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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5)화 (35/292)
  • 35화 

    “아버지께서 요르문의 당숙 되시는 분이랍니다. 술란과 가멜에서 줄곧 면화 무역을 해오다 보니 수도에는 얼굴을 비출 기회가 없었던 점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이런 미인을 모르간 사교계에 보내지 않으시다니. 아버지 되시는 분도 참 무심하십니다.”

    손등이 끈적해지는 기분이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서있자,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팔을 내밀었다. 시아는 재빨리 라크시스에게 달라붙었다.

    “이쪽도 갈 길이 바쁩니다만. 아시지 않습니까, 로드 웰링턴. 이곳의 물건들은 먼저 계약해야 임자인 것을.”

    “아아. 이거 실례했군요. 암요, 모름지기 발 빠른 사업가가 성공하는 법이지요.”

    라크시스는 모자를 한 번 까딱이곤 얼른 가라는 듯 눈짓했다. 웰링턴 백작은 결국 쫓겨나듯 자리를 떴다.

    백작이 사라지자마자 라크시스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자, 고생했어요.”

    동지애라도 생긴 표정이었다. 시아는 쿡쿡 웃으며 손등을 닦았다.

    “라크도 싫어하는 눈치던데요.”

    “싫습니다.”

    와, 단호하네. 라크시스는 손수건을 돌려받자마자 허공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평판이 썩 안 좋은 자거든요. 입도 가볍고.”

    무엇보다 부인인 레이디 웰링턴이 로드 웰링턴의 딸뻘이라. 라크시스는 진저리를 쳤다.

    “어쨌건 라크가 보내버렸으니 해결된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라크시스가 납득했다. 이젠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팔을 살짝 당겼다.

    “일단 갈까요?”

    * * *

    오토마톤 관에 들어서자마자 요르문과 메이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빛 머리 마법사와 그 앞에 몰린 수많은 인파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도 힘들 테니까.

    요르문이 함께 있어서 그런지 메이슨의 오토마톤들에는 벌써 계약 완료 표시가 꽤 되어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들 땐 무서웠는데. 하얀 치마를 입고 공기처럼 춤을 추는 오토마톤들은 정말로 살아있는 무용수처럼 아름다웠다. 메이슨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모르겠지.

    제작자인 그는 마냥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신과 씨름하며 연구비를 벌던 무명의 발명가였으니, 이런 인기가 신기하면서도 즐거운 것일 터다.

    메이슨은 그렇다 쳐도 요르문까지 덩달아 신난 건 의외였다. 요크 부인에게 두 사람이 친해졌다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시아가 등 뒤까지 다가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요르문을 불렀다.

    “요르문.”

    “…이럴 수가, 누님.”

    요르문은 뒤돌아 선 그대로 멈춰버렸다. 메이슨도 덩달아 시아를 쳐다보더니 멍한 표정이 되었다.

    “왜들 그러고 있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요크 부인이 그렇게 블레어 스트릿에 가겠다고 하더니, 다 계획이 있었군요.”

    다들 왜 이러지. 요르문은 이젠 시아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한참을 살폈다. 라크시스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폐장할 때까지 그러고 있을 기세였다.

    “…흰색이 잘 어울리세요. 그… 모자도, 양산도 잘 어울리시고요.”

    “어, 응. 고마워.”

    시아는 하얀 꽃 장식이 달린 모자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요크 부인의 안목이 좋긴 좋았지. 객관적으로 봐도 옷이 예쁘긴 했다. 과하지 않은 레이스에 미색 옷감이 보기 좋게 겹쳐 우아하게 보이긴 했으니까. 불편한 것만 빼면 좋을 텐데.

    라크시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요르문을 지팡이로 밀어내며 물었다.

    “별일은 없었고?”

    “딱히. 혹시나 해서 대비도 해놨는데 말이지.”

    요르문이 품 안에서 마류 탐지기를 꺼냈다. 시아는 제 작은 손가방을 꽉 채운 마류 탐지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도대체 몇 개나 있는 거야?”

    “누님께 드리고 하나 더 만들었어요.”

    요르문이 손가락을 튕기자 오토마톤 관을 둘러싼 냉난방 마정석에 빛이 돌다가 사라졌다.

    “글레이셜 홀에는 카얄이 나타나면 감지할 수 있게 수식을 추가해 뒀는데 말이죠.”

    라크시스와 시아가 했던 추론 중 하나는 ‘카얄은 틀림없이 글레이셜 홀에 다시 나타난다’였다. 오토마톤 안에서 발견한 봉인은 카얄이 선수 친 탓에 속이 텅 비어있었다. 껍데기만 남은 봉인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를 카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만약 시아와 라크시스가 진작 봉인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글레이셜 홀은 박람회 개막일인 오늘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붕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박람회가 멀쩡히 개최되었으니 궁금할 법도 할 터였다.

    어째서 봉인이 멀쩡한가.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을까. 봉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관람객을 가장하고 글레이셜 홀에 찾아오지 않을까.

    “아직 안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토마톤관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메이슨은 다른 관에 전시한 발명품까지 끼워팔기로 홍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운신이 멀쩡한 걸 보니 몸이 괜찮아지긴 했나 보다.

    “이왕 이렇게 오신 거 누님도 글레이셜 홀을 둘러보시는 건 어떤가요? 미래에는 없는 곳이라면서요.”

    사실 바라던 바이긴 했다. 하지만 시아는 다른 대답을 했다.

    “카얄이 올지도 모르잖아. 힘들 때 교대라도 해주려면 같이 있는 게 낫지 않겠어?”

    핑계는 이렇게 댔지만 요르문이 본인의 연구 성과를 전시하는 것도 아닌 곳에 혼자 묶여있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시아. 카얄이 와도 당신은 큰 전력이 되진 않습니다만.”

    와중에 라크시스가 말로 때리는 바람에 뼈가 아팠다. 시아는 입을 삐죽였다.

    “…저도 알고는 있거든요.”

    “그럼 다녀오세요, 누님.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드릴게요.”

    “어떻게 알려주려고?”

    “이걸 가져가시면, 앗. 자네 뭐 하는 짓이야.”

    조그마한 마정석을 내밀던 요르문의 손이 가로막혔다. 요르문에게서 마정석을 낚아챈 라크시스는 제 안주머니에 마정석을 넣어버리고는 시아의 대답을 가로챘다.

    “연락은 이쪽으로 하지.”

    “참 나. 네가 누님 보호자라도 되나?”

    “레이디가 에스코트 없이 돌아다니게 할 순 없지. 안 그런가?”

    “하, 이럴 때만 신사인 척하지.”

    흥. 라크시스가 콧방귀를 뀌며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태껏 본 모습 중에 가장 정중한 태도였다.

    “가실까요, 레이디 켈튼?”

    아, 예. 시아는 떨떠름하게 맞장구를 쳤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으나 거부할 명분은 이쪽에도 없었다. 자신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었고, 괜히 구설에 오르기도 싫었다. 게다가 박람회를 구경해 보고 싶긴 했으니까.

    “다녀올게, 요르문. 미스터 비렌체에게 문제가 생겨도 연락해 줘.”

    “물론이에요. 누님.”

    오토마톤 관을 떠나려는데 요르문이 시아를 붙잡고 덧붙였다. 표정이 심각하기에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혹시 저놈이 허튼짓을 할 것 같으면 정강이를 차버리세요.”

    이런 게 친구인가. 라크시스의 고운 얼굴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도 요르문은 꿋꿋하게 말했다.

    “허튼짓?”

    “가운데를 차버려도 좋을 것 같네요.”

    “네 할 일이나 하지, 꼬맹이?”

    라크시스가 지팡이로 오토마톤관을 가리켰다. 요르문은 무서움에 떠는 척 제 팔을 감싸 안았다.

    “어유 무서워라. 보면 아시겠죠, 누님?”

    시아는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며 웃을 뿐이었다.

    * * *

    라크시스는 꽤 훌륭한 가이드였다. 어떤 관에 들어가도 수준급의 설명을 곁들여 주었고, 덕분에 시아는 아주 편하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시아는 묻는 족족 대답이 나오는 하얀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친다.

    오래 살다 보면 아는 것도 많아지는 걸까. 그렇다기엔 라크시스 본인의 탐구욕과 학구열이 높은 것 같았다. 지식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도 타고났으니 효과는 배가 됐겠지.

    “이런. 집중이 안 되는 모양이로군요.”

    “아뇨. 잘 듣고 있었어요.”

    거대한 증기 비행선의 내부 모형 앞에 있는 두 남녀는 주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 말이 이해가 안 되시는지?”

    “증기의 압력을 이용해서 피스톤을 움직인다는 거잖아요. 발열 마정석으로 보일러실을 데우고요.”

    “맞습니다.”

    의술사라고 해서 기계에는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설명한 걸 곧잘 이해해 나가는 시아에게 라크시스는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대부분은 재미없다며 시시콜콜한 가십이나 말하자고 하니까.

    “원래 알고 있었던 겁니까?”

    “열기관은 제가 살던 시대에도 있는걸요.”

    오가던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슬쩍 엿듣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멀어졌다. 평범한 레이디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아니었다. 어쩐지 라크시스 옌과 함께 있더라니. 보통 여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마력이 사라진 시대일 텐데요. 광산에 남은 마정석은 극소량일 테고요.”

    “갈리프콜이 있잖아요?”

    라크시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갈리프콜은 태울 수 있다는 점 빼곤 마정석에 비해 효율이 떨어진다. 무게가 많이 나가 비행선엔 쓸 엄두조차 못 내는 연료였다.

    “액화한 갈리프콜을 고온의 공기에 분사하는 엔진이 사용되거든요. 그 엔진이 상용화되는 것도 미스터 비렌체가 남긴 유작들 때문이었고요.”

    그래서 그렇게 초장부터 미스터 비렌체 타령을 했던 것이로군. 라크시스는 시아가 역병 의사 가면을 쓴 장의사를 보며 내내 감탄하던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시아, 기계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뇨. 그냥 어디서 들은 게 전부인 걸요.”

    그렇다고 하기엔 주워들은 게 너무 많다. 그녀 역시 자신과 동류임에 틀림없다. 궁금한 건 해결해야 하고 모르는 건 알아내야 하는. 관심사가 같다면 함께 연구를 진행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라크. 저기.”

    시아가 가리킨 곳에는 웰링턴 백작이 있었다. 다른 귀부인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며 손등에 키스하는 중이었다.

    “또 알은체하기 전에 피하죠.”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왔다. 사방이 트인 철제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 내려다본 입구 쪽 로비에는 30톤짜리 거대한 마정석이 있었다.

    그 뒤로 둥글게 자리한 관현악단이 발레아스키의 춤곡 실피아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긴장이 풀어진다. 마도 기계에서 흘러나온 빛이 유리를 통과한 햇빛과 만나 정령들의 날개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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