 경사 같은 사람을 처음으로 마주했더라면 꼼짝없이 수배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라크시스는 미세하게 변하는 시아의 입꼬리며 눈썹의 기울기, 풀어지는 눈가의 근육 등을 관찰했다.

    그녀의 긴장감이 조금은 가신 모양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에 라크시스는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증거만 확보하면 끝납니다. 경찰에 넘기고 나면 그 후엔 알아서들 처리하겠죠.”

    그때였다.

    “아.”

    라크시스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화기처럼 생긴 황동 기계를 꺼냈다. 손잡이 부분에 1부터 0까지 열 개의 숫자 버튼이 달린 위로 파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뭔데요?”

    아무리 봐도 전화기처럼 생겼는데. 구리 선과 다이얼이 없을 뿐이지, 귀와 입에 대는 부분과 숫자 버튼이 있는 것으로 봐선 전화기가 확실해 보였다. 마도 시대엔 묵직한 송수신기가 없어도 전화가 가능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저렇게 큰 수화기를 집어넣어도 티가 안 나는 라크시스의 코트 안주머니였다.

    “왔어요.”

    “뭐가요?”

    라크시스가 지직거리는 소음이 나는 기계를 시아에게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받아 들어 귀와 입에 닿도록 뺨 쪽에 댔더니 살풋 웃는다.

    여보세요? 하는 인사말이 들려왔다. 라크시스는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모양새로 속삭였다.

    “받아봐요, 로렌.”

    그러니까 이게 뭔데요! 손짓 발짓으로 성화를 내면서도 입은 착실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설탐정 로렌 허슬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헨리 던로입니다.”

    낯선 풀 네임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수화기를 쥔 손에 바짝 힘줄이 섰다.

    “메이덜린 랭험 지구 노스 스트릿 28번지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유리를 긁는 듯 거칠었다. 경찰서의 헨리 순경과는 전혀 다른 온도의 음성에 소름이 채 돋기도 전이었다.

    “코발트블루의 현관을 찾으시면 빠를 겁니다. 문을 다섯 번 두드려주시면 마중 나가겠습니다.”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결국 나를 초대하고야 말았다.

    * * *

    한밤의 랭험 노스 스트릿은 어둡고도 질척했다.

    깜빡이는 가로등 밑에서 바람이 둥글게 감돌았다. 이내 인적 드문 거리에 우산을 쓴 남녀의 인영이 길게 드리워졌다.

    케르딕 7세 시절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케르디안 하우스의 높게 솟은 지붕이 복사기에 넣고 붙여넣은 듯 노스 스트릿의 한 면을 끝없이 메우고 있었다. 대귀족 랭험가에서 소유한 이 케르디안 하우스는 메이덜린에서도 재력이 있는 사람이나 살 법한 곳이었다.

    한 우산을 나눠 쓴 두 사람의 레인코트 자락에 빗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켈튼 저택에서 출발하기 전까진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떻게든 긴장을 해소했는데. 희뿌연 장막처럼 쏟아붓는 비는 그들의 대화마저 단절시켰다.

    마력등을 들고 수없이 늘어선 똑같은 문의 번지수를 찾는 동안 라크시스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주소를 읊어대는 시아에게서 습기 찬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는 것만 빼곤, 둘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네요. 코발트블루 현관에 28번지.”

    비 오는 한밤중에, 그것도 귀족의 사유지에 지어진 테라스 형식의 주택에서 특정한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낮에 봤으면 선명하게 예뻤을 파란 현관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였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이 재키 레이븐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시아. 저기를 봐요.”

    라크시스가 가리킨 건 1층 현관 옆 돌출 창이었다. 시력도 좋지. 언뜻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창문은 자세히 보니 창틀에 억지로 끼워놓은 상태였다.

    “창문이 뒤틀렸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릴리 알펜이 창문으로 도망쳤다고 했었지.

    “…피도 좀 묻어있고요. 이런 건 보존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라크시스는 어그러진 창문에 투명한 막을 덧씌웠다.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찾은 기분이었다. 헨리 순경이 바로 재키 레이븐이라는 증거.

    “준비됐어요?”

    어느새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라크시스가 목만 빼꼼 내밀고 망토 자락 틈새로 우산을 내밀었다.

    “물론이죠.”

    허공에 머리만 둥둥 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장이 쿵쿵 거리는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좋습니다.”

    똑, 똑똑똑 똑.

    떨리는 손이 불규칙하게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반원의 채광창 너머로 현관 등 불빛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철컥, 걸쇠가 돌아간다. 망토를 완전히 덮어쓴 라크시스는 이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미스 허슬러.”

    문틈 새로 희미한 불빛이 쏟아지며, 기다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헨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게 차려입고 있었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뱀처럼 그가 잔인하게 웃었다.

    * * *

    로렌 허슬러는 남자의 것이 분명한 품이 큰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절 밖에 세워둘 생각은 아니겠죠?”

    관능적인 향이 물기 어린 공기와 함께 밀려들었다. 헨리는 코끝에 닿는 독한 향의 정체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가 처음 죽인 여인. 지금쯤 지옥에 있을 옛 연인의 향이었다.

    우산을 겨우 접을 만큼 손에 짐이 많았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마력등을 헨리에게 건네며 현관을 밀고 들어왔다. 로렌이 지나간 자리마다 빗물이 떨어져 짙은 자국이 남았다. 티끌 하나 없던 복도에 생긴 로렌의 자취는 새하얀 종이에 잘못 떨어진 잉크처럼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금이 간 얼굴을 기계적인 미소로 숨기며, 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제가 실례했군요. 짐을 주시겠습니까?”

    “팔을 다친 분께 어떻게 짐을 드리겠어요. 대신 잠시 응접실을 좀 빌릴게요.”

    로렌은 이미 우산과 마력등을 제게 건넨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들고 온 가방은 양심 때문에 차마 들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꼴이 같잖았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로렌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명확한 의도가 보였다. 퍽도 웃기지. 그녀의 우산과 마력등을 받아 들고 나니 남은 건 다친 팔 끝에 매달린 힘없는 손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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