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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3)화 (43/292)
  • 43화 

    헨리 순경을 도발해 보라고? 자존심을 건드려보라 이 말이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일종의 자기합리화를 마친 시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감정에 이끌린 나름의 냉철한 판단이었다.

    ‘아주 제대로 할 거예요.’

    ‘시아?’

    ‘도발 말이에요. 헨리 순경이 진짜 재키 레이븐이라면 절 죽이고 싶어서 못 견디도록 자존심을 확 건드릴 거니까.’

    라크시스는 아까까지만 해도 발을 빼던 시아가 제 옆에서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는 걸 목격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지는 몰랐는데. 하긴 얕보였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라크시스는 조용히 웃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 도발, 제가 이용해 주도록 하죠.’

    * * *

    연기가 성공적으로 먹히긴 했던 모양이었다.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나와 두 블록도 채 걷지 않았는데 뒤편에서 헨리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미스 허슬러―!”

    혼신의 힘을 다해서 무서운 것도 꾹 참고 했는데 먹혀야지. 한편으로는 연기가 먹혔다는 사실이 곧 그가 재키 레이븐이라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조금 무서우면서도 헨리 순경이라는 자에 대해 실망감이 들었다.

    헨리의 목소리와 도보를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언의 대화를 눈으로 나누고 시아는 헨리를 도발하던 때의 미스 허슬러가 되어 가늘고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뒤를 돌았다.

    “헨리 순경님?”

    갑자기 멈춰 선 탓일까. 시아는 바로 뒤에서 오던 행인과 부딪히고 말았다.

    “윽.”

    불편하기 짝이 없는 높은 굽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그 순간, 누군가가 시아의 허리를 붙들며 받쳤다.

    “라크, …어.”

    당연히 라크시스가 잡아줬다고 생각했는데, 햇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이 낯설었다.

    검은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라크시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미형의 얼굴을 한 신사였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네?”

    “갈 길이 급한 나머지 미처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리 아름다운 레이디와 마주할 줄은 또 몰랐군요.”

    남자는 시아와 부딪친 걸 사과하고 있었다. 덧붙인 말이 너무 작업 멘트 같아서 순간 사과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제가 갑자기 멈춘 탓도 있었어요. …그나저나 저 좀 일으켜주시겠어요?”

    “오, 이런. 죄송합니다.”

    남자는 재깍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시아가 똑바로 서서 남자를 마주 보니 그 역시 꽤 큰 키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모자 밑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남자의 금발만큼이나 환한 미소였다.

    “당신과 부딪친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실례지만 레이디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로렌 허슬러예요.”

    뻔한 작업 멘트 같은데 왜인지 꺼림칙하게 느껴져 시아는 가명을 알려주고 말았다. 남자는 이름을 음미하듯 천천히 발음했다.

    “레이디 로렌 허슬러.”

    “아뇨, 미스 허슬러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그래요, 미스 허슬러. 먼저 말을 걸게 된 무례를 용서하시길.”

    소개를 받기 전까지 신사가 숙녀에게 대화를 먼저 걸 수 없음을 빗대는 말이었다.

    하긴 웰링턴 백작도 라크시스가 소개해 줄 때까지 내게 말도 못 걸었지.

    “무례한 걸 알면 그쯤 떨어지시지.”

    라크시스가 지팡이로 남자를 밀쳐냈다. 매끈한 지팡이의 끝이 남자의 정강이를 꾹 누르는 게 보였다. 남자의 입장에서 라크시스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텐데, 남자는 기분이 상한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라크시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두 손을 경찰 앞에 항복하는 사람처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여전하시군. 라크시스 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으나 조소와 조롱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리고 그 조소와 조롱은 오로지 라크시스를 향해있었다.

    시간 여행을 하며 줄곧 느껴왔던 거지만, 제국에서 라크시스를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려 황제에게서 법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다. 친구라는 요르문 정도나 라크시스를 편하게 대하지, 고대 마법사에게 노골적으로 적대를 드러낼 만큼 용감한 멍청이는 없을 텐데.

    “이런, 선객이 있으셨군. 이만 실례하지요.”

    어느새 헨리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적대감을 지워낸 낯으로 인사를 하곤 시아를 지나쳐가며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 또 만납시다. 미스 허슬러.”

    “미, 스 허슬러. 걸음이 참 빠르, 시군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헨리가 헉헉거리면서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시아는 헨리가 말하는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만나자고?

    인사치레로 할 법한 말이건만, 남자가 풍기던 분위기를 보건대 인사치레가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 것만 같은, 어딘가 섬뜩한 느낌에 시아가 곧바로 남자가 사라진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남자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중간에 빠져나갈 골목이 딱히 있는 길도 아닌데. 스크롤을 쓴 게 아니라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말끔히 사라질 수가 없었다.

    “미스 허슬러……?”

    헨리의 부름에 퍼뜩 정신이 들어 재빨리 표정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헨리를 도발하던 로렌 허슬러의 가면을 완벽하게 뒤집어썼다고 생각하며 헨리를 바라보려던 순간, 시야에 라크시스의 굳은 얼굴이 들어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차갑고, 살갗을 저며낼 것처럼 소름 돋는 시선이 남자가 서있던 메이덜린의 거리에 꽂혀있었다.

    마류 이상 현상의 실험체니 뭐니 해도 지금껏 라크시스가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온도 차이였다.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라크시스는 분노하고 있다기엔 지나치게 고요했다. 분명 나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고대 마법사의 관점에서 상황을 곱씹어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손가방을 들고 있는 팔이 저려왔다. 분위기에 짓눌린 건지, 유난히 팔이 무겁게 느껴지며 떨렸다.

    “미스…….”

    “아, 헨리 순경님.”

    헨리가 눈앞에 있어 라크시스를 더는 신경 쓸 수 없었다. 라크시스도 헨리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나중에 무슨 일이었냐고 물어보면 라크시스는 대답해 줄까?

    헨리는 다행히 방금의 상황을 제대로 못 본 듯했다.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당했던 도발에만 집중했는지, 다급하게 시아의 팔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미스 허슬러. 잠깐 저 좀 보시지요.”

    살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여유롭게 눈매를 접으며 시아는 우아하게 헨리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어머.”

    평소 같았으면 레이디의 팔을 덥석 잡은 무례함을 지적하려고 라크시스가 나섰을 텐데 이번만큼은 서로 짜고 친 게 있어서 얌전했다. 대신 헨리를 매너도 모르는 벌레 보듯 훑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헨리가 아차 싶은지 물러섰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아녜요, 순경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죠. 그나저나 제가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신 것 같은데, 맞죠?”

    헨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크시스를 힐끔 쳐다보더니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인적 드문 골목길을 향해 눈짓했다.

    그때 라크시스가 헨리를 막아섰다.

    “헨리 순경. 우린 당신과 볼일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용건이지?”

    “아까 제가 순경님의 팔을 봐드린다고 했어요. 라크도 알잖아요? 저 의술사인 거.”

    “널린 게 의사인데. 본인이 못 견딜 정도로 아프면 알아서 병원에 가겠지. 안 그래요, 로렌?”

    라크시스는 로렌의 허리를 감싸며 금방이라도 떠날 듯이 굴었다.

    헨리는 당황했다.

    사실 헨리는 미스 허슬러와 고대 마법사가 떠난 뒤, 그녀가 했던 협박 같던 제안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뉘앙스를 보건대 분명 그의 팔을 뒤덮은 불명예스러운 병을 알고 하는 제안이었다.

    왜 미스 허슬러는 내게 치료를 해준다 제안했을까?

    헨리는 미스 허슬러와 내내 동행하던 고대 마법사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미스 허슬러가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건, 자신을 도발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경찰서에 처음 방문했을 땐 이런 인상이 아니었다고.

    그래, 탐정놀이나 하는 여자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어. 그녀의 도발 뒤엔 고대 마법사가 있을 것이다. 재수 없긴 해도 라크시스 옌이 그랬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손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특별 수사권도 있다고 했었고.

    혹시.

    내가 재키 레이븐인 것을 알아챈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미스 허슬러에게 당한 도발에 치솟았던 화가 가라앉았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라크시스는 어떻게 고작 매독 환자라는 단서로 내게서 재키 레이븐을 추론해 냈을까? 금발? 6피트? 하지만 제국에 금발은 흔하다. 6피트도 흔한 키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나인 걸 눈치챈 거지?

    지금까지 살인 현장을 그 누구에게도 들킨 적이 없었다. 창관에서 처음인 창녀들을 물색하고, 그녀들을 집으로 유인해 죽인 후 시체를 내다 버릴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행방을 들킨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랬느냐고?

    나는 신의 구원을 받은 자였고, 동시에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사도였기 때문이었다.

    ‘부정으로부터 구원하라.’

    신은 나를 선택했다. 재키 레이븐이 되기 전, 나의 첫 살인이 이루어진 날. 연인을 죽인 죄를 고백하러 고해소에 홀로 앉아있을 때 검은 신사의 모습으로 현신하신 그분이 내게 다가왔다.

    신은 이르셨다.

    나의 종이 되어 세상에 도래한 죄악을 막아내거라.

    그분은 성서를 주셨고, 나는 그 길로 고해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신문 배달부 따위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지금쯤이면 지옥에 떨어졌을 연인)를 죽인 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더럽고 오만한 제국에는 신의 뜻에 반하는 부정한 것이 너무나도 많고,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건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도 아직 순결하고 순수한 영혼이 남아있을 터. 신은 제게 그런 여인들을 구원하라 하셨던 것이다.

    연인은 이미 지옥에 떨어졌을 테지만, 진창의 문턱에서 타락의 기로에 서있는 여인들은 구원할 수 있었다.

    ‘간음하지 말라. 음욕을 품은 눈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간음하였을진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성서의 한 구절이 붉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나의 사명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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