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9)화 (39/292)
  • 39화 

    “해밀턴 경장님. 어떻게 절 말리실 수 있나요. 제 남편이 죽었어요. 억울하게 죽었다고요.”

    “부인…….”

    해밀턴 경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슈나이더에게 돌아왔다. 헨리 녀석이 말렸으면 효과가 있었을까. 슈나이더의 입술은 바짝 말라갔다.

    헨리는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통보도 없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근을 해도 왜 하필 오늘이야. 슈나이더는 헨리 생각을 하다가 열이 뻗쳐 바락 성을 냈다.

    “그런데 헨리 이놈 자식은 정말로 안 와?”

    “슈나이더 경사님!”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슈나이더가 해밀턴에게 쏘아붙였다.

    “해밀턴 경장, 목소리 알아서 조절 못 하나?”

    “…헨리 왔는데요.”

    해밀턴 경장이 벙쪄서 가리킨 곳을 쳐다본 슈나이더는 경악했다.

    헨리가 팔 한쪽에 붕대를 칭칭 감고는 제복도 제대로 못 걸친 꼴로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끔하게 넘긴 머리도 잘 보니 군데군데 뜯겨있었고, 잘생긴 얼굴에도 생채기가 곳곳에 나있었다. 그 와중에도 장갑은 악착같이 새걸로 끼고 있다.

    혼자 갱단이라도 쳐들어간 건지. 헨리의 성격이면 그럴 만도 했다. 한쪽에선 앤더슨 부인이 울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부하 직원이 환자가 된 채 나타나 있다.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겨우 억누르고 슈나이더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도대체가, 하. 됐다. 가서 일이나 해.”

    “옙, 슈나이더 경사님.”

    헨리는 눈치도 없는지 씩씩하게 대답했다. 척척 걸어가 아무렇지 않게 일을 시작하는 헨리를 본 슈나이더는 결국 제 사무실에 처박혀 시가 대신 싸구려 궐련을 뻑뻑 피워댔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본인이 제일 먼저 폭발할 것 같았다.

    사무실이 연기로 가득 차 유리창 안쪽이 뿌옇게 될 때까지 궐련을 피우고 나서 슈나이더는 밖으로 나왔다. 앤더슨 부인은 결국 울다가 실신했는지 민원인용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

    사무실에 차있던 궐련 연기가 경찰서 안에 퍼져나갔다. 그 연기를 뚫고 아무 책상에나 털썩 앉으려는데 헨리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왜, 또.”

    “미스 허슬러와 라크시스 옌 경 오셨어요.”

    저 멀리 경찰서 정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사와 숙녀가 보였다. 무슨 일인지 둘 다 완벽한 차림이다. 특히 로렌 허슬러 쪽이 변화가 컸다. 귀족 출신인 걸 숨기지 않으려는 건가.

    하지만 슈나이더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일이 다시 시작이다. 서류를 보낸 것이 본인이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

    “…사무실로 안내해.”

    슈나이더는 그나마 남아있는 머리카락마저 뽑을 기세로 이마를 수없이 쓸어넘겼다.

    * * *

    “…헨리 순경님.”

    “하하. 간밤에 잠자리가 사나웠지 뭐예요.”

    도대체 잠자리가 얼마나 사나우면 저런 꼴이 될 수 있지. 무엇보다 붕대가 감긴 팔이 심각해 보였다.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어깨 보호대도 없고. 의사라면 저렇게 방치했을 리가 없는데.

    “치료는 제대로 받으셨고요?”

    “심각한 상처도 아닌걸요. 대충 처치했습니다.”

    혼자 처치했다는 말이다. 치유사야 상류층의 전유물이라고 하지만, 의사는 아니다. 저 정도로 다쳤으면 병원을 가볼 법도 한데.

    혹시 형편이 안 좋은가. 병원을 못 가볼 정도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가져온 항생제와 파상풍 주사도 아직 남았다. 시아는 호텔에 두고 온 가방을 떠올리며 말했다.

    “순경님, 치료가 필요하시면 말씀 주세요. 많이는 못 해드려도 기본적인 건 해드릴 수 있으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만, 경사님이 안에 계시니까요. 일단 들어가셔서 말씀 나누세요.”

    웃기는 하는데 묘하게 꺼리는 것 같단 말이지. 내가 못 미더운가. 하지만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인 경찰과 탐정 사이에서 이 정도 호의를 베풀었으면 충분한 거다. 시아는 더는 권유하지 않고 슈나이더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도대체 궐련을 얼마나 피운 거야.’

    들어가자마자 기침이 저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블라인드까지 내려놓아 안 그래도 어두운 공간이 연기 때문에 시야가 더 뿌옜다. 하마터면 슈나이더 경사에게 한 소리를 할 뻔했지만, 시아는 이성을 겨우 붙들고 참았다.

    순간 공기가 상쾌해졌다.

    언제 궐련 연기가 가득했냐는 듯 사무실에는 싱그러운 숲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슈나이더 경사도 당황한 것이 보였다. 오직 라크시스만이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라크?”

    “그렇게 서있지 말고 앉아요, 미스 허슬러.”

    라크시스가 한 게 분명하군. 하지만 슈나이더 경사가 앞에 있어서 더는 묻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팔이 불편한 헨리 대신 해밀턴이 차를 내오고, 슈나이더는 사건 파일을 가져와 펼쳤다.

    “지난번에 두 분이 요청하셨던 파리스 맨틀러 교수에 대한 수사 자료입니다.”

    내놓은 파일이 산처럼 수북하다. 시체 도굴꾼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던 만큼 파리스 교수가 지금껏 해부했던 시신의 출처와 사건의 개요가 종이마다 빼곡히 적혀있었다.

    “갈리프도흐에 드나들던 신원 불명자가 단순히 시체를 팔러온 도굴꾼인 줄 알았습니다만, 생각보다 사건이 심각하더군요.”

    일급 살인죄로 기소된 시체 도굴꾼은 빈민 구제원 원장이었다. 수사 자료엔 그가 그간 오갈 데 없는 사람들과 구제원을 돕던 사람들을 죽여 시신을 팔았다고 적혀있었다.

    “아…….”

    문득 메이슨이 역병 의사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이유가 떠올랐다. 시신 값이 높아지자 시체를 만들어서 파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했었지. 그런 자들이 두려워 재키 레이븐인 척 행세했던 것이고.

    이제야 메이슨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누가 빈민 구제원이 살인마의 아지트라고 생각했겠는가. 서류를 보니 빈민 구제원 원장은 평소 주변에서 좋은 평판을 받아왔던 모양이었다. 이러니 누구도 쉽게 의심하지 못했을 테지.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가 알고 보니 살인마였다는 소리 아닌가. 소름이 돋았다.

    “파리스 맨틀러 교수는 자신이 공급받은 시신이 살인 피해자인 걸 알고 있었나요?”

    “그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항간에 떠도는 시체 도굴꾼 소문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었는지 제가 거래하던 시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도 그리 놀라지는 않더군요.”

    놀라지 않았다, 라.

    시아는 들춰보던 서류를 도로 닫았다.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았던 이유는 대부분이 사망자 명단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스 맨틀러가 제국 의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해부학의 어머니라 불리며 최초로 히포레스 훈장을 받게 된 건 아마도 치유사로 인해 지속된 의학의 암흑기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해부와 수술, 실험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스 교수는 자신이 해부한 시신이 평범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신에는 살인의 모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제자를 양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일같이 시신을 해부했을 테고, 그랬기에 인간의 몸이 흙과 불 따위로 이루어졌다는 원소설이나 감기에 걸리면 피를 일 리터씩 뽑아야 낫는다는 민간요법 따위에 맞서 근대 의학을 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아는 3587년, 그녀가 원래 살아가던 시대를 떠올렸다. 제국 문명의 절정이라는 마도 시대보단 삭막하고 빛바랜 시대이기는 하지만 가난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죽게 만들지는 않았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 본인이 누리면서 살아온 칠십 년 후의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시대, 제국 문명의 절정이라는 마도 시대의 어두운 이면 속에서 법의 보호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주춧돌 삼아 이룩된 것이었으니까.

    문득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의 영광은 과거의 희생으로 쌓은 탑이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 슈나이더가 보여준 수사 자료들 때문인 건 틀림없는데.

    “로렌, 맨틀러 교수가 걱정됩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약속했잖아요. 미래의 의학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고마워요.”

    시아에게선 기운 없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칠십 년 후 미래의 일은 라크시스로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화제를 돌렸다.

    “슈나이더 경사. 좋은 보고였네만, 우리가 요청한 수사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이었지.”

    라크시스는 빈민 구제원 살인 사건 파일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두 손을 천천히 모아 깍지를 꼈다.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 그자가 맨틀러 교수에게도 찾아갔었나?”

    “안 그래도 그에 대해서도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꽤 큰 단서가 될 겁니다.”

    슈나이더는 책상 서랍에서 얇은 파일을 하나 꺼냈다. 라크시스는 파일을 받아 들어 시아와 자신 사이에 펼쳐놓았다.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그녀가 고개를 슬쩍 들이밀곤 자료를 읽었다.

    메이슨의 짐작대로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은 파리스 맨틀러에게도 찾아갔었다. 마정석의 행방을 물었으나 교수가 대답 대신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목을 졸랐다고 했다.

    시아는 메이슨이 공격당하던 날 밤, 죽은 올빼미를 들고 있던 검은 코트의 남자를 떠올렸다. 방해되는 건 없애버리자는 주의일까. 참으로 잔인한 자였다.

    파리스 맨틀러 교수의 진술 중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임관 반지?”

    제 목을 조르던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파리스 교수는 손에 잡히는 의술 도구를 아무거나 집어 휘둘렀다고 한다. 하필 그게 수술용 메스였고, 남자의 손등을 그대로 찌르는 바람에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이 피투성이가 된 장갑을 벗었다고 했다.

    파리스 교수는 찰나에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두꺼운 반지를 발견했다.

    “그렇게 보였다고 합니다. 어두워서 확실하진 않지만 붉은 보석이었던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교수도 참 무모하기 짝이 없지. 그러다 범인이 정말로 죽이려 들었으면 이미 저세상에 있었을 겁니다. 슈나이더가 중얼거렸다.

    라크시스가 말했다.

    “브라이던힐 출신이로군.”

    “제국육군사관학교 말이죠?”

    “아시는군요.”

    제국 중남부의 도시 브라이던힐은 종종 제국육군사관학교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했다. 사관학교가 워낙 유명했던 탓이었다.

    “브라이던힐에선 대대로 같은 기수끼리 반지를 맞추는 전통이 있습니다. 저들의 우월감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랄까요.”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카얄은 군인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군인이라는 보장은 없을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들 전역하니까요.”

    아마 사관학교 출신의 귀족이거나 그 혈족이겠지요. 라크시스는 덧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