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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0)화 (40/292)
  • 40화 

    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입학 조건에는 학사 학위나 귀족 출신 등이 있는데,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 은근히 까다로웠다. 제국군 장교 대부분이 귀족과 그들의 직계 혈족인 이유였다.

    “의외네요. 카얄이 작위까지 받은 귀족이었다니.”

    “아마 가짜 신분일 겁니다. 군 복무도 자연스럽게 상류사회에 섞여들기 위해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군요.”

    상류사회라. 아무래도 높은 신분일수록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 테니 광룡의 봉인에 손을 쓰기엔 유리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카얄은 고대 마법사였다. 라크시스의 능력을 보건대, 카얄은 굳이 신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광룡의 봉인을 충분히 찾아내 파괴할 수 있을 터였다.

    신분은 높아질수록 주목받기 마련이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에 독보적인 존재감과 상류사회의 인맥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임관 반지 하나로 이쪽에서 추측해 낸 정보가 얼마나 많은가.

    ‘뭘까. 카얄은 관심이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시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카얄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요?”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고개를 바싹 기울이고 물었다.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때 광룡의 봉인이 파괴되었을 거라 말했던 걸 기억합니까?”

    “네. 그런데요?”

    “당신이 원래 시대로 돌아가고 난 직후 중앙역 공사 현장에 매몰 사고가 발생했었습니다.”

    라크시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이번 오토마톤의 심장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사고는 광룡의 봉인 때문에 벌어졌던 것이라 추측되고요.”

    “…봉인이 현장에서 폭발했던 거군요.”

    “마폭탄 저장고에 누가 손을 쓴 모양인데, 중요한 건 그런 국가 사업지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호라.

    “마폭탄 저장고에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면 공사 현장과 관련이 있는 고위 관료일 가능성도 있네요.”

    “예. 그러니 아마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일 겁니다.”

    라크시스 옌과 켈튼의 기준으로 가깝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중산층이라는 뜻이겠지.

    시아는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간단히 추려 정리했다.

    “그럼 브레이던힐 출신에 기공식 관계자였던 사람을 추려보면 되겠네요. 거기에 금발에 6피트까지요.”

    “깔끔하군요.”

    웬일로 곧바로 칭찬이 나오네. 시아는 아쉬운 대로 헌팅캡이 아닌 작고 하얀 모자를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저 탐정 같지 않았나요?”

    “지금은 탐정 맞잖습니까. 미스 허슬러.”

    뻔뻔하게 연기해 주는 라크시스 때문에 결국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파리스 맨틀러 교수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참 한결같이 태연하고 여유롭단 말이야.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파란 눈동자가 ‘왜 그러시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팔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하여간 능글맞긴.”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로렌.”

    라크시스가 찔린 팔을 잡고 볼멘소리를 했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 때만 빼곤 항상 붙어 다녀서 그런지 라크시스가 마도사학 책의 절반을 채운 위대한 고대 마법사라는 걸 자꾸 잊는다.

    이렇게 편하게 대해도 될까.

    하지만 라크시스도 딱히 이런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다. 그의 성격상 싫으면 싫다고 말을 했을 테니까.

    “두 분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누십니까?”

    한참을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슈나이더는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딱히 경사가 알 필요는 없네만.”

    라크시스는 순식간에 원래의 오만하고 귀족적인 태도로 돌아와 슈나이더의 간섭을 차단해 버렸다.

    재수 없긴. 슈나이더는 속으로 욕했다.

    “어쨌든 좋은 정보였네. 수고했군. 슈나이더 경사.”

    라크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아가 끼어들었다.

    “아, 그리고 재키 레이븐에게서 도망친 피해자를 저희 쪽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우는 소리와 이를 말리는 소리. 기물들이 책상에서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앤더슨 부인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금 도지는 느낌이다. 슈나이더는 애써 화를 참으며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미스 허슬러께선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재키 레이븐에게서 도망친 피해자를 저희가 데리고 있다고요.”

    슈나이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망친 피해자라니. 그 말은 피해자가 살아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악명 높은 살인마에게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

    정말로 뜻밖의 정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두통이 도졌다. 난데없이 등장한 생존자는 그간 미궁에 빠져 있던 재키 레이븐 수사 과정의 모든 정보를 슈나이더의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조합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살아있다면 재키 레이븐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슈나이더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릴리 알펜. 열여덟 살이고, 처음 발견했을 당시 부상이 심해 치료한 후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해 두었어요.”

    바깥의 난리에 신경 쓰랴, 로렌 허슬러의 말에 신경 쓰랴 슈나이더는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슈나이더는 로렌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고 있었다. 아주 귀중한 정보였다.

    “그렇습니까.”

    슈나이더는 재빨리 새로운 기록지를 꺼내 들고 급히 펜으로 휘갈겼다. 시아는 슈나이더가 문장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유치장을 흔드는 소리와 경찰의 구둣발 소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뒤이어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바깥 상황과 로렌 허슬러와의 대화 중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할지 한참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슈나이더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머물러 계시다가 마저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

    혹 바쁘시다면 근시일 내에 다시 서를 방문, 아니.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슈나이더는 횡설수설 말을 덧붙였다.

    “물론이에요, 슈나이더 경사님.”

    슈나이더는 시아에게서 확답을 듣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차나 커피는 얼마든 마셔도 좋다는 말과 함께 슈나이더는 사라졌다.

    사무실에 남겨진 시아와 라크시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아, 계속 여기 앉아 기다릴 건가요?”

    “미스 알펜의 이야기가 아직 남았는걸요.”

    라크시스는 문과 가까운 쪽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전 바깥이 궁금해서.”

    슈나이더가 그렇게 말을 끊고 나갈 정도였으니 궁금하기는 했다. 어차피 기다릴 거라면 여기서 기다리나 문가에서 기다리나 비슷하지 않겠어?

    “그럼 잠깐 나가볼까요?”

    그렇게 옷매무새를 한번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환한 바깥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 * *

    “헨리, 괜찮나?”

    해밀턴 경장은 바닥에 주저앉은 헨리에게 달려갔다. 헨리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철창에 갇힌 빈민 구제원 원장에게 달려간 앤더슨 부인을 헨리가 말리려다 일어난 사단이었다. 하필이면 앤더슨 부인이 헨리의 다친 팔을 잡아버린 바람에 헨리가 쓰러지며 난리가 난 것이다.

    “순경님! 어머, 이를 어째!”

    철창을 흔들던 앤더슨 부인도 정신이 화들짝 돌아와 헨리 앞에 주저앉았다.

    “죄송해요, 순경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앤더슨 부인이 풀리려는 붕대를 감싸주려고 헨리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만지지 마!”

    헨리가 앤더슨 부인을 거칠게 밀쳐냈다.

    정적이 흘렀다.

    앤더슨 부인은 바닥을 더듬더듬 기어 뒤로 물러났다. 생채기투성이에 붕대를 칭칭 감은 헨리는 평소에 그녀가 알던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경찰 청년이 아니었다.

    시뻘건 눈자위가 사람을 찔러 죽일 것만 같다. 귓가를 울리던 목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져 그간 알고 있던 헨리 순경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극도로 예민해진 헨리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오싹함을 넘어 오한이 들었다.

    “수, 순경님.”

    경찰서의 모든 시선이 헨리에게 쏠렸다. 그제야 제게 이목이 집중된 것을 알아챈 헨리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해밀턴 경장이 놀란 앤더슨 부인을 부축해 가고, 슈나이더가 천천히 걸어와 헨리를 일으켰다.

    “헨리, 반차 넣어줄 테니까 병원부터 가라.”

    “전 괜찮습니다, 슈나이더 경사님.”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으니까 얼른 가라고!”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헨리의 표정이 순간 소름 끼쳤다. 슈나이더는 저도 모르게 부축하고 있던 헨리를 놓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하지만 슈나이더는 제가 헨리를 놓았는지도 몰랐다. 헨리가 벌인 하극상에 열받아 도리어 욱하며 역으로 성질을 냈다.

    “허이구, 참 나. 내가 미친다 미쳐. 네 돈으로 가라고 안 할 테니까 제발 좀 가라고.”

    너 때문에 중요한 대화도 하다 말고 나왔다는 말이다, 내가. 응? 슈나이더는 헨리의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칭칭 감긴 붕대를 보며 겨우 참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슈나이더의 사무실에서 나온 시아와 라크시스가 목격하고 말았다.

    * * *

    “헨리 순경님, 잠시 저 좀 보실까요?”

    “무슨 일이시죠, 미스 허슬러?”

    헨리는 그 소란이 끝나고 고집스레 제 책상에 가 앉았다. 아까의 여파 때문인지 헨리는 여전히 타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태도는 탐정인 로렌 허슬러에게도 그대로라 시아는 다음 할 말을 위해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그 팔 말이에요. 아까 보니 꽤 심각해 보이던데.”

    “전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시아는 헨리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바로 옆에서 한쪽 팔로 책상을 짚고 비스듬히 섰다. 그 자세가 마치 협박하러 온 사람처럼 보여 헨리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 시아를 노려보았다.

    어이구, 무서워라. 시아는 졸아드는 심장을 애써 팽팽하게 펼치려고 노력했다. 라크시스가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는 헨리의 다친 팔 쪽의 어깨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시아의 그림자가 헨리의 위로 드리워졌다.

    “큭.”

    붕대 부위를 직접 건드린 것도 아니었는데. 헨리는 고통 어린 신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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