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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화 (28/292)

28화 

무용수 오토마톤의 중심에 따로 챙겨온 마정석을 끼워 넣던 라크시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고개가 아무도 없는 오토마톤관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 봐요?”

쉿. 그가 뻥 뚫린 입구에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로 시아의 팔을 붙잡았다. 덩달아 긴장한 상태로 주의를 집중하자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렸다.

아직 개장하려면 하루가 남았는데. 경비를 돈다기엔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군홧발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각 관을 들쑤시는 모양이다. 마치 침입자라도 찾는 것처럼.

“외부인이 불법으로 들어와 있을 거다. 찾는 즉시 보고하도록.”

라크시스는 단박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노든 대공이군요.”

“이번에도요?”

기공식 때도 그렇고 올빼미도 그렇고, 어째 차탈 세페란테와 자주 엮이는 기분이다. 거기에 아르카나 술집에서의 남대륙인과 저택의 까마귀들을 떠올린 라크시스가 피식 웃었다.

“네, 이번에도요.”

“우리가 너무 크게 소란을 피웠나 봐요.”

“그건 아닐 겁니다. 마류 이상 현상을 느꼈거나 아니면.”

“…카얄을 발견했거나, 맞죠?”

메이슨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올빼미도 카얄의 기척을 느끼고 움직였을 거라고 했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벌써 바로 옆 증기 엔진 전시관을 뒤지고 있었다.

“일단 가요. 대공이 오기 전에 사라집시다.”

“이 난리를 쳐놓고요?”

라크시스가 최대한 온전하게 보존하려고 하긴 했지만 사방에 널브러진 오토마톤들은 대부분 성한 곳이 없었다. 제작자가 봤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만한 광경이었다.

박람회에서 잘 보인 작품들은 곧바로 거래하기도 한다던데. 그런 꿈을 품고 글레이셜 홀에 정성 들여 만든 오토마톤을 전시한 제작자들에게 정말이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이걸 이대로 두고 도망간다 한들, 얼마 안 가 들이닥칠 대공과 수하들이 분명 사태의 원흉을 찾아 수도를 들쑤실 게 분명하다. 애먼 사람 잡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우리가 그랬다, 하고 고백하는 게 낫지 않을까. 광룡의 봉인 이야기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라크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마류가 정상이니까 상관없어요.”

“그게 무슨 맥락 없는 말이에요.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그새 또 여유를 되찾은 라크시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유능하고 잘나디잘난 고대 마법사의 자신감이었다.

“눈 감아요. 모자 씌워줄 시간이 없으니.”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라크시스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커다란 손이 빈틈없이 시야를 가리고 귓가를 지나치는 걸 알아챘을 때, 시아는 그가 등 뒤에 서서 자신을 감싸 안듯 반대쪽 손으로 팔을 붙들고 있다는 것도 깨닫고 말았다.

마류가 정상인 게 이 난장판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눈을 가린 그의 손 밑으로 언뜻 보이는 게 자신의 팔인지 그의 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순간부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눈 뜨지 말고.”

웃음소리가 들리고 팔 주변의 배경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라크시스의 경고가 이런 거였구나. 멀미는 질색이다.

시아는 곧 잡생각을 지워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과 은은한 숲 냄새. 그 사이로 들려오는 기계의 마찰음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눈을 질끈 감으면서.

* * *

“대공 전하.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다고? 차탈은 먼저 오토마톤관에 들어가 한 바퀴 탐색을 마친 수하의 외침을 의심했다.

“자세히 살펴보게. 숨어있을 수도 있잖나.”

“벌써 두 번이나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차탈은 체통도 잊고 오토마톤관으로 달려갔다. 사교 클럽에서 이렇게 뛰었다면 분명 조롱거리가 되었을 터다. 누구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노든 대공이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달리는 모습을 본 수하들은 주인이 찾으려는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토마톤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엹은 먼지가 내려앉은 오토마톤들은 아주 오랫동안 시간이 멈춘 세상에 있던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있었다. 그 음침한 마력은 헷갈릴 수도 없지. 차탈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검은 코트의 마법사.

제국 곳곳에 자신의 눈을 심어두고 관찰하기가 벌써 근 오 년째였다. 대마법사급 실력의, 그것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황궁에 접근하는 마법사의 존재를 알아차린 지가.

나이도 성별도 신원도 불명.

황제와 대공인 자신의 근처를 맴돌기에 암살자인가 싶어 추적했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의 새를 몇 번이나 보란 듯이 죽여놓고 황궁 이곳저곳을 유유히 활보했다.

처음에는 라크시스 옌과 요르문 켈튼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다. 차탈 본인을 뛰어넘는 마법사는 제국에 몇 안 되었고, 한편으론 그들이 노든 대공을 지지하는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 두 사람은 황궁의 출입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차탈은 곧 판단을 바꾸게 된다.

‘아주 불길한 마법이었지.’

남의 몸을 빌려 세상을 보는 마법은 정신을 극도로 예리하게 갉아먹는다. 차탈은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며 밤낮없이 그자가 남긴 마력을 감지했다. 어느 날, 어김없이 까마귀를 이용해 감시하던 차탈은 까마귀의 눈을 통해 마법사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저주였다.

‘분명 사멸된 마법이라 알려졌을 텐데.’

저주는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는 마법이다. 마법이란 본래 마력이라는 재료가 바탕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수식이었다. 그러나 저주는 마력이 없는 자들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하는,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저주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저주는 마력 대신 다른 것을 마법의 재료로 삼는다. 예컨대 살아있는 제물 같은 것들 말이다. 저주가 가장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제물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혼이었다.

무엇을 대가로 쓰기에 저주로 대마법사급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라크시스 옌조차 감히 쓰지 못하는 마법이었다.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차탈은 마법사를 뒤쫓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마법사는 황궁을 벗어나 수도 곳곳에 자취를 남겨놓기 시작했다. 의회, 경매장, 사교 클럽, 사냥터, 극장, 아르카나의 유흥가. 차탈은 이 자취들을 통해 마법사가 남의 신분을 뒤집어쓰고 신사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마법사가 한밤중에, 기술공이나 드나들 법한 메이덜린의 외진 창고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마법사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황족을 암살하려고 황궁에 들어온 게 아니었나? 무엇을 찾기에 이리 제국을 어지럽히고 다니는 것인가.

뭐가 됐든 간에 마법사가 순순히 본인이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둘 생각은 없었다. 저주를 쓰는 대마법사가 별 볼 일 없는 물건에 관심을 보일 리는 없었으니까.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돌아가지.”

글레이셜 홀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마력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더 수색해 봤자 결과는 같을 터. 차탈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오토마톤관을 나섰다.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아무것도 아니다. 먼저 나가라.”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 차탈의 얼굴에 미묘한 고양감이 서렸다. 수하는 차탈의 표정이 찰나 바뀐 것을 인지했지만, 무엇 때문에 주인의 기분이 갑자기 바뀐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차탈은 이내 주웠던 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곤 아무렇지 않게 오토마톤관을 나섰다.

그가 발견한 것은 뜯겨 나온 것이 분명한, 달빛처럼 반짝이는 긴 은발이었다.

【 은발 여인의 초상 】

“누님!”

“하, 하하…….”

어김없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요르문은 연구실 한가운데에 미풍을 일으키며 나타난 시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들고 있던 마정석과 니퍼를 내팽개치고 달려든 요르문은 시아를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코트는 벗어 던진 지 오래요, 셔츠 단추도 멀쩡히 달려있는 게 없고 머리는 엉키고 뜯겨 산발인 데다가 손이며 팔뚝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메이덜린 경찰서로 갈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빌려준 옷인데 엉망이 됐네.”

시아가 멋쩍게 웃으며 넝마가 된 코트를 내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코트가 중요하냐구요.”

옆에 있는 라크시스의 차림도 시아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엉망이었으나 요르문은 마치 이곳에 시아밖에 없는 듯 굴었다. 그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이없고 우스워 라크시스는 작은 정령을 몰래 일 층으로 날려 보냈다.

“다치신 곳은 없어요?”

요르문이 원래 이렇게나 절 챙기는 사람이었던가.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 손을 덥석 붙잡은 요르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래의 팔불출 요르문 님과 일면 겹쳐 보이기도 했지만, 원래 시대의 요르문 님은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지. 뻔히 남남인 걸 아는데도 꾸준히 누님 취급을 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잘 곳 마련해 주고 먹을 거 주고 입을 것도 줬으니까. 실험체라곤 하지만 어느 정도 호의는 있다고 봐도 되겠지. 무엇보다 그에게서 빌린 코트가 넝마 조각이 됐다는 게 미안했다. 비싸 보이던데.

“응. 난 괜찮아. 그보다 코트 말이야, 어떻게 배상해 줄…….”

그때였다.

“어머나, 아가씨!”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고 요크 부인이 나타났다.

“이런 파렴치한 주인님 같으니.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숙녀분께 대낮부터 뭘 하고 계세요?”

시아의 두 손을 잡고 있던 요르문의 얼굴에서 반사적으로 핏기가 빠져나갔다.

“내가 뭘……. 아니, 그보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안 봐도 훤하답니다. 고대 마법사께서 먼저 언질을 주실 정도면 말 다했지요.”

요크 부인은 망연자실한 요르문에게서 도도하게 시아를 빼낸 다음 가져온 담요로 시아를 빙 둘러 가렸다. 요르문은 그제야 요크 부인의 주변에 라크시스가 보냈을 것이 뻔히 짐작되는 정령들이 맴도는 것을 발견했다.

“라크, 자네!”

“흐응.”

라크시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콧소리를 냈다.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은근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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