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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7)화 (37/292)

37화 

번쩍.

“세상에…….”

수천 개의 혈관, 근육, 뼈. 해부 모형도를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비쳐 보였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움직임이 생생하게 보인다.

신기하게도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은 그림자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라크시스가 버튼 밑의 다이얼을 돌리자 굵직한 다리뼈가 한층 선명해졌다.

금 간 뼈가 보인다. 어긋난 곳도 없고, 다행히 심한 골절은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구른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아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똑같은 광경을 목격한 릴리는 신음했다.

“죽, 죽을 때가 된 거야. 내가 유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골이 아니면 뼈를 볼 일이 없다. 릴리 알펜도 마찬가지였다.

“미스 알펜!”

릴리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 * *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당신이 사설탐정인 로렌 허슬러이고, 저기 계신 분이 당신을 고용한 고대 마법사…라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그리고 저희는 메이덜린 경찰의 의뢰를 받아서 재키 레이븐을 추적하고 있고요.”

사실 거짓말이었지만.

릴리는 여전히 앓는 소리를 냈지만, 메이덜린 시가지에서 기절했을 때만큼 괴로워하진 않았다. 확실히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다친 다리는 부목을 덧댄 부드럽고도 단단한 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릴리는 한쪽 다리는 침대에, 다른 쪽 다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늘어뜨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앉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게 힘들 수 있겠지만, 괜찮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로렌 허슬러라는 여자는 친절했다.

그럼에도 릴리는 입을 다물었다.

큼지막한 샹들리에서 쏟아진 빛이 꾀죄죄한 제 치마 위에 보석 같은 자국을 남겼다. 케르딕 7세 시절의 양식을 그대로 본떠 만든 고풍스럽고 화려한 호텔 방은 가구 하나하나가 다 비싸고 고급스러웠다. 어딜 둘러봐도 감히 제가 함부로 손대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새하얀 거위 털 베개며 폭신한 이불에 몸이 편한 것도 잠시, 매춘부 따위를 치료해 주겠답시고 이런 호텔로 데려온 로렌 허슬러라는 여자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일반적인 탐정의 벌이로는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날 왜 치료해 준 걸까.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뭘까. 재키 레이븐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는 걸까.

경찰에 데려다줬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분명 메이덜린 경찰서까지 거의 도착한 상황이었다.

릴리는 벌겋게 부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이 어젯밤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릴리는 흠칫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무섭고 서러웠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만약 그대로 죽임을 당했어도 나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노숙자나 매춘부가 길거리에서 죽어나가는 건 모르간에서 일상이었으니까.

“흐흑…….”

“이런, 미스 알펜. 미안해요.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심호흡부터 천천히, 응?”

따스한 손길이었다. 릴리는 제게 닿은 로렌의 유백색 원피스가 더러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에는 부드러운 힘이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받는 친절은 애써 버티고 있던 감정의 둑을 툭 무너뜨렸다. 릴리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조용히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재키 레이븐이 매춘하는 여자를 죽인다는 건 탐정님도 잘 아실 거예요.”

아, 이제 괜찮은가. 시아는 릴리를 살피며 귀를 기울였다.

“이런 소문 혹시 들어보셨을까요. 재키 레이븐은 여자를 사지 않는다.”

“그게 무슨…….”

“피해자들은 모두 처음 몸을 팔았던 사람이었대요. …네, 마치 저처럼이요.”

꼼지락거리던 릴리의 앙상한 손가락이 시아의 손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재키 레이븐이 처녀의 순결을 지키는 악마라고 말하기도 하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잘도…….”

결국 릴리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모르간이 얼마나 살기 힘든 곳인데요. 길거리에서 험한 꼴을 당하기 싫으면 2쿠퍼 짜리 줄에 매달려 자고 1쿠퍼 짜리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하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 높은 분들은 알까요. 공장에서 손목을 다치고 나니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징글징글해도 돈을 주는 건 그곳뿐이었는데.”

릴리는 꺽꺽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말을 토해냈다.

“여긴 사람이 넘쳐나요. 그러니까 이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거예요.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 사람들은 매춘을 경멸하지 않는다는 거죠. 눈살을 찌푸려도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해 준답니다. 그래서였어요. 굶어 죽기 싫었고, 길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긴 더 싫었어요.”

“미스 알펜…….”

“마담이 그랬어요. 나 같은 애들이 제일 위험하다고. 혹시나 검은 코트의 금발 신사를 만나거든 처음인 티를 내지 말라고.”

처음으로 몸을 버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릴리는 메이덜린의 유흥가를 찾아갔다. 2쿠퍼에 길거리에서 그런 짓을 할 용기까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는 건 물 한 잔조차도 받지 말라고. 몸이라도 오래 팔아먹고 살려면 죽는 것부터 피하라고.”

다행히 마담은 마르긴 했어도 예쁘장한 릴리를 좋게 봤다.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해 들여보내 씻기고 새 치마도 주었다.

“바보 같았죠. 돈에 눈이 멀었던 거예요. 금발이긴 해도 코트 차림은 아니었고, 제가 미숙하게 구니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금발의 신사가 어디 한둘이냐고 생각하면서 방심했어요. 아마 그때부터 절 표적으로 삼았던 거겠죠. 재키 레이븐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눈물이 서서히 멈춰 들었다. 속이 후련해졌다.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말한 적이 있었을까.

“…죄송해요, 레이디. 제가 무례를…….”

“괜찮아요, 괜찮아. 누구도 이런 걸 무례라고 하지 않아요.”

릴리는 그 후로 한참을 더 울었다. 시아는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기만 했고, 라크시스는 모든 걸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릴리 알펜은 자신이 만난 남자가 재키 레이븐이 틀림없다고 했다. 남자가 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낯선 침대에 누워있었고,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더랬다. 릴리는 계속 잠든 척을 했다.

‘간음하지 말라. 성서에는 그렇게 적혀있지. 아가씨는 깨끗한 여인이니 아직은 죄를 짓지 않은 몸이지만.’

남자는 이내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재빨리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그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었다.

컥. 목이 짓눌리면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릴리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음욕을 품은 눈만으로도 이미 마음은 간음하였을진대. 아가씨는… 아하.’

남자가 잔인하게 웃었다.

‘깨어있었구나?’

천운이었을까. 갑자기 벨을 누르는 손님 때문에 남자는 릴리의 목을 조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알싸한 술 냄새가 나는 천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자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릴리는 이번에도 재키 레이븐의 예상보다 정신을 빨리 차렸다. 릴리가 방 밖으로 몰래 나와 1층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도달했을 때 볼일을 마친 남자가 현관으로 들어왔고, 릴리는 생각할 경황도 없이 창문으로 도망치다가 남자에게 붙잡혀 함께 창문 밖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비명을 질렀더니 사람들이 쳐다봤어요. 아마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재키 레이븐은 그대로 절 끌고 들어갔을 거예요.”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도망치다가 시아에게 부딪친 것이었다. 시아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했다.

릴리는 시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더 말씀드릴 건 없을까요?”

아마 없을 것이다. 이쪽에서 찾고 있었던 건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이지, 진짜 재키 레이븐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보죠. 혹시 그가 보석이나 마정석 같은 걸 찾진 않던가요?”

“그런 게 제게 있을 리가요.”

하긴. 시아는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와 고대 마법사가 무언의 대화를 눈으로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릴리는 곧 로렌 허슬러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초조해하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시아는 그걸 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스 알펜. 아픈 사람을 쫓아내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하지만…….”

“당신의 증언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지금 당장 경찰에 데려가 주고 싶지만 그 다리로는 무리인 거 알죠?”

볼일이 끝났으니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웬걸. 레이디는 룸서비스를 불러 먹을 것까지 주곤 이불을 덮어주었다.

미트파이와 커피, 잼 바른 스콘 따위의 간단한 음식 뿐이었지만 릴리는 그조차도 감히 편하게 먹어본 적 없었다.

“편하게 있어요. 그래도 될 거예요.”

그렇죠? 시아는 라크시스를 향해 눈짓했다. 라크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었다.

“우린 경찰서에 다녀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풋맨을 부르도록 해. 알겠나?”

고대 마법사는 로렌 허슬러를 에스코트하며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야 릴리는 김이 나는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 잔은 레이디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단단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온기를 받아본 것은.

눈물방울이 검은 물 속으로 뚝 떨어졌다.

텅 빈 호텔 방에서 릴리는 한참을 울었다.

【 탐정 로렌과 맞춰진 퍼즐 】

“혹시나 했는데 아니었네요.”

괜히 일기장에 적힌 주기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게 아니었다. 글레이셜 홀의 오토마톤에서 봉인, 정확히는 파괴된 봉인을 이미 발견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번 시간 여행에서 봉인을 찾으러 다니는 카얄을 다시 마주칠 가능성은 희박하긴 했다.

알고는 있었다. 다만 카얄에 대한 단서를 더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붉은 벨벳 카펫이 길게 깔린 복도는 아까의 방과 마찬가지로 화려했다. 금으로 테를 두른 난간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시아의 말수가 부쩍 적어졌다. 호텔 메이드조차 오가지 않는 고요한 복도에서 라크시스는 반걸음 앞서가는 조그만 뒤통수를 응시했다.

“카얄이 아니라 실망했습니까?”

“…….”

“괜히 시간을 잡아먹었군요. 여자를 거리에 두고 갔으면 귀찮은 일은 없었을 텐데.”

이 여자는 어디까지 사람을 챙기려 들까.

라크시스는 궁금했다. 미스터 비렌체의 일도 그렇고 방금 릴리 알펜을 챙긴 것도 그렇고.

의술사라서 그런 걸까. 요르문의 연구실에서 광룡의 봉인이 폭발했을 때 제게 달려든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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