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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3)화 (33/292)
  • 33화 

    라크시스는 샤샤리아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침투한 기운이 이성을 무너뜨리고 감각을 무디게 한다. 고통은 점차 희미해져 가는데 어째서 이 생각 하나만은 선명해지고 있는 걸까.

    곁에 있어줘.

    폐 속에 고인 샤샤리아 연기가 기도를 길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갈 겁니까?”

    결국 라크시스는 묻고 말았다.

    【 유일한 생존자 】

    “이젠 좀 괜찮아요?”

    회복과 고통은 아무래도 별개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중독자처럼 그렇게 샤샤리아를 피워댔지. 그 후로 한참을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던 라크시스의 옆에서 내내 수건으로 이마를 훔쳐주었다.

    “그러게 내가 옆 방으로 피해주겠다고 했잖아요. 보아하니 중독도 안 되는 모양이던데.”

    고대 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정말 혼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피우면 죽으니까요.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고, 잠든 사람처럼 평온을 되찾은 그가 아까보다는 맑아진 낯빛으로 천천히 시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당신은 제가 없으면 켈튼저로 돌아가지도 못했을 텐데.”

    스크롤도 없잖아요. 라크시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일어날 힘은 없어도 말할 힘은 있나 보네. 다시 원래의 잘난 말투로 돌아간 그를 보자 울컥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옆 방은 비어있었으니까. 아마 시아 혼자서 절 기다리기엔 심심했을걸요.”

    얼씨구?

    “예예.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걱정했어요.”

    참 나,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서 잠도 못 자고 있는데.

    그런데 라크시스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그럼 그 꼴을 하고 있는데 걱정하지, 안 걱정하겠어요? 심지어 전 의술사인데요.”

    눈알을 굴리는 게 훤히 보인다. 할 말이 없는가 보지?

    라크 본인이 생각해도 시아의 논리가 너무 상식적이라 말문이 막혔던 모양이다.

    “…저는 고대 마법사니까.”

    “고대 마법사가 만능도 아니고……. 글레이셜 홀에서 오토마톤에게 깔렸던 거 제가 똑똑히 봤거든요?”

    “그건.”

    내가 능력이 없어서 깔려있었던 줄 아느냐. 이렇게 대꾸하려던 라크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봉인을 꺼낸 건 시아였으니까.

    “됐고, 좀 쉬어요. 뭐, 봐도 봐도 상처가 이렇게 빨리 아문 건 신기하긴 하네요.”

    라크 같은 사람만 있으면 의술원은 진작 망했을 거예요. 투덜투덜 농담을 던지자 라크시스에게서 웃음이 피식 삐져나왔다.

    “이런 관심은 오랜만이군요.”

    오랜만? 제국 유일의 고대 마법사로 살았으면서 누군가의 관심이 생소하다는 투로 말하는 게 웃겼다. 이런 식으로 본인 자랑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니 그러려니 싶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까지 라크시스의 반응을 미루어보았을 때, 시아는 그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쪽이 피투성이가 돼서 요르문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알죠?”

    “아, 그놈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닐걸요.”

    “아니긴요.”

    왜 이렇게 사람이 삐딱해.

    정황상 요르문은 라크시스가 자연적으로 회복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투는 질책에 가까웠어도, 그건 분명히 오랜 친구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아요. 요르문도 저도 그렇고.”

    그밖에 또 누가 있더라. 시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 하하.

    이번엔 그녀가 더 할 말이 없었다. 챙겨주는 사람이 지금까지 나랑 요르문밖에 없었어? 정말로?

    라크시스는 꾹 다문 시아의 입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삐뚤어질 만도 하지. 시아는 빠르게 수긍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뭐 때문에 이렇게 다쳤어요?”

    “오토마톤의 심장이 폭발했거든요.”

    “네?”

    글레이셜 홀에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꺼내왔는데.

    어느 정도 몸을 일으킬 만한 상태까지 회복됐는지, 라크시스는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던 바람에 내내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던 시아를 일으켜서는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폭신한 곳에 앉으니 살 것 같다. 라크시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만. 봉인 하나 파괴된 정도로 광룡이 부활하진 않을 테니까요.”

    문제라면 정황상 오토마톤의 심장이 벌써 세 번째로 파괴된 봉인이라는 것이지만.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다음 시간 여행 때엔…….”

    어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라크시스의 입을 잽싸게 막으며 물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요. 어쨌든 라크 혼자서 그 폭발을 막아낸 거예요? 진짜로?”

    입이 막힌 라크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그대로 조용해지자 입을 막았던 손을 조심스레 내렸다. 너무 세게 눌렀나. 라크시스의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상처의 흔적을 보니 핀 뽑힌 수류탄이라도 껴안은 것처럼 되어있던데. 정말이지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라크시스가 시선을 내렸다.

    “그럼 달리 방법이라도 있었을까요. 어차피 제가 아니면 아무도 해결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납득은 된다. 그래도 본인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세상 혼자 살 것처럼 굴더니 진심은 또 그게 아니었나 보다.

    라크 본인이 덜 다치는 방법도 분명 알고 있었을 거다. 대신 저택과 남은 사람들이 크게 다쳤겠지.

    함께 연구실에서 나온 요르문에겐 별다른 생채기도 없어 보였다. 그 말은 라크시스가 폭발의 여파를 모두 감당했다는 말이었다. 뭐, 인간을 지켜야 한다는 고대 마법사의 사명이라도 있나.

    라크시스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에 묻어버린, 체념한 것 같기도 초연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 낯설다.

    늘 앞면만 보던 동전을 처음 뒤집어본 기분이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새삼 그가 고대 마법사로 마냥 순탄하게만 인생을 살아오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차마 침묵을 깰 수 없어 애꿎은 소파만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배고픕니까?”

    라크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시아를 바라봤다. 아까의 묘한 표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다.

    그가 슬그머니 웃는다. 놀릴 거리를 찾은 거다.

    “하, 하하.”

    왜 이 타이밍에 소리가 나서는. 방금 전까지는 엄청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함께 하기로 한 저녁도 거르셨으니 배가 고프실 테지요. 그놈과 저를 단둘이 식탁에 버려두시곤 푹 주무셨고.”

    헤이든이 거짓말을 했구나. 오붓한 시간은 개뿔. 안 봐도 훤하다. 한마디도 없이 식사만 했겠지.

    “깨우지 그랬어요.”

    “깨우러 갔는데.”

    갔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라크시스가 못 본 척해주겠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닙니다.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신사인 제가 침묵해야지요.”

    시아는 발끈했다. 잠버릇 없기로 갈리프도흐에서도 유명한 그녀였다. 기숙사 동기도 코 고는 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댔는데.

    “와, 거짓말하지 말아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 진짜.”

    이쯤 되니 잠결에 그의 얼굴에 발길질이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상대는 라크시스였다. 말리면 지는 거다.

    시아는 대꾸하기를 멈췄다. 라크시스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거봐, 놀리던 거였지.

    “안 그래도 헤이든이 방으로 음식을 좀 가져다주기로 했었는데.”

    그나저나 헤이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음식을 챙겨 올리는 그 잠깐 사이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제가 없어진 걸 알면 요크 부인을 깨우러 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요크 부인이라. 라크시스는 자연스러운 문장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택의 손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집사가 집주인인 요르문보다 요크 부인을 먼저 찾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라크시스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 왜요?”

    “하, 하하……. 아닙니다.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리죠.”

    시아의 입이 부루퉁하다. 라크시스는 눈가에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뭘 좀 먹을래요?”

    “아뇨, 됐어요.”

    “이래도요?”

    눈 한 번 깜빡했을 뿐인데 소파 앞에 거대한 삼단 트롤리가 있었다. 둥근 은색 뚜껑 여럿과 유리잔, 붉은 와인이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뚜껑을 열자 금방 오븐에서 꺼낸 듯한 새끼돼지구이에서 버터와 후추, 고기 훈내가 뒤엉켜 확 풍겨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송이수프와 아까 몰래 챙겨둔 샌드위치랑 통밀빵도 있다. 잼까지 알뜰하게 껴놨네.

    “헤이든이 아주 정성껏 챙겨온 모양이군요.”

    라크시스가 눈짓했다. 음식을 보니 더 배가 고파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배고픈 어린아이 달래듯 음식을 권하고 있으니 선뜻 먹을 용기가 안 났다.

    “내 눈치 보지 말고.”

    그가 손수 테이블을 가져와 식사를 차려주었다.

    시아는 결국 고기 앞에 무너졌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 * *

    “양이 많은데. 라크도 먹어요.”

    “아까 많이 먹었어요.”

    이 시간에 깨어있으면 출출해지는 게 정상 아닌가. 라크시스는 시아가 먹는 것만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벌써 반이나 없어졌다. 괜히 민망해져서 그에게 안 쓴 식기를 내밀었다.

    “원래 셋이서 먹기로 한 저녁이었잖아요.”

    라크시스는 제게 내밀어진 작은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레이디가 한 사람분의 식기를 나눠서 쓰자고 한단 말인가.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학식이나 언어로 보아 상류층에 속한 사람인 건 분명한데 그에 걸맞은 예절이나 격식은 부족하다.

    칠십 년 후의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달라지기에.

    이런 식의 무례한 권유를 다른 이가 했다면 곧바로 쳐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라크시스는 시아의 포크를 흔쾌히 받아 들었다.

    “그렇게까지 청하신다면야.”

    라크시스는 테이블 앞에 자리 잡고는 자신과 시아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어라, 의외로 열심히 먹는데.

    “라크, 솔직하게 말해요. 먹고 싶었죠?”

    “당신이 권해서 먹는 것뿐이라니까.”

    나이프를 쥔 손조차 우아하다. 고고하게 앉아서는 깔끔하게 고기를 썰어내는 모습과 퍽 어울리는 대답이다.

    “그런 걸로 해요. 이게 라크답고 좋으니까.”

    라크시스는 식기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곤 눈썹을 삐딱하게 밀어 올렸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도대체 저답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심지어 그걸 묻는 표정이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진지하게 궁금할 일인가. 들고 있던 나이프까지 내려놓을 정도로?

    무엇보다 라크는 본인이 어떤 이미지인지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안 알려줄래요. 스스로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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