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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1)화 (31/292)
  • 31화 

    “시아를 옮길 사람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던 요크 부인이 말을 더듬었다.

    “헤, 헤이든은 어디 가고 마법사님께서…….”

    “집사가 바쁘다고 부탁하기에 내가 왔네만.”

    라크시스는 웃는 것도, 그렇다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얼굴로 대답했다. 헤이든 이 괘씸한 녀석. 감히 사용인이 손님에게 일을 시키다니. 한편 요크 부인은 얼른 라크시스에게 약혼자도 아닌 숙녀의 신체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외치려 했으나.

    “그럼 실례하지.”

    잠든 시아의 몸이 붕 떠올라 라크시스의 품 안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마법 덕분인지 힘든 기색조차 없었다.

    사뿐한 걸음으로 라크시스가 사라지고, 텅 빈 욕실에 남겨진 요크 부인은 뒤늦게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 * *

    ‘…몇 시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요크 부인에게 붙들려서 욕실로 끌려갔었는데. 주변이 푹신하고 배 위로 얇은 이불이 덮여 있다. 욕실은 절대 아니란 말씀인데.

    시아는 벌떡 일어나 몸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입혀놨는지 편한 실내복 차림에 얼굴이며 머리카락에서 갓 씻은 보송한 향기가 났다. 문득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마사지 받다가 잠들었구나…….”

    중앙 욕실은 유리 돔 탓에 저택 꼭대기에 있었다. 제가 머무는 방이 욕실에서 두 층이나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아는 자신을 옮기느라 낑낑거렸을 사용인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요크 부인 성격상 메이드들을 시켰을 것 같은데.”

    왜 거기서 잠들어 가지고는. 원래 시대에서도 또래보다 장신이었던 자신을 떠올리고 나자 시아는 사용인들에게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절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아니지, 내가 어떻게 해도 안 일어나서 옮기신 게 아닐까.

    하지만 잠이 오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제는 새벽 내내 공동묘지와 경찰서에서 고생했고, 오늘은 오토마톤들과 한바탕 전쟁까지 했다. 그뿐이랴. 메이슨을 수술하느라 몸은 바짝 긴장해 있었고, 오늘도 메이덜린에 간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시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둑한 하늘에는 벌써 달이 떠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하하. 뭐, 이미 자버린 걸 어떡해. 그래도 어쨌거나 몸이 가뿐하니 좋았다. 이렇게 푹 잔 게 얼마 만인지. 의술원에서도 일주일의 절반은 야근과 조기 출근으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간만의 숙면은 시아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려주었다.

    다만 이 시간에 최상이라는 게 문제였다.

    ‘잠이 안 와!’

    게다가 배도 고팠다!

    “…저녁은 다들 먹었겠지.”

    아으, 정말. 아침 빼고 먹은 것도 없는데 저녁까지 건너뛰었다. 잠에서 깬 배는 먹을 것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쳤다.

    결국 시아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사용인들도 대부분 퇴근하고 없어서 저택은 낮과 달리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력등 하나를 들고 일 층 주방으로 살금살금 내려갔다.

    “먹다 남은 게 어디 있을 텐데.”

    불 꺼진 주방을 이곳저곳 뒤지다가 거대한 아이스박스를 발견했다.

    ‘와, 오랜만인걸.’

    아직 냉장고가 발명되지 않아 아이스박스가 최선의 냉장식품 보관소이던 시대다. 지금이라면 아이스박스 역시 최신 발명품이겠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제국의 귀족 사회는 전통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저택 바깥의 식품 보관실이나 지하의 육류 보관실이 아닌 아이스박스의 사용을 허락한 것만으로도 요르문이 꽤나 열린 사람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내 손도 덥석덥석 잡고 그랬나.’

    아냐, 그건 별개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류 이상 현상을 감별하는 검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하게 보관된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버터와 오렌지 주스까지 꺼내 들곤, 선반에 있던 통밀빵과 잼까지 챙겼다.

    식탁에 판을 벌려놓고 본격적으로 늦은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주방 입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지…….”

    졸린 눈을 비비며 서있는 헤이든이었다.

    “와악!”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깜짝 놀라서 버터를 바르던 빵을 떨어뜨렸다. 아이고 아까워. 다행히 바닥에 떨어뜨린 게 아니라 얼른 접시에 모른 척 올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군요.”

    “아니에요. 그냥 배가 좀 고파서…….”

    훔쳐 먹은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인다. 아닌가, 훔쳐 먹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아는 얼른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저나 요크 부인을 부르셨으면 방으로 음식을 가져다드렸을 텐데.”

    “시간이 늦었잖아요. 다들 주무시는데 번거롭게 하긴 싫었어요.”

    “아가씨…….”

    헤이든은 묘하게 감동받은 눈으로 시아를 쳐다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아가씨, 방으로 올라가 계시면 저녁 식사 때 남은 고기와 스튜를 가져다드릴게요.”

    뭐, 고기? 그래도 양심상 한 번은 사양해야지.

    “괜찮아요, 간단히 먹고 갈 생각이었는데요.”

    그러자 헤이든은 한층 글썽이는 눈이 되어 찬장과 냄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닙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게 제 일입니다. 사양하시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그렇게 권하는데 그럼 가져다 달라고 할까? 무엇보다 고기를 준다는데. 빵 사이에 끼워 먹어도 행복할 거야. 게다가 헤이든은 이미 음식을 한창 찾는 중이었다.

    그래, 이미 헤이든이 음식을 찾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한 말씀을요.”

    그렇게 식탁에 앉아 빵을 뜯으며 헤이든의 웅크린 등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제가 잠들어서 고생하셨겠어요.”

    “아, 크흠. 주인님께서 아가씨와 식사하시길 기대하시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마법사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셨으니 다행이지요.”

    사실 오붓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시아가 잠들어서 단둘이 정찬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요르문과 라크시스는 정말로 식사만을 목표로 한 사람들처럼 전투적으로 고기를 뜯고 사라져버렸다. 그 과정에 대화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씀드렸다간 아가씨가 또 미안해하실 게 틀림없었다.

    “사용인분들께도 내일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제가 욕실에서 잠드는 바람에…….”

    “저희가 아니라 마법사님, 아닙니다. 예, 뭐. 모쪼록 아가씨께서 편하게 지내주시니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 헤이든은 또 한 번 하얀 거짓말을 했다. 마법사님이 아가씨를 옮긴 걸 아시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짐작도 안 됐다.

    “준비하는 데 좀 걸릴 것 같으니 먼저 올라가 계시면…….”

    헤이든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짝 불편한 기색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같이 있어서 그랬나 보다.

    “그럼 먼저 갈게요?”

    “네. 아가씨.”

    시아는 빵 한 조각을 챙겨 들고 얼른 주방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빵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배에 뭐라도 들어가니까 좋네. 헤이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시아는 한층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이 층에 막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폭발음이 들렸다.

    발밑이 흔들리자 시아는 얼른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지진이라도 났나? 폭발음은 축제 때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아주 먼 곳에 떨어지는 비행기의 폭격처럼 아득하고 먹먹하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마도 시대 후기에 전쟁이 있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씨즐턴의 휴양지에 갔다가 해안가를 서대륙 군이 기습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뒤이어 자잘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시아는 재빨리 창가로 가 바깥을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럼 무슨 소리지? 한밤중이라 무언가가 불타고 있다면 멀리서도 불꽃과 연기를 확인할 수가 있을 텐데. 심장이 고막 안에서 뛰는 것처럼 머리가 쿵쿵 울려댔다. 손끝이 떨려왔다. 아무리 해도 폭발의 근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요르문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라크, 괜찮나?”

    시아는 본능적으로 로비와 이 층을 잇는 계단에 몸을 숨겼다. 벽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보니 라크시스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고, 요르문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자네는?”

    라크시스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요르문이 주저앉는 라크시스를 재빨리 받쳐 들었다.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무식하게 그걸 몸으로 막으면 어떡해!”

    “입을 나불대는 걸 보니 멀쩡한가 보군.”

    “라크!”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계단과 연구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한밤중이라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다. 시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연구실 문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의존해 라크시스를 살폈다.

    “저택이 무너질까 걱정이라며. 이젠 걱정거리가 사라졌겠어.”

    “이럴 때 보면 참 얄미워. 말을 해도 왜 그렇게.”

    하. 요르문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못 들었겠지.”

    “들으면 어때. 내가 이 집 주인이야. 자네가 이 꼴이 됐는데 잠 좀 설쳤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라크시스에게서 무언가가 뚝뚝 떨어진다. 손이 기름이라도 묻은 것처럼 시커멓다.

    ‘설마.’

    연구실 틈새에서 폭발물의 연기로 추정되는, 알록달록한 느낌의 희뿌연 연기가 어느새 이 층 복도에 가득 퍼져나갔다. 코와 입을 틀어막고 보니 라크시스의 셔츠가 시커먼 액체로 범벅이 돼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했다.

    “…오랜만에 피우게 되겠군.”

    “하, 그래. 그 꼴로 이동은 할 수 있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시아의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득한 폭발음. 마도구가 가득한 연구실. 매캐한 연기.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들.

    그리고 비틀거리는 라크시스.

    오, 세상에. 단서를 조합하고 나니 온몸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폭발음의 출처는 요르문의 연구실이었고, 라크시스의 몸을 뒤덮은 건 다름 아닌 피였다.

    상황이 이런데 요르문은 치유사를 부를 생각도 안 하는 거냐고!

    라크시스의 몸을 푸른 빛이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시아는 이를 미처 보지 못하고 곧바로 벽 뒤에서 뛰쳐나갔다.

    “라크!”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라크시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놀라움이 가득하던 눈동자가 이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 간다. 시아의 손끝이 라크시스에게 닿고, 그의 몸이 허물어진다.

    “누님, 떨어지세요!”

    요르문의 외침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순간.

    “…시아?”

    라크시스를 감싸던 푸른 빛이 라크시스를 받쳐 든 시아의 몸까지 집어삼켰다. 얼떨결에 마력에 휩쓸린 시아는 곧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반쯤 풀린 눈으로 곤란하다는 듯 제 이름을 읊조리던 라크시스의 야윈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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