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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2)화 (42/292)
  • 42화 

    매독은 전염성이 강하므로 매독에 걸렸다고 해서 창관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릴리 알펜처럼 떠밀리듯 성 노동에 내몰리는 걸 보면, 매독의 주요 전파지는 유흥가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역사서에도 마도 시대의 유흥가가 매독의 중심지라고 기술되어 있긴 했지만.

    그나저나 헨리 순경이 매독이라니. 책상에 성녀 상을 둘 정도인 국교 신자가 매독에 걸릴 짓을 왜 한담. 유흥가에 드나들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청렴하고 금욕적인 것도 아니다. 잔느 강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던 신부도 여인을 지속적으로 희롱했다고 했으니.

    시아는 헨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의외로 저 반반한 얼굴을 내세워서 유흥가를 다닐지도 모르지. 체격도 좋고 키도 크고. 귀족적인 금발에… 어……?

    어?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세상에, 금발에 6피트…….’

    라크시스가 말없이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이다. 그 긍정을 알아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미친 듯이 돋았다. 차라리 라크시스가 부정해 줬더라면 좋았을 결론.

    재키 레이븐.

    여자를 사지 않는다는 살인마.

    금발에 6피트로 추정되는, 교리에 집착하며 여인을 죽이는 쓰레기.

    ‘제가 의술사가 아니라서 헨리 순경의 상태를 잘은 모르겠지만, 미스 알펜과 함께 계단에서 굴렀다면 저렇게 팔을 다쳤을지도 모른다, 싶은데.’

    라크시스는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시아의 손끝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맞아요, 일리 있는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경찰 월급으로 병원 정도는 충분히 다녀올 수 있고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시아?’

    라크시스는 그녀의 반응을 근거 삼아 자신의 추리에 신빙성을 더한 것 같았다.

    ‘아마 다친 팔을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펼친 추리는 안타깝게도 상황과 차곡차곡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매독이 진행되었다면 말이에요.’

    매독은 치욕스러운 병이었다. 국교를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는 제국의 특성상, 제국민들은 문란한 성생활을 치명적인 명예 훼손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마도 시대에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곳으로 아르카나 유흥가의 창관이 꼽힌다는 건 역설적이었다.

    치유사를 만날 수 있는 부유층이 아닌 이상 이 시대에 매독에 걸린 사람 대부분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 애초에 이 시대엔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었다. 수은 치료를 해주는 의사를 찾아갈 수 있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축에 속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수은 치료를 받았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경찰 월급으로 병원은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찰 월급으로 치유사는 못 부르는군요.’

    ‘그렇습니다.’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그래, 처음 메이덜린 경찰서를 찾아갔을 때 헨리 순경이 유독 재키 레이븐 사건에 관심을 보였지. 자꾸만 사건 정보를 말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살인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살인마에게 있어 제가 저지른 짓을 알아주는 사람은 얼마나 달콤한 동기 부여가 될까.

    거기에 수은 치료는 매독의 근본적인 치료 방법이 아니었다. 심각한 부작용으로 병을 키운다면 모를까. 수은이나 매독이나 신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라크시스가 말한 것, 즉 헨리 순경이 손을 떤다는 말을 듣고 방금 전 관찰을 시작했을 때 눈에 띄었던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끼고 있었던 흰 장갑이었다. 결벽증인 줄 알았는데, 사실 매독이 진행된 걸 숨기려고 했던 거라면.

    ‘시아.’

    ‘네?’

    라크시스의 시선은 어느새 날 향해있었다. 경찰서의 조명이 그의 얼굴 절반은 빛으로, 나머지 절반은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선명했다. 기묘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헨리 순경을 함정에 빠뜨려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함정이라니. 설마 정말로 헨리가 재키 레이븐인지를 알아보자는 건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희대의 살인마라고 알려진 재키 레이븐이다. 오죽 못 잡았으면 정체불명의 범죄자 주제에 수많은 소설과 연극의 소재가 되었을까. 살인마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내가 표적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라크,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 의술사이지 탐정이 아녜요.’

    ‘…그건 그렇군요.’

    라크시스도 현실을 인지했는지 반박 없이 물러났다. 다만 그의 표정에서 묘한 아쉬움이 자꾸만 배어 나오고 있어 신경이 쓰였다.

    ‘헨리 순경이 의심스러우면 다른 경찰에게 신고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그랬다가 만약 아니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헨리 순경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고발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고발은 상관없습니다만. 만약 그가 진짜 재키 레이븐이면 경찰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수사를 빠져나갈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수긍하면서도 라크시스의 말에 허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는 카얄일지도 모르는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을 잡으려고 한 거였잖아요. 재키 레이븐이라는 진범 말고요.’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회피하며 흔들리는 눈동자와 굳어버린 입매, 어느새 정자세로 선 그의 모습에서 시아는 그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그냥 헨리 순경이 진범인지 직접 알아내고 싶은 거네요, 그렇죠?’

    정곡을 찔렸는지 라크시스가 그녀의 눈을 더 피했다.

    그래, 내가 그 청초하고 귀족적인 얼굴로 내러 지구의 뒷골목을 다니는 티를 낼 때부터 알아봤다.

    라크시스는 지금 호기심이 동한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 꽂힌 무언가는 제대로 된 해답을 찾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성격인 것이다.

    헨리 순경이 만날 때마다 내내 장갑을 끼고 손을 떨던 것이 마침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을 찾으러 다니던 우리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유독 눈에 들어왔다던가, 했던 거겠지. 머릿속에서 퍼즐이 딱딱 들어맞고 있으니 남은 퍼즐도 맞춰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던 것이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요르문 님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알고 싶은 게 생기면 내러 지구의 시궁창도 마다 않고 사방팔방 활보하다가 집사에게 혼나곤 했으니까.

    ‘궁금하잖아요. 이렇게까지 단서가 모였는데.’

    ‘누가 보면 라크가 탐정인 줄 알겠어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서명하신 수사 허가권도 있는데요, 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아는 입을 열었다.

    ‘…위험해요. 살인마잖아요.’

    ‘당신이? 아니면 내가?’

    아, 지금 본인은 고대 마법사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야?

    ‘둘 다요. 원래 인간이라는 게 수틀리면 무슨 짓이든 하는 족속이거든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제아무리 라크시스가 고대 마법사라고 해도 지난번처럼 마류 이상 현상이라도 맞닥뜨리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정말로 운 나쁘게 마법을 제대로 못 쓰는 상태에서 칼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냐는 말이다.

    ‘…알겠어요. 시아가 이렇게까지 말리는데 어쩔 수 없죠.’

    선뜻 동참해 줄 줄 알았던 시아가 뜻밖에 완강하게 거절했다. 라크시스는 서운한 티를 내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뭐야, 이렇게 설득을 그만둔다고? 그 라크시스가?’

    시아의 촉이 발동됐다. 이런 성격의 문제점은 결국 어떻게든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앞에선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하면서 밤마다 몰래 위험한 행동을 하고 다닐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라크시스의 표정에도 딱 이런 계획이 드러나 있었다.

    당신이 같이 안 가준다니 나 혼자서라도 헨리 순경의 뒤를 캐봐야지, 뭐.

    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대마법사인 것만 믿고 오지를 돌아다니다가 맨날 여기저기 다쳐오는 칠십 년 후의 요르문 님에게서 많이 봤던 바로 그 패턴이다. 헤이든에겐 아르카나 시내에 나간다고 거짓말 치고는 하룻밤이 지나도록 안 들어오고 말이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처지겠냐마는,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겠지.

    시아는 결심한 듯 라크시스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의미가 명백한 제스처에 라크시스가 살짝 당황하고 있을 때 시아는 선수를 쳤다.

    ‘까짓거 해봐요, 그러면.’

    예상 밖의 반응이었는지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곧바로 붙잡지 못했다. 얼떨떨하게 마주 악수를 하다가 곧 시아가 진심이란 걸 깨닫고 탁 풀어지듯 미소를 지었다.

    ‘대신 당신이 해주었으면 하는 역할이 있는데. 부탁해도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 * *

    그가 부탁한 건 바로 연기였다. 재키 레이븐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연기.

    ‘지금까지의 살인 사건들을 떠올려보자면 재키 레이븐은 오만한 데다가 자존심이 강한 편이에요. 자신이 길거리의 여자들보다 우월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할 테죠.’

    라크시스의 분석은 후대의 소설이나 연극에서 드러나는 재키 레이븐의 캐릭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시아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자 라크시스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마 자신이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서 도발을 받으면 곧바로 살인 계획을 세울 겁니다.’

    ‘그 도발을 저보고 하라고요?’

    ‘…절대로 당신이 다치게 두진 않을 테니까.’

    살인마에게 미끼로 던져진다는 건 둘째 치고, 라크시스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챈 시아는 얼른 되물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헨리 순경이 지금까지 절 얕잡아 봤다는 거예요?’

    하, 그렇게 안 봤는데.

    오히려 슈나이더 경사 쪽이 저를 얕잡아 봤다면 얕잡아 봤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청년의 이미지가 강했던 헨리가 그렇게 봤다고 생각하니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런 말이 있죠. 신사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여인은 오직 황제 폐하뿐이다.’

    물론 황제 폐하도 저속한 농담의 주제로 삼는 것들이 사교 클럽의 신사들입니다만. 라크시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상대가 레이디든 매춘부든 얕봤을 겁니다. 당신을 탐정놀이나 하는 철모르는 레이디라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그랬을 거고요.’

    ‘그래서 헨리 순경이 절 얕봤을 수 있단 말이죠? 앞에선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놓고?’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죠.’

    서서히 화가 끓어오르던 속이 일련의 생각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도리어 차분해졌다. 라크시스가 함께 있으면 웬만해선 위험한 일이 없다. 이번 시간 여행에서 찾아야 했던 봉인도 일단 찾긴 찾았고. 라크시스의 재키 레이븐 검거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마류 이상 현상이 일어날 일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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