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30)화 (30/292)

30화 

‘애초에 카얄은 어떻게 봉인에서 온전히 살아나온 것인가.’

“…갈수록 가관이로군.”

머리가 아팠다. 라크시스는 뻐근한 눈가를 천천히 문질러댔다.

생각할 게 갑자기 많아진 탓이다. 쉽게 성공할 것이라 여긴 봉인의 사수가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는가.

“라크, 그럼 이 봉인은 어떻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저녁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아.”

문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리고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류 이상 현상의 자료파일과 보석함을 한구석에 밀어 숨겼다.

“들어와.”

헤이든이 연구실 문을 열었다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문간에 멈춰 섰다.

“저어, 오늘도 연구실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올릴까요?”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헤이든은 라크시스를 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라크시스 옌은 저택의 손님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주인인 요르문에게서 아무런 언질이 없자 헤이든은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묻지도 않고 샌드위치와 과자를 준비해 올렸을 것이다. 별다른 언질이 없을 경우엔 그렇게 하라고 주인이 시켰으니까.

하지만 손님의 대접이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는 시대다.

라크시스는 주인이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자였으나 아무래도 집사 된 노릇으로 샌드위치 따위를 저녁으로 제공하겠다고 선뜻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땐 집주인이 나서서 손님맞이를 해야 하는데. 물론 요르문은 대부분의 경우 라크시스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 먹을 것만을 요구했고, 라크시스 역시 요르문의 호의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홍차나 홀짝이곤 했었다.

그런 헤이든의 예상대로 요르문은 오늘도 제가 먹을 것만 준비해 오라고 시키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아니다. 오늘은 제대로 차려놔.”

이 저택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누님이 계시니 말이야.”

다 같이 먹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봉인 때문에 지끈거렸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예. 그렇게 준비하도록 주방에 이르겠습니다.”

헤이든은 간만에 흐뭇한 얼굴로 주인의 연구실을 나설 수 있었다.

* * *

“세상에, 도대체 누가 켈튼의 아가씨 머리를 쥐어뜯었답니까? 실크 같던 머릿결이 다 상해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하하. 시아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숙녀를 괴롭힌 당사자에게 손가락질을 퍼부을 기세인 요크 부인을 조용히 외면했다. 이 집에 머무는 메이슨 비렌체가 만든 오토마톤이 그랬다는 걸 알면 메이슨을 곧바로 쫓아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메이슨은 잘 지내고 있었을까? 오자마자 상처 상태를 확인해 보려 했는데, 얼떨결에 욕실로 끌려왔으니.

연구실을 나온 요크 부인은 엉망이 된 시아를 데리고 곧바로 중앙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욕실조차 켈튼의 위상에 맞게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다. 유리로 된 돔 천장을 통해 그대로 쏟아지는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시아는 거대한 대리석 욕조에 담겨 온몸 구석구석을 보살핌받는 중이었다.

은은한 장미 향과 욕조에 담긴 물소리만이 고요한 중앙 욕실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일깨워준다.

저택에 방문하는 사람도 드물 텐데, 다들 목욕 시중을 드는 손놀림이 장난 아니다. 요르문은 분명 마력으로 혼자 목욕한다고 했었지.

지난번엔 제대로 씻어보지 못해 몰랐는데. 어색한 마음에 시아는 따뜻한 물을 떠 얼굴을 촉촉하게 적셨다.

부담스러울 정도인걸. 인생의 절반을 기숙사에서 혼자 씻고 자고를 반복했던 터라 이런 시중이 낯설었다. 지금도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댄 채로 요크 부인의 능숙한 손길을 받고 있었으니까.

원래 시대에서 켈튼의 영애로 살 때도 이렇게 시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지금과는 문화가 달랐달까. 메이슨이 귀족을 무서워하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아는 과하게 조용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요크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미스터 비렌체는 잘 있었나요?”

사용인들에게 향이 나는 목욕 거품을 만들라고 시키던 요크 부인은 시아의 머리를 직접 문질러 감겨주며 수다 떨듯 대답했다.

“말도 마세요. 어제 그런 모습으로 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만큼 멀쩡해져서는 저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랍니다.”

뭐?

“아가씨의 치료가 아주 잘 들었던 모양이에요. 주인님과 뭐가 또 그렇게 잘 맞는지 아가씨 안 계시는 동안 연구실에 같이 틀어박혀서는…….”

아니, 이 인간이. 다친 거 나을 때까지 누워서 쉬라고 했는데.

의술사 말 안 듣는 환자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다. 호의로 치료해 줬으니 망정이지, 원래 시대의 상류층 환자들은 돈을 냈는데 효과가 없다고 날뛰러 와서 의술사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오토마톤 소동 때문에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메이슨을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지금 미스터 비렌체는 어디 있나요?”

“주인님의 기계 하나를 가지고는 손님방으로 돌아가시는 것까지만 봤답니다.”

요르문의 기계라고? 참 나,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생각해 보면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를 알아본다고. 둘 다 기계를 만지고 연구하는 걸 좋아하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 지금 움직이시면 머리에서 물이 떨어질 텐데.”

“…가봐야겠어요.”

욕조 가장자리에 걸쳐둔 하얀 수건을 펼쳐 들고 일어서려 하자 요크 부인이 불러세웠다.

“아가씨.”

요크 부인은 인자하고도 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가씨 스스로를 먼저 챙기셔야 할 때랍니다. 개구쟁이처럼 저택을 활보하고 다니는 손님을 신경 쓸 게 아니라요.”

개구쟁이라는 말에 일어서다 말고 순간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개구쟁이라니. 미스터 비렌체도 나름 유명한 발명가인데요.”

물론 미래에 말이지.

“유명한 분이라면 이 저택에도 벌써 두 분이나 계시지 않겠어요? 철없는 주인님과 한량 마법사 말이에요.”

요크 부인이 단호하게 말하자 시아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 요르문이랑 라크를 그렇게 평가하는 분은 부인밖에 없을 거예요.”

“솔직하고 정직한 거죠. 모름지기 주인을 모시는 사용인으로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랍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요르문 님은 지금같이 최소한의 신사로 성장하시지도 못하셨을 거예요.”

최소한의 신사라니. 평가가 박하시네. 그러다 문득 원래 시대의 요르문이 떠올라, 요크 부인의 평가가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회는 발 도장 찍으러 다니고, 황궁을 뒷마당 개집으로 알고.

“…부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답니다.”

그러니까 얼른 욕조로 돌아가셔요. 시아는 그 말에 이끌리듯 다시 따뜻한 물에 몸을 밀어 넣었다.

너스레를 떨면서 요크 부인은 머리 감기를 마무리했다. 분명 지난번에 처음 만났을 땐 그녀를 요르문과 엮으려고 해서 부담스러웠는데. 그래도 이제는 요크 부인의 말투도, 표현도 처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느껴졌다.

“다 됐어요, 아가씨.”

“고마워요, 부인.”

“아가씨는 어쩜 이리 친절하실까. 사용인에게는 말씀을 편하게 하시면 되는데.”

변명처럼 떠오른 말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저 술란에서 왔잖아요.”

“하긴, 술란은 모르간보다 자유로운 곳이라면서요? 저도 나중에 은퇴하면 술란처럼 따뜻한 곳으로 내려가 살고 싶답니다.”

손주 아이들이 따라와 줄까 모르겠지만요. 요크 부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시아의 말을 믿었다.

과거로 되돌아올 땐 요르문이 위조한 새로운 신분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내 아버지는 요르문 켈튼의 당숙이며 술란에서 면화 무역회사와 공장을 운영하시고, 난 술란에서 나고 자란 외동딸이라고 했지.

시아는 요크 부인이 괜히 술란에 대해 묻기 전에 멋쩍게 웃으며 대화를 끊어버렸다.

요크 부인은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시아에게 가운을 걸쳐주곤 욕실 한편에 마련된 침대로 이끌었다.

“이리 와보셔요. 마사지를 해드릴게요.”

“마사지도 할 줄 아세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단 제 손이 훨씬 편하실 거랍니다. 어서요, 이리 누워보셔요.”

자부심 넘치는 표정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요크 부인은 마사지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원래 이런 높은 위치의 부인은 목욕 시중이나 마사지 같은 걸 안 하려고 할 텐데.

사용인 두엇을 보조로 남기고 요크 부인은 시아의 뭉친 근육을 천천히 풀어나갔다. 은은한 장미 향과 고요한 공기. 침대가 따뜻한 걸 보니 어딘가 마정석이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덧 넘어가 버린 해가 길게 노을을 펼치자, 유리 돔 아래로 붉은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른하고 졸렸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가씨, 흰머리가 났는데 뽑아드릴까요?”

“으응… 네……?”

“양이 많으면 염색을 해드릴 텐데. 나이가 들면 머리 한 올도 아깝더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귀한 아가씨가 엎드린 채로 잠에 빠져든 걸 알아차린 요크 부인은 이내 손을 멈췄다.

침대가 꽉 찬 느낌이 들 정도로 늘씬하고 길쭉한 몸인데, 요크 부인에게는 마냥 작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말씨도 상냥하고, 군더더기 같은 귀족의 허영심 없이 자란 것 같다.

사랑스럽고 예뻤다. 레이디답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면 말 다했지. 요크 부인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 시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주인님과 잘 되었으면 했는데. 이젠 주인과 엮기엔 아가씨가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앤, 나가서 헤이든을 불러오려무나. 아가씨가 잠드셨다고 전해.”

“네, 부인.”

“애슐리는 이리 와서 날 좀 돕고.”

남정네 손에 아가씨를 맡기고 싶진 않은데, 나이가 드니 뭘 할 수 있어야지. 그나마 괜찮은 집사 청년이라면 잠든 아가씨를 방까지 모시도록 허락할 수 있었다.

애슐리와 함께 시아에게 실내복을 입히고, 머리에 향유까지 발라둔 채 기다렸다.

얼마 후,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요크 부인.”

“헤이든, 손을 깨끗이 하고 이리로 오세요.”

이상하게 욕실 밖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서 씻으면 되는 것을. 요크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에구머니나!”

욕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라크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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