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화 (22/292)
  • 22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요. 안 잡아먹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요.”

    메이슨은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로렌 허슬러, 아니 시아 켈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별다를 것 없는 간단한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만약 시아가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귀부인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충 묶어 올린 검붉은 머리까지 마치 온몸으로 그녀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메이슨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의뢰비를 모두 돌려드릴게요. 대신 절 보호해 주시면 안 될까요?”

    * * *

    “재키, 레이븐이요?”

    메이슨의 입에서 나온 어젯밤의 증언은 정말이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크시스는 이미 어디선가 의자 두 개를 마법으로 끌어당겨 가지고 온 상태였다. 그가 메이슨의 머리맡에 앉고는 남은 의자를 시아에게 권했다.

    요르문은 홀로 침대 헤드에 삐딱하게 기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라크. 그 시커먼 남자, 마법사라며.”

    메이슨이 얼른 덧붙였다.

    “음, 확실하진 않아요. 그 남자가 했던 말들이 어딘가 이상했었거든요.”

    “좀 더 자세히 말해보지. 미스터 비렌체.”

    메이슨은 곧장 자신이 목격한 것을 상세히 진술했다. 머리가 좋긴 한 모양인지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와중에도 볼 건 다 봤다.

    “마치 재키 레이븐으로 오해받으려고 하는 사람 같았어요. 살인이 목적인 사람도 아니었고요.”

    “그자도 재키 레이븐을 사칭했던 모양이군요.”

    “그런 건지도 확신할 순 없지만요. 그런데 제가 계속 이렇게 누워있어도 되는지…….”

    또 눈치 보네.

    뜻밖에 라크시스가 나섰다.

    “당연히 됩니다. 지금 당신이 따라야 할 사람은 여기 있는 레이디 켈튼이니까요.”

    내가 쳐다보자 라크시스는 ‘내가 뭐?’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뭐, 그렇다네요.”

    메이슨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 남자는 오토마톤의 심장을 찾고 있었어요.”

    “심장이요?”

    “그, 제가 글레이셜 홀에 전시하기로 했던 무용수 오토마톤 말이에요. 심장 모양으로 생긴 마정석이 있어서 동력으로 썼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아와 라크시스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유일하게 완성품이 없던 오토마톤의 설계도. 메이슨 비렌체가 광룡의 봉인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동묘지에서부터 했던 고생이 모두 헛된 일이었다고 느껴질 즈음 발견한 유일한 단서였다.

    “그게 봉인이 맞나 봐요.”

    이번엔 시아가 속삭였다. 라크시스도 덩달아 그녀에게 고개를 바짝 대고 말했다.

    “그러게요.”

    “…레이디. 죄송하지만, 봉인이요?”

    “그런 게 있어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말해줘요.”

    메이슨은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말을 시작했다.

    “어쩌면 파리스 교수님도 위험할 수 있을지 몰라요. 오토마톤의 심장에 쓴 마정석은 교수님이 주신 거거든요.”

    파리스 교수가 거기서 왜 나와?

    “그렇게 위험한 물건인 줄 알았더라면 쓰지 않았을 거예요. 파리스 교수님께 없는 걸 알았으니 제게 왔겠죠.”

    메이슨은 파리스 맨틀러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제 말하던 걸 보면 거의 추종자처럼 그녀를 따르는 것 같았으니까.

    “…이상한 일이죠. 그 작은 조각을 어떻게 알고 찾았을까.”

    “작은 조각이요?”

    혼잣말처럼 한 말을 들어 당황했는지 메이슨이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오토마톤에 사용했던 마정석의 조각이 연구실에 있었거든요. 제 마스크 안쪽에요.”

    뭐라고? 시아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도대체 마정석을 왜 그런 데다가 숨겨놔요!”

    “이런, 시아. 환자가 놀라잖아요.”

    “오, 미안해요. 미스터 비렌체.”

    “하하. 전 괜찮아요. 레이디. 그렇지만 그 정도 크기의 마정석은 어차피 아무 데도 못 쓰는걸요?”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답답했다. 메이슨의 역병 의사 마스크 안쪽을 봤을 때 샤샤리아 잎을 고정시키려고 끼워놓았던 돌이 그제야 떠올랐다. 당연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 이게 뭐람.

    “혹시 그 조각 지금 가지고 있어요?”

    “아뇨. 재키 레이븐이 가져갔어요.”

    그렇다면 상황이 이해가 됐다. 봉인은 진작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 파리스 교수를 추적했든 뭘 어떻게 했든 간에 재키 레이븐을 사칭한 마법사는 광룡의 봉인을 찾아 메이슨의 연구실까지 왔다.

    불완전한 봉인에서 흘러나오던 미미한 마력을 감지하고 연구실을 뒤엎었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겠지. 오토마톤은 글레이셜 홀에서 전시 준비를 마친 상태니까.

    그러다가 봉인의 일부를 발견했고, 이후 메이슨에게서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혹시 재키 레이븐에게 오토마톤이 글레이셜 홀에 전시되었다는 것도 말했나요?”

    “아뇨. 묻지도 않고 절 죽이려 했는걸요.”

    광룡의 봉인은 거창한 이름과 달리 라크시스조차 쉽게 찾아내기 힘들었다. 우리가 메이슨의 역병 의사 마스크를 보고도 지나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봉인을 찾기 힘든 건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도 마찬가지일 거다. 불안정한 봉인에서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친다면 상황은 종료다.

    시아는 느슨하게 풀려있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단 이 사건은 경찰에도 알리는 게 좋겠어요. 재키 레이븐에 대한 정보라면 사칭범이든 뭐든 그쪽이 더 많을 테니까요.”

    라크시스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도 빠르지. 아니면 손발이 잘 맞는 건가. 그는 내가 다시 로렌 허슬러의 가면을 뒤집어쓰려 하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미스터 비렌체. 협조를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혹시나 경찰이 뭘 물어보거든 여기서 들었던 건 다 비밀로 해줘요. 제가 켈튼이란 것도 봉인이니 뭐니 하는 말들도요.”

    “알겠어요.”

    마력이 삼 분의 일 정도 사라진 마정석에 다시 한번 하루 내내 지속되는 회복 수식을 걸었다. 남은 마력을 다 쓰겠지만 이번 시간 여행에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엔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당신이 했던 요청은 받아줄게요.”

    “레이디?”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 켈튼의 손님으로 저택에 머물러요. 이건 제가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요르문도 일기장의 내용을 알게 된 이상 한 배를 탄 몸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귀족들은 명예를 위해서라도 손님을 이유 없이 내치진 않는다.

    하물며 상대는 환자인데. 그런데 요르문이 과연 순순히 협조해 줄까?

    요르문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풀어지듯 입꼬리를 올렸다. 긍정의 뜻이었다.

    또 이렇게 합이 맞는다. 시아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다시 한번 로렌 허슬러가 될 순간이었다.

    “대신 의뢰비도 그대로 받아요. 의뢰는 여기 있는 라크시스 옌이 한 거니까.”

    * * *

    “그 남자가 카얄이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저도 감지하지 못한 봉인 조각을 찾아낸 걸 보면요.”

    시아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히려 하는 요크 부인을 애써 말리며 라크시스와 저택을 빠져나왔다. 행선지는 메이덜린 경찰서. 경찰서에 간다고 하니 라크시스를 바라보는 요크 부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라크시스는 웬일로 정장에 모자, 지팡이까지 갖춘 차림새로 그녀를 따라왔다. 그러고 있으니 마법사가 아니라 영락없는 신사 그 자체였다.

    그에게서 은은한 숲 냄새가 났다.

    “라크, 향수 뿌렸어요?”

    “무슨 냄새라도 나나요?”

    아니었나. 라크시스가 신경 쓰는 기색이라 얼른 대꾸했다.

    “이상한 냄새 아니에요. 그냥 숲 향기 같은 게 나서 물어봤어요.”

    “아아.”

    “뭔데요?”

    라크시스는 어느새 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체향이에요.”

    “그걸 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요.”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시아는 반박할 말이 없어서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여 줬다.

    “경찰서에 다녀오고 난 후에 곧바로 오토마톤을 보러 가야겠어요.”

    “곧바로요?”

    “봉인이 불안정해지면 마류 이상 현상이 생긴다면서요. 라크랑 요르문도 알아차릴 수 있는 걸 카얄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지금까지 발견된 광룡의 봉인은 총 세 개. 그중 두 개는 이미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를 기준으로 오 년 전 북부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의 붕괴 사건과 세 달 전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서.

    기공식 현장에서는 봉인의 파괴를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라크시스가 아마 그렇게 됐을 거라 말해줬다.

    남은 하나는 인어의 눈물이라는 보석으로 켈튼 저택에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진 두 봉인과 달리,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봉인에선 마류 이상 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랬다.

    요르문의 철저한 보안 때문에 인어의 눈물은 더 이상 외부에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오토마톤의 심장은 다르다. 무방비한 상태로 떡하니 전시장에 걸려있는 오토마톤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분명 글레이셜 홀에 나타날 거예요. 카얄이요.”

    “나타난들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죠?”

    흠. 거참 예리한 질문이군.

    “고대 마법사끼리는 통하는 그런 거 없어요?”

    “아뇨. 마법을 사용하거나 마력을 일부러 흘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직접 접촉해 봐야 합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어요.”

    라크시스는 무언가 생각났지만 입 밖으로 내기는 망설여지는지 시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날 가지고 또 뭘 실험해 봤다든가.

    그가 애매하게 굴자 수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캐묻는 것도 귀찮았다. 만약 내가 마법사였다면 라크시스의 수작질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지만.

    “그럼 지난 밤에는 어떻게 알고 메이슨에게 간 거예요?”

    “대공의 올빼미 때문이죠. 그자의 올빼미가 흘린 마력을 따라간 겁니다.”

    대공? 내가 아는 대공은 여기서 만난 느글거리는 붉은 머리 황족밖에 없는데.

    “설마 차탈 세페란테?”

    내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라크시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차탈 세페란테요. 그 인간도 마법사라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줄게요.”

    “그럼 어쨌거나 일단 카얄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인 거죠?”

    “그렇죠.”

    시아는 머리에 눌러쓴 체크무늬 헌팅캡을 만지작거리다 대답했다. 로렌 허슬러가 된 김에 기분이라도 낼 겸 헤이든에게 받아온 모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