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무례하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슈나이더 경사의 말이 떠올랐다.
‘로렌 허슬러, 저 여자 말이야. 아무리 봐도 탐정이나 할 사람이 아니야.’
헨리는 이제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거짓말 말아요. 이렇게 아파하는데 괜찮다고요?”
로렌 허슬러는 빛을 등진 채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걸었다. 그녀의 눈빛은 방금 전과 달랐다.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진실을 내놓으라는 번득임. 우위에 서는 것이 익숙한 자들에게서나 볼 법한 시선이다.
붕대 끝으로 삐져나온 손가락이 저릿했다. 사실 헨리는 극심한 고통을 엄청난 인내심으로 참고 있었다.
슈나이더는 로렌 허슬러가 탐정놀이에 빠진 귀족 영애 같다는 의미로 말했겠지만. 헨리는 새삼 슈나이더의 말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탐정이나 할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렌 허슬러는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곤 제 귓가에 천천히 속삭이기 시작하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바싹 돋았다.
“…당신은 팔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잖아. 왜일까? 뭘 숨기고 싶어서?”
“미스, 허슬러.”
헨리가 할 수 있었던 반항은 고작 눈앞의 여자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는 것뿐이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이렇게 마주칠 사람도, 내가 움츠러들 상대도 아니었을 텐데.
당신이 뭘 알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느냔 말이야.
로렌 허슬러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나친 압박감에 짓눌린 입술은 덜덜 떨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는 절대 알아챌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이었다.
한참을 주고받던 시선 속에서 결국 이긴 자는 로렌 허슬러였다.
로렌은 헨리의 어깨를 짓누르던 손을 떼어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전 모르간 출신이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면 보수적인 이 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죠.”
패배자를 달래는 것처럼 로렌 허슬러의 목소리가 사뭇 나긋하게 감겨들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로렌은 헨리의 뒤에서 자그마한 성녀 상을 집어 들어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보아하니 국교를 믿는 모양인데. 전 순경님이 무엇을 숨기든 비밀로 할 생각이 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치료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지난번에 봤었죠? 전 의사가 아니라 의술사라는 거. 여기 제 마력 신호 일련번호예요. 그 팔, 내버려 두면 제대로 못쓰게 될 것 같으니 잘 생각해 보고요.”
로렌은 헨리의 팔이 아닌 장갑 낀 손을 툭툭 치고는 마력 신호 일련번호가 적힌 명함을 헨리의 손에 쥐여주었다. 언제 그를 협박했냐는 듯 탐정의 모습으로 돌아와 순경 헨리에게 깍듯하게 악수를 청할 뿐이었다.
헨리는 그녀가 내민 손을 받았다. 레이디는 악수를 하지 않는 법. 누가 봐도 귀족처럼 차려입은 탐정이 경찰과 악수를 하는 장면은 생경하고도 기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라크시스와 그런 라크시스까지 멀리서 지켜본 슈나이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뭔가 있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슈나이더는 계속 눈치를 보다 마침내 끼어들 타이밍을 찾아내곤 로렌 허슬러에게 얼른 말을 붙였다.
“큼, 크흠. 미스 허슬러. 헨리 순경과 말씀은 다 나누셨습니까?”
“아, 슈나이더 경사님.”
로렌 허슬러가 활짝 웃으며 슈나이더를 바라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릴리 알펜 양에 대해 마저 진술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이죠, 경사님. 바깥일은 다 해결되셨고요?”
슈나이더는 속을 알 수 없는 낯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헨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은 해결된 것 같군요.”
* * *
그 후로 시아와 라크시스는 삼십여 분 정도를 슈나이더의 사무실에 머물렀다.
“역시 재키 레이븐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슈나이더는 지금까지 추려낸 용의자를 줄줄 읊었다. 유명한 인물들이 대거 끼어있어서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졌지만, 재키 레이븐이 얼마나 베일 속에 숨어있었으면 그러나 싶기도 했다. 슈나이더가 언급한 용의자에는 심지어 붉은 머리 대공, 차탈 세페란테도 있었다.
“넘어서 굴러떨어질 창문과 계단이 있으니 말이죠. 공장지대인 메이덜린에 거주하는 것으로 봐서는 노든 대공은 제외되겠지만요.”
슈나이더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편지를 남기는 것도 알 만합니다. 국교의 교리를 철저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이 거리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간음하지 말라. 아가씨는 깨끗한 여인이니 아직은 죄를 짓지 않은 몸이지만.’
‘음욕을 품은 눈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간음하였을진대.’
국교의 교리가 담긴 성서의 한 구절이었다. 릴리 알펜은 분명 재키 레이븐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한참을 곱씹던 슈나이더 경사는 사뭇 서글프게 입을 열었다.
“그런 뜻으로 쓰인 성서가 아닌데 말입니다.”
슈나이더의 사무실 책상 위에도 성녀 상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도 국교 신자였던 모양이었다.
라크시스가 말했다.
“슈나이더 경사님. 자세한 건 미스 알펜을 만나서 더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나저나 미스 알펜의 부상이 심각한가요? 서까지 방문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자연적으로 뼈가 붙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참 걸리겠지. 치유사가 치료해 준다면 금방 나을 것이다. 하지만 시아는 치유사도 아니었고, 거기다 챙겨온 마정석의 마력도 다 써버렸다. 무엇보다 릴리 그녀가 마력 치료를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을 거예요. 기다리기 힘드시면 이쪽으로 만나러 오셔도 좋고요.”
시아의 말에 맞춰 라크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든 슈나이더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라크시스 옌이라는 이름 옆에 상상도 못한 호텔 사장 직함이 떡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트 로얄 호텔 말입니까?”
이곳 사람들도 라크시스가 호텔을 소유한 걸 잘 모르나? 아니면 릴리 알펜이 그 고급 호텔에 있다는 게 놀라운 걸까.
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의 신사분께서 장소를 제공해 주셨거든요.”
* * *
왠지 모르게 정중해진 슈나이더 경사의 배웅을 받으며 시아와 라크시스는 메이덜린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경찰서에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시아는 곧바로 모자를 벗어들곤 기지개를 켰다.
“으.”
레이디라면 길거리에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시아를 흘긋거렸으나 라크시스는 익숙한 듯 시아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죄를 짓지 않아도 경찰서에 가면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다. 거기다가 팔자에도 없는 연기까지 했으니.
“제가 제대로 했나 모르겠어요.”
뜻밖에 라크시스에게서 선뜻 칭찬이 나왔다.
“아주 잘했습니다. 배우를 하셨어도 성공했을 것 같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왜 띄워준담. 괜히 어색해져서 모자에 달린 흰 꽃 장식만 만지작거렸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썩 달가운 접촉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
헨리의 팔이며 손을 건드린 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의술사는 볼 꼴 못 볼 꼴 다 봐야 되는 직업이다. 옷과 장갑으로 둘러싸인 몸뚱이 정도야 뭐. 이번 경우엔 오히려 천에 둘러싸여 있어서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찜찜하진 않았어요. 애인에게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을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했다는 게 살짝 무섭긴 했지만요.”
사실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무서웠다기 보단 장갑 밑에 있을지도 모를 균이 더 무서웠다.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질병이라고 추측 중이었으니.
그리고 그 추측은 바로 제 옆의 이 남자가 했고 말이다.
“그런데 전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헨리 순경을 그렇게 주의 깊게 관찰하지도 않았고요.”
시아는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헨리 순경을 매독 환자라고 의심한 거예요?”
【 재키 레이븐과의 독대 】
대략 한 시간 전. 때는 경찰서 내의 소란 때문에 슈나이더 경사가 화가 잔뜩 난 채로 사무실에서 빠져나갔을 적이었다.
바깥 상황이 궁금하다는 라크시스와 함께 슈나이더의 사무실 문간에 몸을 기댄 채로 헨리 순경이 앤더슨 부인을 밀쳐내는 걸 목격한 직후였다. 라크시스가 시선은 헨리에게 고정한 채로 나직이 물어왔다.
‘시아. 당신 직업, 그러니까 의술사의 관점에서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뭔데요?’
‘사람이 간헐적으로 손을 떨면서 동시에 누군가와 접촉을 꺼린다면, 원인으로 무엇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어……. 글쎄요?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갑자기 물어보니 당황스러워서 생각이 잘 안 났다. 그래도 꾸역꾸역 머리를 굴려 대답을 생각해 냈다. 라크시스가 이런 걸 묻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손을 계속 떤다면 신경 쪽 문제일 가능성이 높고요. 접촉을 꺼린다, 라. 전염성이라도 있나? 미관상 그리 안 좋은 병일 수도 있겠네요.’
피부병이라든가, 그런 것들이요. 그렇게 덧붙이며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매끈하던 미간에 아주 가까이서 관찰해야만 볼 수 있는 구김이 있었다.
‘그런데 왜요?’
라크시스는 턱을 들어 헨리가 있는 쪽을 눈짓했다. 갑자기 헨리 순경은 왜?
‘헨리 순경님이요?’
‘시아. 당신이 사는 시대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라크시스의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사실을 읊조리는 판사처럼 라크시스는 본인의 말을 알아서 받아들이라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슈나이더 경사도, 미스 알펜도 그랬듯이 이곳 모르간엔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이런 저런 증상들을 생각하다 불현듯 한 질병을 떠올리고 말았다. 번개 같은 깨달음이었다.
‘설마, 매독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놓친 것이 하나 있더군요.’
‘뭔데요?’
뭘 놓쳤는데. 라크시스에게 얼른 답을 내놓으라 재촉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저자를 유심히 보면서 잘 생각해 봐요.’
지금 저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헨리 순경밖에 더 있나. 매독 환자인 걸 알려면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제일 정확한데.
마도 산업 발전 이면의 비위생적이고 암울한 현실은 성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서대륙 병이라고도 불리던 매독은 마도 시대에 제국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