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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6)화 (36/292)
  • 36화 

    “장관은 장관이네요.”

    라크시스도 그녀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건 그렇군요.”

    “한숨 돌리고 미스터 비렌체에게나 다시 가볼까요?”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또다시 다른 곳에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왠지 모를 불안함을 선사했다.

    “라크. 또 무슨 일이에요?”

    푸른 빛과 함께 공중에서 황색 서류 봉투가 떨어졌다. 아르카나 중앙 우편국을 통한 급보였다. 마도 문명의 절정이었다는 마도 시대답게, 고유 마력을 우편국에 등록해놓은 사람에겐 마력 신호 일련번호만 알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마력을 추적해 우편물을 보낼 수 있었다.

    위치추적 우편 시스템이라니. 마법이 없는 미래에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라크시스는 익숙하게 봉투를 받아 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메이덜린 경찰서로군요. 파리스 맨틀러 교수에게 다녀온 모양인데.”

    시체 도굴꾼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니 어쩔 수 없이 수사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는 뉘앙스가 활자마다 가득하다.

    광룡의 봉인은 파괴되었지만 카얄은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다. 단서도 얻을 겸 가보는 게 좋겠지.

    “가볼까요?”

    라크시스가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시아가 본인이 쓰고 있던 작은 모자를 벗어 눈을 가린 채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시아를 조심스레 붙들었다.

    “동의한 걸로 알겠습니다. 레이디 켈튼.”

    * * *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으로 순간이동해서 천천히 걸어가던 차였다.

    경찰서를 코 앞에 두고 어둑한 골목 하나를 지나던 순간, 골목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꺄아악!”

    꾀죄죄한 몰골의 여자였다. 앞도 보지 않고 돌진한 탓에 시아와 그대로 부딪친 여자는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윽.”

    “시아, 괜찮습니까?”

    다행히 시아는 라크시스가 곧바로 붙들어 바닥에 엎어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라크시스의 팔에 휘감긴 채로 정신을 차린 시아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 전 괜찮은데…….”

    시아는 제 몸을 둘러싼 단단한 팔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잡기 싫은 물건처럼 팔이 들어 올려져 라크시스가 당황하든 말든 그의 팔 밑으로 몸을 수그려 빠져나온 시아는 구겨진 치맛자락을 탁탁 털어 펴곤 쓰러진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쓰러진 그 자리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나 꼼짝 않고 있었는지 잠시 동안은 정말로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매 사이로 드러난 비쩍 마른 팔다리가 부딪친 충격만으로도 죄다 부러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걱정되어 치마를 움켜쥐고 앉아 여자의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여자는 살아있었다. 시아의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으니 말이다.

    “아으, 으흐윽……. 살려, 주세요…….”

    웅크린 여자를 살펴보니 온몸이 생채기투성이였다. 붉은 치마 사이로 드러난 다리는 어떻게 다친 건지 찰과상을 입은 채 단단히 부어 벌게져 있었다.

    “전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자는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모르간 억양의 젊은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엉금엉금 기어 시아의 발목을 붙들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레이디, 제발 도와주세요. 경, 경찰에 데려다주세요, 제발…….”

    “저기, 진정하시고. 괜찮으세요? 혹시 일어날 수 있겠어요?”

    시아는 여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여자는 다친 다리의 고통이 심한지 한쪽 발로 섰다. 시궁창에서 구른 듯 엉망인 몰골을 하고도 여자는 꽤 미인이었다.

    붉은 치마. 라크시스는 그 차림을 보고 여자의 정체를 짐작했다. 매춘을 하는 여인이었다.

    눈처럼 새하얗던 치마가 땟국물로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 않는 시아를 보고 라크시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메이슨을 치료하던 그날 밤을 떠올려보자니 시아의 성격상 다친 사람을 그냥 지나칠 것 같진 않기는 했다.

    “미스, 음. 당신에겐 치료가 우선일 것 같은데. 걸을 순 있겠어요?”

    왠지 골절 같은데. 어디서부터 온 건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뛰어온 것도 용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종종 한계를 뛰어넘곤 한다. 몇몇 호르몬이 순간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근력을 상승시키는 탓이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도 뒤늦게 몰려오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렸던 거다. 경찰을 찾았던 걸 보니 아무래도 보통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와주세요……. 재키 레, 이븐이 절…….”

    뭐?

    여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라크,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저도 똑똑히 들었어요.”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여자의 몸을 부축하기 버거워 버둥거리고 있는데, 순간 두 팔이 가벼워졌다.

    마법이었다.

    “라크?”

    “시아. 그 여자를 치료할 생각이죠?”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했나.

    라크시스는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켈튼 저택에 두고 온 시아의 가방을 달랑달랑 흔들고 있었다.

    그냥 환자였어도 지나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 우리가 쫓는 건 바로 카얄 그자였으니까.

    “환자가 편히 누울 마땅한 곳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요.”

    “없진 않죠.”

    메이덜린 경찰서를 목전에 두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세 개의 그림자가 푸른 빛을 남긴 채 이내 사라졌다.

    * * *

    릴리 알펜. 시아와 부딪쳤던 젊은 매춘부는 난생처음 보는 호화로운 호텔 방과 정성 어린 치료에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레이디, 전 죽었다 깨어나도 이 호텔 방의 한 시간어치도 갚을 수가 없어요.”

    제발. 릴리는 울기 직전의 얼굴로 하얀 드레스의 레이디를 말렸으나 시아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릴리의 다리를 치료했다.

    “일단 응급처치는 됐어요. 계단에서 굴렀다고 했었나요.”

    X선이 있었다면 더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시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퉁퉁 부은 다리를 고정시켰다.

    “레이디, 제발 그만 하세요.”

    “미스 알펜이라고 했죠? 제가 돈 욕심이 있었으면 애초에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어요.”

    부목을 대어 응급처치를 해놓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시아가 팔짱을 끼고 끙끙거리자 라크시스가 물었다.

    “필요한 게 뭔데 그래요?”

    “음, 이 시대에는 아직 없는 물건이라서요.”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뼈? 혈관? 말해봐요.”

    무슨 수로 사람의 내부를 들여다보려고. 라크시스가 너무 자신 있게 나오자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 없었다.

    “…뼈요.”

    “이걸 사용해 봐요.”

    둥근 원통처럼 생긴 기계였다. 양손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난 걸 빼면 투박하기 그지없는 두꺼운 거대 철제 휴지심이었다. 다만 손을 넣는 구멍 위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판이 있었고, 마도 시대의 기계답게 일정한 간격으로 녹색 마정석이 빼곡히 달려있었다.

    “뭔데요?”

    “여기에 저 여자의 다리를 끼우고 버튼을 눌러봐요.”

    가만 보니 버튼도 있었다. 마도 시대의 기계니까 뭔가 있긴 있겠지.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시도해 보려 했으나.

    “어……. 사람 다리를 넣기엔 기계가 좀 작은데요.”

    사람 팔뚝 정도밖에 안 들어갈 만큼 좁은 원통의 통로로는 제아무리 릴리의 다리가 비쩍 말랐대도 넣을 수가 없었다.

    라크시스는 말없이 기계 한쪽에 달린 또 다른 버튼을 눌렀다.

    버튼이 또 있었어?

    그런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철컥거리며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계의 틈이 척척 벌어지기 시작했다.

    “라, 라크!”

    “아직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황동빛 외관에 가려져 있던 부품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면서 기계가 점점 몸집을 부풀리더니 어느새 사람 다리 하나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커졌다. 라크시스가 버튼을 다시 한번 누르자 온갖 톱니바퀴와 나사와 코일들이 순식간에 나타난 철판에 가려졌다.

    맨 처음의 형태 그대로 크기만 그대로 커진 셈이었다. 얼떨떨하게 있자 라크시스가 시아의 한쪽 손을 가져가 쥐었다.

    질감이 특이한 장갑이었다. 얼핏 가죽으로 보이는 하얀 장갑을 그가 시아의 손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손가락 끝까지 밀어 넣고 잘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손가락 마디와 틈을 살살 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피부가 왠지 간지러운 느낌이다.

    “반대쪽은 본인이 껴요.”

    껴줄 거면 다 껴주든가, 처음부터 나보고 끼라고 다 주든가.

    툴툴거리고 있다가 시아는 라크시스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하. 말을 말지. 시아는 장갑을 낚아채듯 빼앗아 반대쪽 손에 꼈다.

    “그래서 이게 다 뭔데요?”

    “사람의 몸을 볼 수 있는 기계라고나 할까요.”

    기능이 미심쩍긴 했지만 무려 라크시스가 한 말이었다. 저 정도로 확신한다면 믿어볼 만했다.

    “미스 알펜, 잠깐 실례할게요.”

    라크시스가 시키는 대로 릴리의 다리를 기계 사이에 끼우고 버튼을 눌러 마정석을 가동시켰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원통 안쪽이 옅은 녹색 빛과 함께 밝아지기 시작했다.

    “레이디, 제 다리를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릴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게 웬 낯선 사람이 다리를 치료해 준답시고 호텔 방으로 끌고 와선 이상한 기계에 설명도 없이 넣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당신의 다리를 더 정확히 살펴볼 수 있을 거예요. 미스 알펜도 뼈가 엉망으로 붙길 원하진 않죠?”

    “그건 그렇지만……. 이건 무섭단 말이에요.”

    기계에선 레이저를 예열하는 듯한 소리가 웅웅 이어졌다. 모르는 사람은 겁먹을 것 같긴 했다. 하긴 X선이 없는 시대이니 뼈를 본다는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 준비가 안 된 환자에게는 미리 고지했어야 했는데.

    이미 기계는 돌아가고 있었고, 시아의 머릿속엔 최초의 X선 발견자가 보인 반응이 떠오르고 말았다.

    환각을 봤다고 스스로를 의심했댔나.

    시아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서운 건 아닐 거예요.”

    “…거예요?”

    “놀라지만 말아요, 알겠죠?”

    릴리의 얼굴이 두려움과 의문으로 물드는 사이, 유리판 너머로 그녀의 앙상하고도 부은 다리가 점점 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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