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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2)화 (32/292)
  • 32화 

    * * *

    정신이 들자마자 구토감이 치민다. 눈알이 터질 것 같다. 혓바닥 밑으로 뜨끈한 침이 쉴 새 없이 고인다. 심각한 멀미였다. 시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아무 벽이나 짚은 채로 바닥에 헛구역질을 했다.

    “흐어어……. 진짜 멀미가 심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지금 공간이동을 한 건 알 수 있었다. 시아는 지금까지 왜 라크시스가 그토록 모자 씌우기에 집착했는지 온몸으로 그 이유를 체험하는 중이었다.

    먹은 게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속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온통 어두워 자세한 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이곳은 켈튼 저택과 비슷한 규모의 거대한 저택의 방이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마치 신전 같은…….’

    갈리프도흐와 흡사한 기둥과 오더. 뼈대만 이 시대의 저택이었지 내부는 고대 마도 시대의 양식을 고스란히 따왔다. 생경하고도 왠지 모를 서늘함에 몸을 움츠렸을 때, 사방에서 반딧불이 같은 조그마한 불빛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진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로튼데일의 마도구 상점가까지 연상해 낸 시아는 곧 불빛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정령이었다.

    정령에게서 흩뿌려진 마력으로 주변이 점점 밝아지고, 마침내 자신이 위치한 곳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하게 된 시아는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건…….”

    그녀가 헛구역질을 할 때 짚었던 벽. 그 자리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있었다. 고대 마도 시대 양식의 얇은 튜닉을 걸친 여자. 정령들이 보란 듯이 그림 주변을 맴돌며 밝혔다.

    마법 염료를 써서 그렸는지 긴 은발이 멀리서도 반짝인다. 시아가 경악한 건 상당한 미인으로 보이는 초상화 속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서였다.

    “나잖아.”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특징적인 부분이 닮아있었다. 초상화야 실제와는 어느 정도 다르게 그려지기도 했으니, 그런 걸 감안하고 본다면 그림 속 여자는 시아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만 그림 속 여자가 긴 은발을 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여기가 어디기에 집은 이런 모습이고, 저런 초상화가 걸려있는 걸까.

    그러다 시아는 애초에 자신이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된 이유가 라크시스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잖아. 아까 봤던 라크시스의 다친 모습이 생생하다.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되려나. 내장을 다친 게 아니어야 하는데. 출혈은 심각해 보였고. 폭발물 파편이 환부에 있을 가능성도 크다. 감염 위험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아는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정령들이 그림을 더 안 보겠냐는 듯이 와그르르 웃으며 눈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시아는 그런 정령을 가차 없이 손으로 휘저어 떨구고는 방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멈춰 서고 말았다.

    “나도 참 대책이 없지.”

    스크롤도 가방도 없는 맨몸으로 떨어져서는 누구의 저택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라크시스를 찾아간단 말인가. 미로 같은 저택 내부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난다.

    하지만 시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라크시스의 공간이동에 휘말렸으니,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있을 거라는 추측에 의지한 상태였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시아를 뒤따라온 정령들이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움직이다가 곧 시아의 눈앞에 기다란 화살표 대형을 만들어냈다.

    “저리 가. 상대해 줄 시간이 없어.”

    응급 환자가 왜 응급 환자겠는가.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응급 환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라크시스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정령들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내 답답하다는 듯 시아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설마 따라오라는 거야?”

    밑져야 본전이라고. 어차피 다 돌아봤어야 할 곳. 시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령을 따라갔다. 그녀가 뒤따르는 것을 인지한 정령들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한참을 뛴 끝에 빛무리가 멈춘 곳은 어느 저택에서든 집주인의 서재로 사용되고 있을 법한 이 층의 가장 큰 방 앞이었다.

    노크를 해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정령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시아가 발견한 건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피에 젖은 셔츠와 기다란 벨벳 소파, 그 위에 나른하게 누워 샤샤리아를 피우고 있는 라크시스였다.

    * * *

    “아…….”

    매캐한 연기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는 연기다. 아찔해지는 기분에 본능적으로 숨을 참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라크시스는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잠든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갈아입을 기력도 없었는지 검은 셔츠를 팔만 겨우 끼운 채였다.

    고대 마법사의 마력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상처가 있을 거라 추측했던 복부가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덜 아문 난잡한 상처가 여린 흉터처럼 남아있을 뿐. 그를 걱정하며 멋모르고 공간이동에 뛰어든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헛웃음이 났다.

    “이 사람이 정말. 걱정이나 시키고…….”

    바닥에 놓인 거대한 물병 안에는 부글부글 끓는 물과 함께 연기가 가득 차있었다. 라크시스는 물병과 연결된 길쭉한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과 오뚝한 코에서 연기가 흘러나온다.

    묘하게 흐트러진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흠칫 물러났다.

    검은 셔츠와 대비되는 창백한 얼굴이 밤의 요정을 연상케 한다.

    악마와 함께 밤을 거닐며 인간을 유혹한다는 타락한 요정.

    보기 좋게 짜인 잔근육이 셔츠 사이로 훤히 드러나 있다. 그에게 몇 번 에스코트를 받으며 느꼈던 것이 진짜였는지,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것으로 추측되는 몸이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과 맞물려 색정적인 느낌을 풍겼다.

    심장에 벌레라도 들어간 듯 속이 간지러웠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끓는 물처럼 뜨겁다.

    잠든 라크시스를 계속 보고 있자니 오히려 이쪽이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건드려서는 안 될 위험한 악마를 대담하게 훔쳐보고 있었던 것 같달까. 시아는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홱 돌아섰다.

    “시아.”

    아.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숨소리.

    등 뒤에서 제 손을 조심스레 잡아 든 그의 손이 뜨거웠다.

    “…샤샤리아가 진통 효과가 있는 풀인 건 알겠네요. 그래도 너무 피우진 말아요. 이런 풀은 원래 극소량만 약으로 쓰는 거니까요.”

    시아는 돌아서지 않았다. 왜인지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갔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나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물병에서 샤샤리아 증기가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길게 연기를 내뱉는 소리.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갈 겁니까?”

    그는 여전히 시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스크롤도 안 들고 왔네요. 당신 정신 차릴 때까지 옆 방에 있을 테니까 나중에 불러줘요.”

    전 샤샤리아에 중독될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커다란 아귀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물병이 끓는 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커튼이 걷히고 창문이 활짝 열리며 방 안에 가득하던 샤샤리아 연기가 밤공기와 뒤섞여 하늘로 사라졌다.

    물병에 매달린 파이프를 빼면, 서재 안에는 샤샤리아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마법이었다.

    놀라움도 잠시, 곧 당황과 혼란이 뒤섞여 이성을 흔들었다.

    지금 나 때문에 피우는 걸 그만둔 건가. 어차피 여기엔 진통제도 뭐도 아무것도 없다. 상처가 저절로 회복되는 말도 안 되는 현상으로 미루어보아 라크시스에겐 중독도 먼 이야기일 터다. 아마 몸 전체도 자연적으로 정화될 테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줘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제가 할 일은 딱히 없어 보이는걸요.”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있기가 싫었다. 싫었다기보단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그 부담이 전신을 압박하는 짐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는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샤샤리아가 진통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찰나의 날숨이 그녀를 멈추게 만든다.

    “시아.”

    결국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라크시스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촘촘히 내려앉은 그의 속눈썹이 천천히 열리고, 그 틈새로 뻗어 나온 심해 같은 시선에 그녀가 서서히 얽혀들었다.

    진작 손은 붙들려 있었건만. 왜인지 그가 저를 붙잡는 기분이 다시 한번 들고 만다.

    “…알았어요.”

    그의 손에선 여전히 열기가 느껴졌다.

    * * *

    어째서였을까.

    작열하는 복부의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고 싶었던 모습을 들킨 탓인가.

    라크시스는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라크. 오늘도 다쳐서 온 거니?’

    그녀는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 만물에게 평등한, 그래서 무심하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그를 치료해 주던 손길은 상냥하기 그지없어 라크시스는 습관처럼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분명 죽었을 텐데.

    라크시스는 자신을 등진 여자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시아 켈튼. 아까 마법에 휘말린 모양이지. 검붉은 머리카락도 가녀린 체구도 그녀와는 전혀 다른데.

    어째서 그녀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시아.”

    라크시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시아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뜨겁다. 제 손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시아에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샤샤리아가 진통 효과가 있는 풀인 건 알겠네요. 그래도 너무 피우진 말아요. 이런 풀은 원래 극소량만 약으로 쓰는 거니까요.”

    아. 말투까지 닮았다. 신경은 써주겠지만 알아서 하라는 거지. 내가 어떻게 되든 결국 내 책임이니까.

    그러나 무심한 듯 보여도 그 속에 숨겨진 걱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애매한 태도마저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난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데도.’

    샤샤리아에 취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시아에게서 그녀를 보는 건 시아에게도, 그녀에게도 옳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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