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하하. 미스 허슬러. 헨리 순경은 이따 제가 한 소리 하겠습니다.”
내가 그놈의 탐정소설 좀 작작 보랬지. 못산다 정말. 그치만 소설 얘기를 한 게 아닌 걸요, 경사님. 한창 투닥거리고 난 후 헨리는 결국 슈나이더에게 등짝을 맞으며 쫓겨나고 말았다.
“나가! 나가서 일이나 해!”
“경사니임!”
슈나이더가 약이 바짝 올라서 식식거린다. 숨을 쉴 때마다 씰룩거리는 콧수염과 배가 아주 가관이다.
“라크, 제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 * *
“슈나이더 경사. 그래서 우선 파리스 맨틀러 교수에 대한 조사를 요청드리려 합니다.”
“그, 갈리프도흐 교수 말입니까?”
라크시스의 입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슈나이더가 다시 진지한 태도로 되돌아온다. 아까는 그렇게 거만하게 굴더니 그래도 경찰은 경찰이라는 건가.
“미스터 비렌체가 말하길 사칭범이 마정석 때문에 자신을 노렸다면 파리스 교수도 위험할 수 있을 거라더군요.”
“안 그래도 신고가 들어와서 조사할 참이었는데 잘 됐군요.”
신고?
“맨틀러 교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시체 도굴꾼 말입니다. 갈리프도흐 의학대학에 신원불명자가 밤중에 들락거린다는 경비원의 신고를 받았거든요.”
슈나이더는 질린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뻔하지요. 친족의 몸을 친히 째보라고 주는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가 책상 테이블 서랍에서 신문을 한 부 꺼내 들었다. 약 삼 일 전 날짜가 상단에 찍혀있는 모르간 타임즈지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더군요. 서대륙 의학 학회에 파리스 맨틀러란 교수가 자문으로 참가해 제국의 명예를 드높였다고요.”
펜으로 죽죽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친 곳에는 ‘해부학’이라는 활자가 있었다. 시체 도굴꾼과 거래를 한다는 심증만 있었던 슈나이더에겐 아주 반가운 물증이었다.
“눈감아 주고 있었던 거지, 몰랐던 게 아니었으니 이참에 같이 수사를 해볼 작정입니다.”
슈나이더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자 순간 아차 싶었다. 어쨌거나 칠십 년 후 원래 시대의 의술은 지금의 파리스 맨틀러 교수가 기틀을 다져놓은 것이었다. 이번 수사로 교수가 더 이상 연구를 못 한다든가 한다면 원래 시대에 영향이 생기는 게 아닐까. 의술사로 먹고사는 나는?
라크에게 속삭였다. 이런 일로 파리스 교수님이 조사를 받게 되면 징역을 살게 될까요?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도 생각지 못한 경우였나.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라크시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썹만 까딱였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그녀에게 내민다.
“무슨 뜻이에요?”
“귀족이니 딱히 징역까진 아닐 테고. 기껏해야 구속일 테니 보석금을 내면 되겠죠.”
그래서 그 보석금은 누가 내주는데? 그러자 라크시스가 당연히 자신이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라크?”
“저 돈 많아요. 벌금이래도 뭐.”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답답해져서 저절로 가슴을 치게 된다. 라크시스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기울였다.
“치유사도 없는 시대에 의학마저 엉망이면 곤란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녀가 항변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슈나이더에게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소리로 그가 덧붙이는 말에 그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린 광룡의 봉인이라는 한배를 탔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협조하려는 것뿐인데. 안 되나요?”
말로는 이 남자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인가.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의 말마따나 내 편의를 봐주겠다는 건데 어쩐지 약이 오르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인가.
로렌, 응?
라크시스가 눈을 반쯤 내리깔며 되물었다. 역시 그는 무엇이 본인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게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성장해서 슈나이더를 만나러 온 것도 그렇고.
수세에 몰린 사람처럼 가냘프게 시선을 내리면서도 대답을 내놓으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기다린다.
“…안 될 건 없죠.”
“그럼 문제 될 건 다 해결됐네요.”
그래, 본인이 수고해 주겠다는데. 어쨌거나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일단 감사히 호의를 받긴 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날 신경 썼다고 이러는지.
슈나이더는 두 남녀의 알 수 없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로렌 허슬러가 포기했다는 투로 고대 마법사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다시 그녀에게 마지막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일단 6피트에 검은 옷차림에 금발로 추정되는 인물이라 하셨죠.”
“네.”
“알겠습니다. 저희로서도 재키 레이븐의 생김새를 진술해 준 분은 처음이라.”
슈나이더가 용의자에 대해 거침없이 적어나갔다.
“재키 레이븐이 확실한 것도 아닌걸요.”
“그래도 나름 신빙성이 있는 진술이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재키 레이븐의 소문과 거의 일치하거든요.”
그래서 원래 시대에 유행하던 추리소설에서 재키 레이븐이 금발에 장신으로 나오는 건가. 나름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라크시스는 먼저 일어나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놀랍게도 그 안에선 저택의 주소와 마력 신호 일련번호가 적힌 멀쩡한 명함이 나왔다.
“사칭범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면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슈나이더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긴 이 사람들은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이러고 왔지. 특별 수사 허가권을 가진 고대 마법사는 재키 레이븐 사칭범에 대한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그 말은 발견한 단서를 합법적으로 가져다 보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마법사가 메이덜린 경찰과 같이 뭘 해주겠다는 것도 아닐 터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니 이쪽에서 찾아내면 저 고대 마법사는 그걸 홀랑 가져가겠다는 거다.
잔뜩 열이 올랐으나 슈나이더는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라크시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수사 허가권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상대를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완벽한 우위의 모습에 기가 눌린 탓이었다.
“알겠습니다. 고대 마법사님.”
그들이 떠나고 한바탕 헨리를 갈군 후에야 슈나이더는 평안을 찾았다.
어차피 시체 도굴꾼 문제도 해결했어야 했다. 시가 한 대를 모두 태우고 나서 사건 파일을 펼치던 때였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나저나 미스터 비렌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에게 칼을 맞으며, 켈튼의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설탐정과 고대 마법사가 친히 범인을 찾아다니는가.
“제일 수상한 건 미스터 비렌체 쪽인가.”
슈나이더는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 * *
“진이 다 빠지네요.”
경찰서라서 긴장했던 것보다 슈나이더와 헨리 사이에 끼어있었던 게 훨씬 더 힘들었다. 거기다 어젯밤의 공동묘지 사건 때문에 몸에는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거울을 안 봐도 눈 밑이 퀭하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곧바로 글레이셜 홀에 갈 수 있겠어요?”
라크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급한 게 아니라면 쉬고 싶지만.
“괜히 늦장 부리다가 봉인을 빼앗기는 것보단 낫죠.”
이번 시간 여행은 대략 나흘이었다. 그중 삼 분의 일이 벌써 지나갔으니 내겐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이쪽이 선수 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광룡의 봉인이 파괴된다는 말과도 같지.’
묵직한 눈꺼풀을 애써 힘주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크시스가 인상을 쓰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가, 갑자기 왜 이래?
시아가 당황하든 말든 라크시스는 턱을 이리저리 돌리며 얼굴을 살폈다.
“뭐, 뭐 해요?”
라크시스의 고운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서서히 떠올랐다.
“먼저 저택에 가 있을래요?”
“왜요?”
“눈이 충혈되었는데요. 의술사라면 이게 무슨 증상인지 알 법도 한데.”
그러는 그쪽도 어제 저랑 같이 그 난리를 쳤잖아요. 하지만 피로 한 점 묻지 않은 라크시스의 싱그럽고 생기있는 낯짝을 발견한 순간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와, 불공평해.”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지.”
“다시 태어난다면 저도 고대 마법사로 태어나고 싶네요.”
어쩜 그렇게 사람이 한결같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가 있나.
“억울하면 시아도 고대 마법사 하시죠.”
“하하. 진짜 얄밉네요.”
“당신은 피곤해 보이고요.”
“됐어요. 어서 출발이나 하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라크시스가 손을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잠깐 사이에 삐딱하게 서서 지팡이까지 짚곤 처음 만났던 날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크, 왜 그렇게 봐요? 뭐 묻었어요?”
어제오늘 봤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며 대꾸하려던 시아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다물렸다. 그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긴장이 손끝을 타고 서서히 기어 올라왔다.
“사실 의문을 좀 가지긴 했습니다만. 시아 당신은 왜 광룡의 봉인을 지키려고 마음먹었던 겁니까?”
갑자기 이런 걸 묻는다고? 예상 밖의 질문에 도리어 긴장이 탁 풀렸다. 얼떨떨해서 머릿속에 떠오른 걸 그대로 뱉어버렸다.
“그야…….”
사람이 죽는다잖아요.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재난의 발생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겪을 일이 아니라 해도 타인을 살리고 재난을 막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게 약간의 노력만 기울여도 가능한 일이라면 더더욱.
심지어 그녀는 의술사였다. 생명을 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공동묘지에 파묻히고 수만 피트 상공의 비행선에 걸린 채 눈을 뜨기로서니 의술원에 들어가며 선서까지 한 사람이란 말이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인걸요.”
“인간은 언젠간 모두 죽습니다.”
그건 자신도 아는 사실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일 테지. 하지만 그녀의 논점은 그게 아니었다.
“라크, 대부분의 인간은 당신처럼 오래 살지 않아요.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생이 끝나죠.”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