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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9)화 (29/292)

29화 

“아이고, 아가씨! 이런 차림으로 저런 늑대 같은 사내들과 같이 계시면 아니되세요.”

요크 부인은 요르문을 온몸으로 막고선 담요를 더 여며주었다.

시아는 그제야 제 셔츠 앞 단추 두어 개가 떨어져 나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정도는 뭐…….”

“이 정도라니요. 술란에선 어떠셨을지 모르지만, 모르간에선 다 큰 숙녀가 이렇게 계시면 안 된답니다.”

가요, 어서 나갑시다. 시아는 얼떨결에 요크 부인에게 잡혀 연구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등 뒤에서 손을 흔드는 라크시스의 표정이 왜인지 밝다. 아직 요르문한테 글레이셜 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못 해줬는데.

라크시스는 ‘이따 다시 올게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시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고, 연구실 안에는 결국 요르문과 라크시스 둘만이 남게 되었다.

시아를 걱정하던 모습은 가면이었는지, 요르문은 순식간에 빈정대는 말투로 라크시스에게 쏘아붙였다.

“참 가지가지 하는군.”

“뭐가.”

라크시스는 삐딱하게 서선 팔짱을 끼고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요르문은 어이가 없었다.

아하,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내가 누님을 걱정하는 게 그렇게 질투나?”

라크시스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헛소리는 적당히 해.”

헛소리라니. 요르문은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라크시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다 못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곤 말을 아꼈다.

라크시스는 분명 처음 시아를 만났을 때에 비해 미묘하게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러는 걸 텐데. 정확히 언제부터 저렇게 됐는지도 모르겠군.

요르문은 라크시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둘 다 그 꼴로 온 거야?”

“한발 늦었어. 카얄이 이미 다녀갔더군.”

“카얄? 아니, 어떻게?”

“일단 이거나 받지.”

라크시스가 내민 건 오토마톤의 심장을 담아온 보석함이었다.

“허, 이거 위험한데. 인어의 눈물 정도로 생각하고 만들었던 보관함이라.”

얼핏 보기에도 오토마톤에서 빼내 온 봉인은 요르문이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다른 봉인과는 상태가 확연히 달랐다. 중심부가 심하게 파여 마력이 새어 나오는 봉인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잠깐 열어봤을 뿐인데 샤샤리아 연기라도 퍼진 듯 벌써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탁. 요르문은 얼른 도로 보석함을 닫아 잠가버렸다.

“이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자네가 보관해 준다고 했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는데.”

“이런 상태인 건 안 받으면 안 될까.”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과 광룡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으로 제 저택이 통째로 날아갈 것에 대한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불길하리만치 잠잠한 보석함을 내려다보았다.

무려 광룡의 힘을 가둔 봉인이다. 일개 마법사인 자신은 아무리 애를 써도 봉인이 저절로 파괴되는 걸 막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때 라크시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살아있는 마정석을 본 적이 있나?”

“마정석이 어떻게 살아있어. 광물일 뿐인데.”

어린애도 하지 않을 법한 질문을 하는 라크시스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요르문은 장난기 없는 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어냈다.

“봉인과 관련된 일이구나. 맞지?”

“지금까지 발견한 봉인이 모두 일반적인 마법진 형태가 아니었다는 건 요르문 자네도 알겠지. 그래봤자 눈으로 확인한 건 인어의 눈물과 여기 오토마톤의 심장이 전부지만.”

“뭐, 그렇지.”

라크시스는 어쩐 일인지 더는 대화를 잇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니 질문을 던졌을 텐데.

라크시스는 연구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오토마톤이 살아있었어.”

“뭐?”

“정확히 말하면 광룡의 봉인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했다고나 할까.”

복잡한 표정으로 입 다물고 있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요르문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고 말았다.

“봉인이 담겨있던 오토마톤이 주변 기물들을 모두 깨웠더군. 마치 자신을 노리는 적을 상대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도 안 돼.”

라크시스는 요르문의 손을 붙잡고 보석함을 열어 봉인을 꺼냈다. 기이한 마력이 보석함 틈새로 순식간에 새어 나와 연구실을 몽환적인 색으로 물들였다.

동시에 연구실에 있던 기계들이 마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진동하던 계기판의 바늘이 조금씩 높은 숫자를 향해 움직이고, 연구실 중앙에 자리하던 마정석은 흰빛을 띠다가 점차 분홍색으로 변해갔다.

“라크. 뭘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날 가엾게 여긴다면 봉인을 도로 넣어줬음 좋겠어.”

연구실에 이상이 생길 것만 같다고. 요르문이 울상을 지었지만 라크시스는 아랑곳 않고 요르문의 반대쪽 손바닥을 쥐고 봉인을 툭 올렸다.

“으아, 뭐 하는 거야.”

“만져봐.”

“충분히 만지고 있거든?”

손바닥을 뻣뻣이 펼치고 봉인에 최대한 안 닿으려 하는 요르문을 보고, 라크시스는 냅다 그의 손가락을 말아 봉인을 꽉 쥐게 만들었다.

“라크!”

“일단 진정하고. 무슨 느낌이 들지?”

무슨 느낌이 드냐니. 이상기류에 휩쓸려 손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마법사에게 손이 가장 중요한 거 모르냔 말이야.

그때였다.

“이, 이건…….”

두근.

두근두근.

요르문은 굳어버렸다. 마류 이상 현상 때문에 제 심장이 멋대로 뛰는 줄 알았다.

지나치게 크게 느껴지는 박동도 제 것인 줄 알았는데.

“미친, 미스터 비렌체. 심장 심장 거리더니 이거 진짜 심장이잖아!”

요르문은 비명을 지르며 보석함에 봉인을 던져 넣었다. 이제 보니 심장 모양의 하얀 마정석은 아주 미세하게 규칙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징그러워, 진짜. 광룡의 봉인이 뭐길래 이러냐고.”

누님, 도대체 이런 걸 그 난리 통에 어떻게 뽑아내신 거예요. 시아를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 드는 순간이었다.

라크시스는 요르문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난 고대 마법사들의 심장 혹은 육체 그 자체일 거라고 추측하는데.”

그 순간 두 사람이 떠올린 건 고대의 신화였다.

제국이 생기기도 전인 아주 오래 전부터 대륙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신화가 있었다.

인간을 사랑한 신룡 갈리프와 용을 배신한 인간.

신룡의 가호 아래 대륙은 풍부한 마력으로 전에 없던 번영을 맞이했고, 인간은 그들에게 절정의 고대 마도 시대를 선사한 신룡과 아홉 사도를 우러르며 숭배했다.

꿀과 젖이 흐르는 풍요로운 대지를 거닐던 갈리프는 어느 날 죽어가던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왕의 별궁을 건설하는 노역에 끌려갔다가 매질을 당하고 들개 밥으로 버려진 노예였다.

갈리프는 상심에 빠져 왕국에 신벌을 내리고 아이를 거둬들여 키웠다.

아이는 신룡을 사랑했다.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준 갈리프의 은혜에 탄복하면서도 복수를 해준 신룡의 힘에 압도되었다. 절대자의 힘, 그것을 매일같이 지켜보던 아이는 어쩌면 그때부터 자신을 신룡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가 어른이 되던 날, 갈리프가 구해주었던 인간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갈리프 님도 절 구하시기 위해 사람을 죽이셨잖습니까!’

‘내가 구해주었던 아이는 여기에 없구나.’

신화에 따르면 신룡 갈리프는 그가 거둔 인간에 의해 악을 깨우치고 타락한다. 타락한 용의 힘을 멋대로 이용하려던 인간은 갈리프의 아홉 사도에 의해 결국 죽게 된다. 그러나 갈리프는 이미 폭주하는 광룡이 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아홉 사도는 스스로를 희생해 광룡의 심장을 봉인했다고 한다.

갈리프의 아홉 사도는 마법에 능하다 알려진 탓에 후에 고대 마법사로 불리게 된다. 라크시스가 그 아홉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것 또한 가늠할 수 없는 나이와 신화와 흡사한 방대한 마력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해 광룡의 심장을 봉인했다는 건, 그들이 본인의 육체를 봉인의 매개로 삼았다는 뜻이었던 모양이야.”

뭐?

요르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지금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빌어먹을 신화. 신화가 아니라 실화였냐고!”

저 조그만 봉인이 한때는 진짜 사람이었다는 거잖아. 질겁하던 요르문은 거친 호흡을 가라앉힌 후 연구실 책장에서 두툼한 파일을 꺼내왔다.

“그렇다면 이젠 이것도 다 설명되는군.”

마류 이상 현상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두는 파일이었다. 빽빽한 종이 무덤에서 그가 꺼내 든 건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현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련된 기사였다.

「모르간 타임즈」

[아르카나 중앙역 매몰사고. 귀신의 저주인가, 부주의가 낳은 인재인가]

“기공식 현장 인부들이 마폭탄 저장고 근처에서 매일같이 귀신을 봤다고 했었지. 결국 지하로 길을 내다가 폭탄이 잘못 터지는 바람에 대부분이 매몰되어 죽었고.”

공사 당시 계획보다 더 큰 폭발이 발생해 생긴 매몰 사고였다. 기사를 쓴 기자는 이 사건이 안전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공사 현장과 폭약을 정량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마폭탄 제조업체가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 구조된 사람의 증언이야.”

요르문이 손가락으로 기사의 하단부를 가리켰다.

[사람의 흐느낌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귀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곳을 찾아 숨어든 비렁뱅이인 줄 알고 모두 구하러 간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인부들 외에 다른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지.”

요르문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라크 자네 말이 맞다면, 아르카나 중앙역의 귀신은 폭탄에 휩쓸린 봉인이 파괴되면서 나타났던 현상일 거야.”

라크시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래. 결국 찾아내지 못한 봉인은 아르카나 중앙역 공사 현장에서 파괴된 것이 맞겠군.”

광룡의 봉인을 사수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쪽은 미래를 알고 있었고,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일하게 대처했다. 시아에게 오토마톤의 심장 같은 건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다고 단언했던 순간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녀의 일기장엔 카얄이라는 고대 마법사가 갈리프의 부활을 꾀한다고 적혀있었다. 신화를 조합해 보면 제 몸을 직접 봉인의 매개로 사용한 아홉 사도 중 하나가 카얄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왜, 무슨 연유로 다른 사도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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