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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화 (25/292)
  • 25화 

    “의술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많이 봤어요. 대부분은 그들이 살 수 있는 만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죠.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요.”

    “그렇다면 당신은 광룡이 깨어나지 않아 미래에 본인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은가요?”

    말문이 막혔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건데. 순간 그와 왜 이런 대화를 하게 됐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입술이었다.

    “…대신 수십만 명이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고집부리지 마요. 두렵잖아요.”

    “…뭐가요.”

    “당신이 아는 미래가 바뀔까 봐. 돌아갈 곳이 없을까 봐.”

    그렇지 않고서야 아까처럼 파리스 맨틀러 교수를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라크시스가 조소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처음 만났던 날, 당신은 가방을 들여다보지 못해 내내 불안해하고 있었죠.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래전에 가라앉힌 기억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과거에 갇힐까 봐 불안해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이뤄왔던 것, 의술원, 가족, 친구, 집. 익숙한 모든 것들이 남아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게 될까 봐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잖아. 그녀는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일기를 적은 건 저였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저야 광룡이 부활하지 않는 것을 반기는 입장이지만, 시아. 다시 생각해 봐요.”

    “왜 하필 고대 마법사 앞으로 떨어졌는지. 마법사도 아닌 당신이 왜 광룡의 봉인과 관련이 된 건지.”

    나라면 의문을 가졌을 겁니다. 그는 혼잣말처럼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광룡의 부활을 막을 수 있다면 라크는 거절하지 않을 거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당신이 알려준 미래를 난 당연히 바꾸려 들 테니까요.”

    “…….”

    할 말이 없었다. 라크시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쉬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머리가 멈춰버린 사이, 공격이 훅 들어와 버린다.

    “해야 할 일은 명료하고 봉인을 가져오는 것 정도는 저 혼자서도 금방 할 수 있어요.”

    공격이라기엔 미묘하게 상냥한 말투. 역시 그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하긴 그래. 솔직히 말하면 마도 시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잖아.

    왜 광룡의 봉인에 이렇게까지 매달리게 된 가지?

    “시아, 마차를 타고 가요. 일부러 안 보냈어요.”

    라크시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에스코트를 위해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걸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쉴 수 있겠지.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크.”

    “네.”

    “저도 그런 생각 안 해봤던 건 아니거든요. 제가 여기서 무언가를 바꿔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태어나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다가가려다 멈춰 섰다. 제 말에 설득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일기장의 미래를 당신에게 알리기로 한 건 제 선택이었어요.”

    “시아.”

    “지금 라크의 말을 들으니 일기장이 갑자기 수상해 보이긴 하지만요.”

    또다. 라크시스는 시아 켈튼에게서 다시 한번 뚜렷한 의지를 느꼈다. 어젯밤 메이슨을 치료할 때 보았던 바로 그 눈빛.

    시아가 피곤해 보였던 것도, 그녀의 시간 여행에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잠자코 저택에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면 후자에 대해선 굳이 지금 말할 생각도 없었다.

    이쪽은 당신을 생각해서 일부러 휴식을 권했다고. 하지만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념의 자취가 남은 자줏빛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고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황혼이 자국을 남긴 밤하늘처럼.

    “그러니까 같이 가요. 글레이셜 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라크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눈앞의 여자가 어느새 긴장이 살짝 가라앉은 얼굴로 샐쭉 웃고 있다. 라크시스는 결국 피식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으니까 일단 이리로 와요.”

    * * *

    “그런데 우리 마차 타고 가요?”

    몇 번 받아봤다고 금방 라크시스의 에스코트에 익숙해진 시아가 마차를 오르려다 말고 물었다.

    “올 때도 타고 왔으니까요.”

    “어……. 연기는 끝났잖아요.”

    그 말은 즉 굳이 마차를 타고 싶진 않단 소리다. 그리고 이곳은 이동 수단이 아주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도 시대의 메이덜린이었다.

    라크시스는 무언의 그녀에게서 곧장 의도를 눈치챘다.

    “날 공간이동의 수단으로 보는군요, 시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라크시스가 대놓고 중얼거렸다. 요정의 날개 같은 속눈썹이 순식간에 축 처졌다. 눈에 띄게 서운하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아까 마차를 좀 오래 탔더니 멀미가 나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까 켈튼 저택에서 이곳 메이덜린 경찰서까지 오는 도중에 반쯤 남은 거리에서부터 계속 멀미 기운이 있어 괴로웠었다. 피곤한 상태로 아침까지 먹어 속이 얹혀 더부룩했던 탓이었다.

    요르문이 말하길 대부분의 마법사는 격식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마차를 잘 안 탄다고 하던데.

    “아님 제 스크롤로 글레이셜 홀까지 가는 건 어때요? 그것도 괜찮은데.”

    “절 앞에 두고 스크롤을 쓰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처음이군요.”

    아까는 스크롤 취급 받는 거 싫다며. 공손하게 부탁했어야 들어줬을 거라, 이 말이지?

    흥.

    “그럼 마차를 타는 게 최선이겠네요.”

    시아가 새침하게 마차에 올라타려 하자 라크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차를 두드려 마부에게 신호했다.

    줄행랑치듯 마차가 사라지고 난 휑한 배경을 뒤로한 라크시스는 한 손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쥐고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멀미가 난다는데 어쩔 수 없죠.”

    시아가 키득거리며 그의 팔을 잡았다. 한숨을 쉬는 소리가 머리 위에 얹힌 모자 너머에서 들렸다. 묘하게 인위적인 한숨이다.

    이 남자, 틀림없이 웃고 있을 거야.

    “고대 마법사를 스크롤처럼 쓰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일 겁니다.”

    “하하, 그것참 영광이네요.”

    “정말로 당신이 처음인데.”

    고대 마법사의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 같으니. 들으라는 듯이 볼멘소리를 하니 하나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아, 지금 웃어요?”

    “아뇨. 안 웃었는데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재빨리 꾹 참았다. 어린아이가 투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의 실제 나이를 떠올리고 곧바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왜 자꾸 모자를 씌워요?”

    “이거라도 안 쓰면 마차보다 배는 멀미가 날 겁니다.”

    순간이동을 하는 순간에는 주변 시야가 어지러워진단다. 지금까지 멀미 나지 말라고 이렇게 해준 건가.

    라크시스 본인은 괜찮고?

    “그럼 라크는요?”

    “모자가 하나뿐인데 당신에게 씌워줬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거짓말. 모자 또 만들 수 있잖아요.”

    “아닌데.”

    이번엔 라크시스 쪽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뻔하지 뭐.

    “저 또 놀렸죠?”

    “시아는 아까 웃었잖아요. 제가 얼마나 진지했는데.”

    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안 웃었다니까요.”

    “웃었는데. 다 들었는데.”

    라크,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뒤끝 있네요. 친척 누나 건으로 물고 늘어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시아는 들으라고 대놓고 중얼거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치사한 것 같았지만 원래 유치한 장난엔 유치하게 대응해 줘야 이기는 법이다.

    결국 라크시스가 패배했다.

    “알았으니 눈이나 감아요. 멀미하고 싶지 않으면.”

    * * *

    [3517년 8월 5일은 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이다. 오늘 건국 이래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민심을 울리는 경관이 펼쳐졌다. …글레이셜 홀을 보는 나의 기분은 뭐라고 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참으로 위대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 3517년 8월 5일 모르간 만국 산업박람회에 보내는 편지

    - 신의 은총으로 대 세페란테 제국, 씨즐턴과 해외 세페란테 자치령의 군주, 신앙의 수호자인 알리나 디아우스 세페란테로부터.]

    * * *

    “와아…….”

    “시아, 그렇게 놀라워요?”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세공한 유리를 통과해 사방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궁전. 빙산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는데, 차가운 극지방이 아닌 신성한 천국을 만들어내 버렸다. 사람이 많았다면 모를까, 아직 첫 개장도 하지 않은 글레이셜 홀은 시아와 라크시스의 발소리를 빼면 먼지가 흩날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글레이셜 홀을 실제로 볼 줄은 몰랐으니까요.”

    빛의 물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물고기가 된 것만 같다. 층마다 들어선 수십만 개의 공산품과 마도 기계가 아니었다면 한낮의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알리나 황제가 재위 기간에 세운 대표적인 업적에는 화폐 통일 말고도 마도 문명의 부흥과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이를 가장 극도로 드러낸 사건이 바로 모르간 만국 산업박람회. 말이 만국박람회지, 사실상 마법과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제국의 산업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녹아있었다. 실제로도 박람회 이후 제국산 마도 기계와 공산품의 무역 수요가 최고치를 찍었다고 하니까.

    “미래에는 글레이셜 홀이 없거든요.”

    “아아.”

    불타 없어진댔나. 워낙에 기계가 많다 보니 불붙을 구석이야 많긴 했다. 질 나쁜 관람객들이 글레이셜 홀 뒤편의 정원에서 몰래 궐련을 태웠을 수도 있고. 원인은 불명이라 했지.

    “유리만 가득한 건물은 어차피 냉난방 효율이 떨어집니다. 마정석 잡아먹는 도둑인 셈이죠.”

    문화재나 다름없는 건축물을 고작 세금 도둑 취급하는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유리를 통해 한여름의 햇볕을 그대로 쬐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별로 덥지가 않았다.

    잘 보니 요르문의 연구실과 라크시스의 정원에서 봤던 빛무리들이 자글자글하게 유리 근처를 떠다니고 있었다. 마력이 돌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긴. 건물을 계속 유지했다면 세금이 엄청 들긴 했겠네요.”

    마력이 사라지고 마정석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원래 시대라면 말이지.

    글레이셜 홀 입구에는 무려 30톤에 달하는 거대한 마정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홀에 들어서는 사람은 아마도 이 거대한 마도 시대의 상징으로부터 제국 마도 기술과 산업의 위력을 여실히 실감할 터였다.

    내가 관람객이었다면 그랬을 테지만.

    “이 마정석 때문에 주변의 마력을 섬세하게 느낄 수가 없군요.”

    라크시스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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