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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4)화 (34/292)

34화 

“시아.”

“당신 똑똑하잖아요? 고대 마법사님.”

그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렇다면 라크시스는 지금까지 정말로 본인이 어떤 이미지로 비치는지 몰랐다는 소리였다.

언제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하면서도 재수 없었다. 이런 태도가 라크시스답다는 거지.

“이렇게 나오시는군요. 레이디 켈튼.”

“와,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어색해 죽겠네.”

라크시스는 발동이 걸렸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는 본격적으로 물어왔다.

“좋습니다. 제가 만약 당신의 뜻을 알아낸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기라도 하자는 거예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전 알게 될 테니까.”

한 손으로 턱을 괸 그가 여유롭게 콧소리를 냈다. 그 꼴을 보아하니 백 년이 지나도 그는 절대 모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아는 그를 마주 보곤 마찬가지로 턱을 괴고 씨익 웃었다.

“그럼 소원 들어주기 내기는 어때요?”

너무 고전적인가. 하하. 하지만 고대 마법사가 들어주는 소원이면 어지간한 바람은 다 이룰 수 있다. 반대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한정적이고.

같은 조건 하에선 내게 이득인 내기인데.

“시아가 불리할 텐데요.”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 보면, 본인이 이길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왜 그렇게 단언하실까. 됐고, 기간부터 정하죠.”

시아는 턱을 들고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당당하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제가 두 번 더 이곳으로 올 때까지. 3520년 봄, 알죠?”

지금이 3517년 8월이니 삼 년은 넘게 시간을 준 셈이다. 라크시스의 눈썹이 아주 미미하게 살짝 구겨졌다.

“…얕보였군요.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겉보기엔 온화한 미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며칠밖에 같이 안 지냈지만, 내내 붙어 다닌 덕에 시아는 라크시스의 저런 표정이 자존심이 상할 때 나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시아는 속으로 웃었다.

삼 년 후 봄까지의 기간이 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녀 말고 라크에게 그답지 않다고 하는 말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 3520년이 될 때까지 시아는 이 시대에 두 번 더 올 뿐이다. 올 때마다 길어야 열흘, 짧으면 이틀 정도 머물다 사라질 뿐이고. 그렇다면 실제로 라크시스에게 주어진 기간은 한 달도 채 안 된다는 말이다.

시아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음식이 거의 비어가던 테이블 위에 세공된 유리잔 하나가 나타났다. 허공에서 진한 호박색 액체가 떨어져 내리며 잔을 채워나갔다.

다시 보니 라크시스의 손에 위스키 병이 들려있었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위스키를 따라내곤 병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고풍스러운 라벨이 붙은 매끈한 위스키 병이 오래된 소품처럼 보인다. 어느새 단정하게 잠근 검은 셔츠와 도드라진 목울대, 그늘진 턱선. 홍차를 마시던 우아한 하얀 마법사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지만 이 또한 라크시스에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내러 지구를 거침없이 다니던 뒷골목의 라크시스는 저런 느낌일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시아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독해 보이는데. 라크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위스키를 입에 머금고, 음미하다 넘겼다.

“저한테 그걸 주시겠다고요?”

“진을 권하는 것도 아닌걸요.”

라크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본인 정도 되는 사람이 남에게 싸구려 술을 권할 것처럼 보이냐는 제스처다.

난 그 뜻이 아니었는데.

“하아. 환자가 술을 마시면 어떡, 아니에요. 방금 한 말은 잊어줘요.”

그 후로도 라크시스는 혼자서 두어 잔을 더 마셨다.

“독해 보이는데.”

“별로 안 독해요.”

정말 낯빛 하나 안 변하네. 신기하기는 하다만.

“전 라크 같은 고대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시아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상태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크시스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뭉글뭉글 물방울이 허공에서 뭉친다. 주변 온도가 점점 낮아지는 게 느껴진다 싶더니 허공에 떠있던 물이 덩어리째 확 얼어버렸다. 시아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얼음을 조심스레 깎고 있는 걸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시아의 표정이 마치 솜사탕 만드는 것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 같다. 별것 아닌 마법으로 그녀의 시선을 빼앗자 라크시스는 묘하게 즐거워졌다. 자존심을 회복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으나, 그 자존심을 시아의 앞에서 회복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건 라크시스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새 예쁘게 깎인 얼음이, 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유리잔에 들어갔다. 기포가 부글거리는 물과 위스키, 레몬즙이 차례로 공중에서 유리잔에 쌓였다.

라크시스는 청량한 기포소리가 나는 노란빛 잔을 시아에게 내밀었다.

“자, 마셔봐요.”

독해 보인다고 걱정하던 위스키가 들었는데도 시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쇼맨십 같은 마법에 이끌린 탓이다.

“어, 괜찮네요?”

“그렇죠?”

상큼하고 달콤하면서 시원했다. 시아는 잔을 홀짝이며 물었다.

“술은 별로 안 즐긴다면서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 정도면 사실 술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좋아했었죠. 자제하는 겁니다.”

“그럼 그땐 왜…….”

라크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있구나. 시아는 더 묻지 않고 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아깝네요.”

“뭐가요.”

“그 몸이요.”

시아가 턱짓했다. 라크시스는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놀랐다. 숙녀가 남자의 몸을 말하는 건 썩 바람직하진 않은 짓이다. 적어도 이 시대엔 말이다. 라크 본인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예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어겨가며 살지도 않았다.

“오해하진 말고요. 고대 마법사의 건강과 체력이 부럽다는 뜻이에요.”

아. 그런 의미군.

“한 잔 더 할래요?”

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새로운 얼음, 새로운 술이 잔에 가득 차올랐다.

홀짝홀짝. 잘 넘어간다. 안 그래도 피곤하던 몸이었다. 혓바닥은 달콤함을 가장한 알코올에 속아 넘어가 자꾸만 잔을 비워댔다. 라크시스와 시시한 농담 따위를 주고받으며 마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위스키 병은 비어버렸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어지러운 시야와 그 가운데에 있던 라크시스가 전부였다.

* * *

“정말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으, 말 걸지 마요.”

시아와 라크시스가 있는 곳은 박람회를 방금 개막한 글레이셜 홀의 한복판이었다.

귀부인들의 작은 부채질에도 눈앞이 어지러운데. 아무리 입을 가리며 웃고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한들 사람이 많아지고 그 소리가 모이면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인파에 낀 시아는 눈도 귀도 울렁거리고 있었다.

“전 분명 적당히 마시라고 경고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잖아요.”

라크시스가 은근슬쩍 놀려댔으나 시아는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온실 같은 유리 건물 안에서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대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있자니 죽을 맛이다. 토할 만큼 숙취가 심하지 않아 오히려 배가 더부룩한 것도 컨디션 난조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아으, 힘들어 죽겠다니까.”

라크시스는 오늘도 완벽하게 성장한 모습이었다.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코트 안으로 셔츠 깃이 빳빳하게 각이 서있다. 메이덜린 경찰서에 갈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차림이지만 미묘하게 힘이 더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혼자 잘났어 정말. 시아는 구시렁거렸다. 라크시스의 차림을 본 요크 부인이 왜인지 갑자기 불타오르면서 새 것이 분명한 드레스를 시아에게 꾸역꾸역 입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시아와 라크시스는 한 쌍의 완벽한 신사와 숙녀로 보였다. 거기다가 라크시스가 다정하게 보일 정도로 시아를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기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도 충분했다.

그때였다.

“이런, 여기서 옌 경을 다 만나게 되다니. 오늘 제가 디아우스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싶습니다.”

콧수염을 매만지던 신사가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어왔다. 잘 다린 고급 정장이 불쌍하다고 느껴질 만큼 배가 나온 나이 지긋한 노신사였다.

“…로드 웰링턴.”

라크시스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의 악수를 받았다. 로드 웰링턴, 즉 웰링턴 백작은 글레이셜 홀 안내 책자를 외우기라도 한 것처럼 전시품들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제국민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러워지지 않습니까? 어디를 둘러봐도 대단한 물건들뿐인지라.”

라크시스가 대꾸하지 않아도 웰링턴 백작은 혼자서 잘 떠들었다. 시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없는 사람처럼 서있으려고 노력했다.

“올가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리 제가 사업 관련차 박람회에 온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런 구경거리를 놓치다니요. 웰링턴 백작은 자리에 없는 부인을 언급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남편의 바깥일에 간섭하지 않는 아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박람회 기간은 기니까요. 부인께서도 충분히 구경 오실 만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하긴 글레이셜 홀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요깃거리니까요.”

증기기관이 뭔지 몰라도 보는 재미야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웰링턴 백작이 껄껄 웃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툭 치고 속삭였다. 라크시스가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 왜 안 가요?”

“보내버리고 싶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백작은 라크시스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여자를 바라봤다. 사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참이다. 라크시스에게 알은체를 했던 이유의 절반도 바로 저 여자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저를 세워두실 요량이십니까?”

큼. 백작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두 사람이 떨어졌다. 라크시스가 백작을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먼저 걸음을 옮겨도 좋습니다. 로드 웰링턴.”

“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설마 정말로 곁에 계신 레이디를 소개해 주지 않을 생각이셨던 건 아니겠지요?”

라크시스의 한숨이 여기까지 들린다. 웰링턴 백작이라는 사람을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시아는 부자연스러움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시아 켈튼이에요. 부디 레이디 켈튼이라 불러주세요.”

“레이디 켈튼? 세상에. 로드 켈튼에게 친척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웰링턴 백작이 시아의 손을 빼앗아가다시피 하며 손등에 키스했다. 으. 이거 기분 별로인데요. 시아가 인상을 구기며 라크시스를 바라보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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