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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8)화 (38/292)
  • 38화 

    물론 라크시스도 눈앞에서 사람이 시체가 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경찰서가 근처였으니 경찰서에 데려가서 그들이 해결하게 두든가 가까운 병원 정도는 데려가 줄 생각이었다.

    앞서가던 시아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하마터면 그대로 부딪칠 뻔했다. 라크시스는 흠칫 물러섰다가, 뒤돌아선 그녀의 표정에 일순 정지했다.

    “재키 레이븐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았더라도 전 미스 알펜을 치료했을 거예요. 라크 덕분에 조치가 빠를 수 있었던 건 고마웠지만.”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의 눈빛이 이전과는 다르다. 그전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소한의 유대감이 느껴졌었는데.

    가느다란 끈이 탁 끊어진 것 같았다. 무기질을 바라보는 시선. 라크시스는 깨달았다.

    실망했구나.

    “제가 자선 사업가는 아니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역량으로 살필 수 있는 환자를 지나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라크시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그래요. 이번엔 제대로 실언했어요.”

    한동안 침묵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시아는 평소처럼 이것저것 묻거나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한 발자국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복도를 걷기만 했다. 침묵에 익숙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 라크시스는 망설였다. 어느 시점에 어떤 말로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하나. 가만히 있어도 남이 말을 먼저 걸어왔던 라크시스에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이었다.

    “…시아.”

    그러나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시아가 평소처럼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런 호텔에 막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새파란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시아는 복도에 전시된 오래된 명화와 조각상 따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진짜인가 아닌가 확인해 보는 듯 손가락 끝으로 슬쩍 만져보면서 말이다.

    라크시스는 기다란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요?”

    “…네. 이 호텔은 제 소유니까요.”

    허.

    그런 소리가 시아의 속마음을 뚫고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성실하게 모은 재산으로 쌓아 올린 건물입니다만.”

    “이것도 오래 살다 보니 저절로 모였다고 할 거죠?”

    시아가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벽면을 가리켰다. 그곳엔 낭만주의 화가 미르타의 유화가 떡 하니 걸려있었다. 미르타는 살아생전 그림을 몇 점 남기지 않았던 화가였다. 미술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그림이 여기에 있다니.

    하지만 라크시스는 미르타가 무명일 때 그림을 샀었다. 시아는 어디 말할 테면 말해보라는 듯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다 보니 돈이 모였다는 건 진짜인데. 단지 감이 뛰어나 그간 투자를 잘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시아의 핀잔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설마 지금까지 제 말을 안 믿었던 겁니까?”

    분명 아까까지 자신을 어색해했던 라크시스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시아는 슬쩍 웃었다.

    “아뇨, 뭐…….”

    괜히 뭐라고 했나 싶었던 참이었다. 라크시스가 재수 없긴 해도 최소한의 인간 도리는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의 실언도 왠지 날 시험해 보려고 했던 말 같은데.

    “실망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안 믿어주고.”

    “누가 할 소리. 라크야말로 방금 제 인성을 그렇게 떠보고는…….”

    아차.

    시아는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결국 라크시스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요.”

    이 남자가 내게 고개를 숙이는 건 이쪽에서도 원치 않는 일이다.

    부담스럽다, 부담스럽다고! 그냥 평소 하던 것처럼 잘난 척이나 하란 말이야. 쓸데없이 양심도 투철한 인간 같으니.

    시아는 라크시스의 양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내리깐 눈꺼풀 위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창공 같던 그의 눈동자가 심해의 밑바닥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시아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엉거주춤한 상태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당신이나 요르문이나 아직도 절 실험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실험체라니, 그게 무슨…….”

    라크시스는 고개를 들다 말고 다시금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라면 됐어요.”

    뒤늦게 그의 머릿속에 세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요르문의 연구실. 마류 이상 현상에 대해 알아보라며 찜통에 들이밀었지. 생각해 보면 시아의 입장에서는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기억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을 테지.

    “그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과도 제가 받아줘야 사과가 되는 거 아시죠?”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시아?”

    라크시스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호텔 주인인 그의 전용 최상층이라 메이드가 아무 때나 드나들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로 다행인 순간이었다.

    “어어, 이런다고 제가 용서해 줄 것 같아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시아에게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라크시스는 이제 두 무릎을 모두 꿇고 시아의 한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가느다란 여자의 손을 제 두 손으로 받들고 이마를 한 번 맞대었다가 떼어냈다.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며 이루어졌기에, 시아는 라크시스의 팔목에서 한껏 긴장한 맥박까지 느낄 수 있었다.

    라크시스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떴다. 요정 같은 속눈썹에 이슬이라도 맺힐 것 같다. 그의 시선이 벨벳 카펫에 낀 먼지를 모두 뽑아낼 것처럼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이 남자가 이럴 성격이 아닌데.

    이젠 사과가 먼저가 아니라, 누가 돌아다니다가 이 광경을 볼까 봐 겁날 지경이었다.

    “일어나요. 제발. 당신 원래 이렇게 아무한테나 막 무릎 꿇고 그래요?”

    “미안해요. 그땐 마류 이상 현상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했어요. 정말로 미안합니다.”

    결국 백기를 먼저 든 건 시아였다.

    “…됐어요. 저 같아도 의심하긴 했을 테니까요.”

    시아는 붙들렸던 손으로 라크시스의 두 손을 잡아 올리며 일으켰다. 그의 두 무릎엔 하얀 먼지가 뽀얗게 묻어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제가 원래 아무에게나 무릎 꿇는 사람이 아닌데.”

    “알아요. 아니까 받아준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을 안 했으면 더 완벽한 사과였을 텐데.”

    라크시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반짝이는 은발 밑으로 드러난 그의 귀 끝이 확 달아올라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지적했다고 부끄러워한 건가.

    “하하. 뭐, 라크답고 좋네요.”

    “또 그 말씀이시군요.”

    “전 절대 안 알려줄 거예요. 스스로 알아내는 게 내기 조건인 거 기억하죠?”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면서도 라크시스는 긍정했다. 시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일단 경찰서부터 가봐요. 슈나이더 경사에게서 연락이 왔다면서요.”

    그녀가 재촉해 왔다. 라크시스는 온갖 감정이 점령하고 있던 머릿속이 말끔히 비어버린 것을 느꼈다.

    붉은 카펫과 짙은 복도 한가운데에 하얀 드레스 차림의 시아가 선명하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미스 알펜의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얼른.”

    그래. 그랬었지. 잠시 멍하니 있던 라크시스는 순식간에 모든 표정을 감췄다. 예의 오만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라크시스는 어디선가 나타난 모자를 들고 시아의 손을 잡았다.

    “네, 갑시다.”

    * * *

    같은 시각, 슈나이더 경사는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수갑을 찬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앉아있고, 앤더슨 부인이 그런 남자를 피멍이 들도록 때리고 있었다. 나이도 들 만큼 든 여자가 어찌 저리 지치지도 않을까.

    하지만 슈나이더 경사도,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해밀턴 경장도 앤더슨 부인을 말리지 못했다.

    “이 악마 같은 것! 지옥 불에 처넣어도 모자랄 것아. 입이 뚫려있으면 말해봐라, 왜, 왜! 내 남편이었어, 도대체 왜!”

    삼십 분 가까이 수갑 찬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사정없이 때리던 앤더슨 부인은 이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너무나도 서러워 경찰서의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슈나이더는 한숨을 쉬고는 실종자 명부를 펼쳤다.

    [브루던 앤더슨 / 남성 / 48세 / 메이덜린 퍼스트 스트릿 거주 / 본인 소유 청과물 상점에서 퇴근하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됨.]

    [3517년 7월 28일 실종 신고 접수 - 3517년 8월 5일 사망 확인]

    파리스 맨틀러 교수를 찾아간 슈나이더는 재키 레이븐과 시체 도굴꾼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미스터 비렌체의 우려대로 파리스 교수 역시 한밤중에 찾아온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에게 위협을 받았고, 그랬기에 사칭범에 대해서는 묻는 족족 곧잘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시체 도굴꾼에 대해선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그렇지. 갈리프도흐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라면 제가 해부하는 시신이 어떻게 공급되는지 정도는 짐작하고 있겠지. 결국 파리스 맨틀러에게서 시체 도굴꾼의 소재를 받아냈다.

    ‘차라리 도굴한 시체였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끔찍한 광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썩은 내가 진동을 한다. 자루에 담겨 일렬로 늘어져 있는 시체는 무덤에서 파낸 것이 아니었다.

    연쇄살인. 시체 도굴꾼의 집에서는 수십 인분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조리 도구와 기도 협착을 유발하는 극독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흉악한 살인마도, 괴상한 취미를 가진 시체 도굴꾼도 아니었다.

    따뜻한 한 끼를 나누는 이웃. 가난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의인. 범인은 바로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 알려져 있었던 빈민 구제원 원장이었다.

    빈민 구제원 뒤뜰의 작업실엔 갈리프도흐 의학대학과 시체를 사고팔았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실종되었다던 브루던 앤더슨의 이름이 바로 그 시신 판매 명부에서 발견되었다. 빈민 구제원에 종종 남는 과일을 가져다주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사람을 죽여서 팔 생각을 어떻게 하냐고!”

    “부인, 진정하세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앤더슨 부인은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해밀턴이 달려가 말려봤지만 앤더슨 부인은 그 손길조차 뿌리치고 바닥에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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