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키는 6피트 정도였고, 적당히 마른 체형이었어요. 머리색이 굉장히 밝았는데. 금발이었을 거예요. 그 이상은 모르겠네요.”
워낙 순식간에 사라진 사람이라 기억나는 건 그게 전부다. 그런데 라크시스가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미스터 비렌체를 보면서 머리색도 봤어요?”
그 정신에? 어째 생략된 뒷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지.
“그 사람 온통 시커멓게 입어놓곤 모자 밑만 환했거든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쿡쿡 웃었다. 입가를 가린 손 위로 반달처럼 휜 눈이 꽤 즐거워 보였다.
“눈썰미가 좋네요. 탐정해도 되겠어요.”
“지금은 로렌 허슬러잖아요?”
“하긴, 그러네요. 미스 허슬러.”
이래 봬도 원래 시대에서 재키 레이븐이 주인공인 추리소설을 열심히 봤던 전적이 있다. 메이슨의 연구실에 나타난 작자가 그 묘사와 흡사했기에 연상이 쉬웠던 것뿐이었다.
라크시스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동하다 보니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도 시아는 어김없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켈튼의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에 이목이 집중된다.
어색해라.
하지만 그런 이목을 라크시스는 익숙하게 받아내는 듯 보였다.
공장 밀집 지대에 떡하니 위치한 잿빛의 메이덜린 경찰서. 어젯밤 겪었던 일이 무색하리만치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다.
하지만 경찰서는 경찰서라고. 태어나서 경찰서에 갈 만한 짓 한 번 안 해본 소시민으로서 괜히 긴장이 되고 만다.
심지어 사설탐정인 척 행동해야 하니까. 시간 여행을 하기 전에는 그저 하루 살기 바쁜 평범한 의술사였는데 말이지.
그녀가 머뭇거리는 걸 알아챈 걸까.
먼저 계단 입구에 올라선 라크시스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들어갈까요, 로렌?”
그래. 지금은 조력자가 있었지.
어쩐지 손바닥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피가 도는 감각.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는 신호였다.
표정과 감정은 상호작용한다지. 이럴 땐 웃어주는 게 답이다.
“가죠. 고대 마법사님.”
* * *
새로운 편리함보다 오래된 불편함이 낫다. 보수적인 제국인의 성향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제아무리 고대 마법사가 황제보다 대단한 존재라 한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적 같은 마법을 선보이는 한량 마법사보단 완벽하게 성장한 상류층의 신사에게 더 깍듯하고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완벽히 갖춰 입은 라크시스의 정장은 바로 이런 인식을 노린 계획이었다. 일부러 마법으로 순간이동 하는 대신 켈튼의 마차를 타고 보란 듯이 메이덜린을 가로지른 것도 의도된 바였다.
경찰서 안에서 창문 너머로 두 남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시아는 뒤늦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혀를 내둘렀다.
특유의 빛나는 은발로 어디서나 신원을 보증받던 라크시스는 오늘따라 사람들이 더 가까이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마차의 엔진 소리에 창밖을 줄곧 주시하고 있던 슈나이더 경사에게 그대로 먹혀들었다.
“헨리 순경님.”
“어? 미스 허슬러 아니십니까?”
입구 쪽 테이블에서 민원인으로 보이는 노부인에게 차를 따라주던 헨리 순경이 먼저 알은척 말을 걸었다.
“기억하시네요.”
경찰보단 배우 같은 얼굴의 헨리가 멋쩍게 웃었다. 그때 큼직한 유리창이 사방에 달린 안쪽 사무실에서, 모든 걸 듣고 있었던 슈나이더 경사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야 어제 그 난리를 치셨으니, 아니. 크흠. 그래, 미스 허슬러.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슈나이더는 얇은 인버네스 코트 차림의 탐정과 그 옆의 귀족을 순식간에 훑었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이다. 특히 고대 마법사 쪽이 더.
노련한 경찰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로렌 허슬러란 여자가 경찰서를 다시 찾은 것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민원인 쫓아내듯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고대 마법사가 여유롭게 웃고 있는 걸로 보아 이 계획을 세운 건 저 신사 쪽이로군.
“사건 수사를 요청하러 왔어요. 슈나이더 경사님.”
수사? 요청? 그쪽이? 슈나이더는 콧수염을 꿈틀거리며 미소를 지어냈다.
“일단 두 분 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슈나이더의 사무실은 경찰서 로비에 비해 한결 조용했다.
“헨리, 멍청하게 서있지만 말고 가서 차라도 좀 내와 봐라. 일을 하려거든 수사 기록지를 들고 오든가.”
“네, 경사님!”
불뚝한 배를 문지르며 바깥에 소리친 슈나이더는 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헨리가 분주하게 차를 준비하는 걸 지켜보면서 물었다.
“그래요, 미스 허슬러. 어떤 사건을 접수하려 하시는지요?”
슈나이더는 일부러 수사 요청 대신 접수라는 말을 골랐다. 탐정이란 자들은 대개 수사를 빙자해 불법을 저지른다. 수사권이 없으니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스토킹이나 무단 가택 침입을 해버려서 종종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렌 허슬러라는 여자도 비슷하겠지.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절도나 불륜 사건을 떠맡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슈나이더 경사는 이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말하는 로렌 허슬러에게서 놀랄 만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재키 레이븐의 살인 미수 사건에 대해 공조수사를 요청하러 왔습니다.”
【 잠에서 깨어난 글레이셜 홀 】
벌써 삼십 분 째. 슈나이더는 어느새 테이블에 턱을 괴고 진지하게 로렌 허슬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옆에서 헨리가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내 슈나이더가 결론 짓듯 대답했다.
“미스 허슬러의 말대로 그자는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일 가능성이 높군요.”
슈나이더의 표정이 심각했다. 재키 레이븐의 유명세를 이용한 유사 범죄가 나날이 늘어가는 요즘이다. 오죽하면 재키 레이븐을 추앙하는 갱단까지 생겼을까.
“재키 레이븐은 피해자에게 칼을 쓰진 않거든요. 녀석은 무조건 피해자를 목 졸라 죽인 후에 편지를 남기지요.”
대화를 기록하는 헨리의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연쇄 살인마 얘기가 나오니 긴장한 건지 아니면 두려운 건지.
그러고 보니 오늘도 장갑을 꼈네. 잉크 자국이며 손끝에 묻은 먼지를 봐선 결벽증은 아닌데.
시아는 헨리의 장갑을 흘끔거리며 슈나이더의 말을 경청했다.
“본인을 따라 하는 자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재키 레이븐의 피해자는 대부분 젊은 여성인데, 간혹 사칭범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도 발견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죠.”
그때 헨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요. 지난번 잔느 강에 떠있던 신부님 시체에도 ‘고귀한 단죄를 모욕하지 말라’고 적혀있었어요.”
헨리의 눈이 반짝이자 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말요?”
“헨리. 내가 사건 정보는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슈나이더가 테이블을 단호하게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그새 기죽은 헨리는 다시 기록지에 고개를 처박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죄송해요, 경사님.”
“죄송합니다. 미스 허슬러. 여기 헨리 순경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허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는 슈나이더가 무섭다. 그럼에도 헨리가 했던 말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 시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헨리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탐정이시라면서 정보력이 부족하시네요.”
“헨리!”
슈나이더를 겁내는 것 같은데 은근히 할 말은 다 한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슈나이더가 헨리를 험하게 굴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참. 미스 허슬러에게 큰 무례를 저질러버렸군요.”
“그럼 아까 순경님이 말씀하셨던 시체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슈나이더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헨리 녀석의 입방정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유사 범죄를 막기 위해 공개하지 않은 것뿐이니까.
슈나이더는 결국 로렌 허슬러에게 말해주기로 결정했다.
“재키 레이븐의 피해자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지요. 살해당하기 얼마 전에 매춘을 했다는 겁니다.”
매춘?
“미스 허슬러도 탐정 일을 하시니 아시겠지만요. 공장 직공이니 메이드니 파출부로 일해봤자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빛이 있으면 그만큼 어둠도 존재하는 법. 마도 시대가 제국의 전성기로 불리게 된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 갈려나갔기 때문이었다. 밑거름이 되는 건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었지.
제국의 성장이 끝난 후에 태어난 시아로서는 근대사 서적에서나 봤을 법한 내용들이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경찰 측에선 풍기도 바로잡을 겸 주기적으로 유흥가를 돌며 재키로 추정되는 자들을 찾아다니는데, 또 그게 고새 소문이 퍼졌나 봅니다.”
매춘 이야기를 듣자마자 로렌 허슬러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기색을 읽어낸 슈나이더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암만 봐도 탐정 일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탐정 타이틀은 역시 곱게 자란 레이디의 취미 놀음 같은 것이었나.
요새 하도 탐정소설이 유행하니까 이 모양이다. 의술사라는 것도 결국 서대륙 물을 먹은 치유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치유사는 세상 험한 줄 모르는 잘나신 마법사들이고.
켈튼의 마차에서 내리던 두 사람을 목격한 이래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슈나이더는 어느새 이 대화에서 자신이 우위를 되찾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신부가 교인 하나를 지속적으로 추행해 왔는데 아주 변태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미스 허슬러가 듣기엔 좀 자극적일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만. 슈나이더는 소파에 몸을 길게 기대며 은근하게 입매를 만졌다.
“그 교인이 결국 교회에서 목을 매고 말았지 뭡니까. 그래서 신부가 그 시체를 재키 레이븐이 한 것처럼 꾸며냈고요.”
“그 신부를 재키가 죽였단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슈나이더는 한결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런 슈나이더의 심기를 헨리가 또다시 긁어댔다.
“재키 레이븐은 그런 걸 못 참는 성미니까요. 아무나 죽이지도 않고요.”
헨리 순경님, 아까부터 자꾸 대화에 끼어드시는데. 시아는 또다시 슈나이더의 눈총을 받고 움츠러든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순경님은 재키 레이븐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희대의 살인마잖아요. 전 경찰이고요.”
헨리가 살짝 흥분한 기색을 담아 웃었다. 기분이 고조됐는지 펜을 쥔 손가락까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결국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검거하는 경찰의 로망이 있었다는 말이구나.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다더니,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헨리의 눈엔 생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