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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4)화 (44/292)
  • 44화 

    헨리는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라크시스는 이제 삐딱하게 서서 헨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아니면 설마, 로렌을 좋아하나?”

    고대 마법사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재키 레이븐인지 알아내기 위해 순진한 여인에게 도발 연기를 시켜 꾀어내려 한 건 줄 알았는데.

    “어머, 라크!”

    “그러지 않고서야 이제 고작 두 번 보는 사이인 여인에게 제 맨살을 보여주겠다고 나서진 않겠지.”

    라크시스와 로렌 허슬러 사이에는 어떠한 합의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날 도발한 건 미스 허슬러의 독단이었단 말인가?

    “난 로렌의 의뢰인일 뿐이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로렌이 곤란해하는 걸 그냥 보고 넘길 성격도 아니라서.”

    “라크, 전 괜찮다니까요. 순경님, 우리는 잠시 저쪽으로 갈까요?”

    미스 허슬러는 라크시스의 품에 안긴 채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재키 레이븐이라는 걸 알면 감히 던질 수 없는 추파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도발은 라크시스의 계획도 뭣도 아니란 말이었다.

    내 정체를 알아낸 것도 아닌데 감히 그런 식으로 날 다 아는 듯이 굴었단 말인가?

    매독을 비밀로 해줄 테니 본인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그랬다. 로렌 허슬러는 자신을 동정하고 있었다.

    흥미가 팍 식어버렸다. 동시에 헨리의 속에서 조용히 살의가 끓어올랐다.

    매독은 처음인 여인들을 찾아내려다 걸린 병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어디에서도 이렇게 주장할 수 없었다. 매독은 방탕과 불결함의 상징이요, 국교인의 수치였으니까.

    왜 모르는 걸까. 내 몸을 뒤덮은 붉은 자국들은 사도이기에 기꺼이 짊어진 고통과 희생의 결과물인데.

    그리고 로렌 허슬러는 바로 그 고통과 희생을 조롱하고 나선 것이다.

    본인이 보수적인 모르간 출신이 아님을 들먹여 가며 나의 방탕함을 이해한단 식으로, 그렇기에 창관에 드나드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식으로 나를 멋대로 평가했다.

    방탕함의 상징인 병을 비밀로 하고 팔을 치료해 주겠다며 감히 나를 동정했다.

    라크시스 옌도 아닌 한낱 계집인 네가.

    네가 뭔데 감히 날 동정하는 것인가.

    만일 로렌의 말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매독에 걸린 팔을 드러내 부러진 팔을 치료하려면 둘이서 은밀하게 만날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그녀의 탐정 사무소나, 집이나 혹은 그의 집 같은 곳 말이다.

    간밤에 도망친 창녀를 쫓다 다친 팔이 욱신거렸지만 그조차도 잊을 만큼 헨리의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원래는 제 정체를 알아챘을지도 모를 라크시스 옌을 농락할 계획으로 경찰서에서 뛰쳐나온 것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이라고만 생각했던 미스 허슬러가 이젠 그간 그가 만나왔던 수많은 창녀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라크시스의 의뢰를 받았다는 것도 어쩌면 라크시스와 은밀하게 만나는 사이라는 걸 돌려서 말한 것일지 모른다.

    고대 마법사에겐 약혼녀가 따로 없을 텐데. 결혼도, 심지어 약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저렇게 외간 남자가 허리를 둘러 안게 놔둔단 말인가.

    창녀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유독 로렌 허슬러가 남자와의 접촉을 꺼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밤중에 메이슨 비렌체와 경찰서에 왔을 때도 스스럼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치료를 핑계 대며 팔을 만져댔었고.

    아까 날 도발하면서도 내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쥐지 않았던가. 감히 악수까지 청하면서.

    헨리의 얼굴이 얼음 같은 가면으로 천천히 뒤덮였다. 가느다란 시선 밑에 살의를 완전히 숨기고, 사람 좋은 순경의 표정으로 피부의 떨림을 감춘다.

    “헨리 순경, 둘이서 무슨 말을 하든 미스 허슬러가 내 시야 안에 있도록 해.”

    명령조에 가까운 라크시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라크, 헨리 순경님 같은 분이 저 같은 여인에게 무슨 짓을 하시겠어요. 그렇죠, 순경님?”

    헨리.

    아니, 재키 레이븐의 눈엔 오로지 로렌 허슬러만 보였다.

    “…그럼요. 민중의 지팡이씩이나 되어서 제가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재키 레이븐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미스 허슬러가 하신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단둘이 만나자는 제안을 받아주지.

    “대신 제가 원하는 장소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그때까지 다친 팔, 참을 수 있겠어요?”

    이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러워질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미 타락한 영혼을 영원히 지옥에 가둬버리는 것이니까.

    “…당연합니다.”

    그리고 로렌 허슬러는 이미 음욕에 물든 여인이었다.

    신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부정으로부터 구원하라.’

    그래, 로렌. 네가 날 도발해도 소용없어. 내가 더러워진 널 구원할 테니까.

    재키 레이븐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신 오늘 근무가 끝나고 연락드리는 곳으로 혼자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난 널 죽일 거야. 로렌.

    * * *

    “시아.”

    “…네?”

    라크시스는 시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기껏 다 갠 셔츠를 놓쳐서 또 개질 않나, 가방을 다 싸놓고는 뭘 빼먹은 것 같다며 다시 풀어 헤쳐놓는다. 침대 위가 산만했다. 그가 챙겨가라고 준, 신체 내부를 비춰주는 기계도 베개 옆에 그냥 놓여있었다.

    그녀답지 않았다. 두 번째 시간 여행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원래 시대로 돌아갈 준비를 급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아, 이걸 왜 챙겼지…….”

    켈튼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입었던 실내복을 가방에서 도로 빼내다가 시아의 손이 갈피를 잃었다.

    라크시스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괴곤 물었다.

    “긴장돼요?”

    시아는 멈칫했다. 폐 깊숙이서 끌어올린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긴장되죠.”

    “연기하던 걸 보면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심지어 그 사람이 절 표적으로 삼았고요.”

    “하긴.”

    그녀는 의술사였다. 자신처럼 적수가 없는 고대 마법사가 아니라. 평생을 범죄와 관련 없는 곳에서 조용히 환자만 보며 살아왔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재키 레이븐일지 모를 헨리의 앞에서 그의 속을 교묘하게 긁어내는 연기를 한 건 그녀에게 있어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시아의 짐 정리는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요크 부인이 두 번이나 왔다 간 참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숙녀의 방에 머무르냐며 타박하던 것인데, 요크 부인에겐 차마 시아를 살인마의 본거지로 밀어 넣을 계획을 짜고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라크시스는 잔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어야만 했다.

    사실 잔소리를 조금 듣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라크시스는 헨리의 초대를 받기 전 잠시 동안 갖게 된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번 두 번째 시간 여행이 생각보다 힘겨웠던 탓이었다. 지난 사흘이 일주일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시아가 몇 시간 후, 새벽에 사라진다는 걸 알고 나서는 그동안 같은 사건을 겪었던 동료로서 간단히 회포나 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 눌러앉아 있었던 건데.

    시아는 내내 짐이나 챙기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돌아갈 생각뿐인 걸까.

    붉은 원피스를 걸친 새하얀 피부가 조명을 받아 도드라졌다. 단정한 침구 사이에 앉아있는 붉은 인영은 자꾸만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정리할 게 많아요?”

    “하하……. 그러게요.”

    당신이 준 이 치렁치렁한 옷 때문에 짐이 늘어났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라크시스가 이쪽을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따가워서라도 속옷이며 그런 것들을 편하게 챙길 수가 없었다.

    시아는 멋쩍게 웃었다.

    “도와줄까요?”

    “뭘 이런 걸 도와줘요. 내 가방인데요.”

    라크시스가 긴 손가락을 서로 맞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나더니 시아가 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짐들이 갑자기 바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맘껏 넣어요. 이젠 넉넉할 테니.”

    “…라크. 제 가방에 뭘 한 거예요?”

    “기껏 제가 만든 기계를 줬는데 챙겨가지도 않으니 손을 좀 썼죠.”

    공간을 왜곡시켰댄다. 라크시스는 왜인지 만족스러워 보였다. 겉보기엔 가방이 그대로지만 안쪽의 공간은 확장된 상태라 이 방의 가구들까지 모두 챙겨갈 수 있다고 했다.

    “그건 가져가도 못 쓴다니까요. 마도 시대의 물건이잖아요.”

    “선물이라고 준 건데 이렇게 내팽개치는 법 있습니까?”

    “…알았어요. 가져갈게요.”

    라크시스는 툴툴거리는 시아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의 손짓에 널브러져 있던 의술 도구며 옷가지에 릴리 알펜의 뼈를 비추었던 기계까지 둥실 떠올라 가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 시아는 감탄했다. 작은 슈트 케이스가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잡동사니들을 전부 삼키고도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어, 잠깐만요.”

    시아는 유백색 드레스와 세트로 받았던 손가방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이건 요르문에게 돌려줄 거예요.”

    가방 안에서 나온 건 요르문에게 받았던 마류 탐지기였다.

    “그냥 가져가셔도 될 텐데요.”

    “아, 맞다. 그나저나 여기 이거 말이에요.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원래 이런 거예요?”

    시아가 내민 마류 탐지기 상단부 버튼에 붉은 기운이 서려있었다. 원래 투명한 마정석이 이렇게 변한 걸 보면 뭔갈 탐지했단 소린데.

    글레이셜 홀에서 움직이는 오토마톤을 마주하고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마류 탐지기가 마류를 감지했을 땐, 아주 미친 듯이 진동하며 왱왱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류 탐지기는 잠잠했다. 그녀가 마류 탐지기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부터 줄곧 계기판의 바늘은 미동 없이 멈춰있었다. 내내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물어보지 못했다.

    마류 탐지기를 받아든 라크시스의 낯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뇨. 저도 아까 손가방 열어보다가 발견했는데. 왜요? 문제라도 있어요?”

    그렇게 물어봐 놓고 시아는 제풀에 놀라 입을 닫았다. 마류 탐지기는 애초에 마류 이상 현상을 감지하는 것이 목적인 기계였다. 만약 탐지기에 변화가 발생했다면, 그건 불안정한 광룡의 봉인이 주변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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