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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1)화 (21/292)
  • 21화 

    그때였다.

    “저기…….”

    문틈이 살짝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역광을 받은 자그마한 얼굴이 쏙 나타났다.

    “누님!”

    요르문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르문. 나 씻고 싶은데, 이 밤엔 무리려나.”

    확실히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목욕을 하는 건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일이었다. 고용인들을 깨워 욕실에 더운물을 채우고, 레이디를 씻겨줄 메이드도 준비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요르문은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누님을 저대로 절대 재울 수 없다. 수술하느라 씻은 손과 팔을 뺀 나머지에 피투성이에 흙투성이에 땀과 먼지가 가득했다. 시아는 지나가던 거지도 불쌍히 여길 만한 꼴을 하고 있었다.

    “잠시만 계세요, 누님. 요크 부인을 불러올게요.”

    “아냐! 알아서 씻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어딘지 안내만 해주면 되는데.”

    나 하나 씻자고 저택을 밝히는 건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요크 부인은 내 모습을 보면 또다시 까무러칠걸.

    “그래도 누님 혼자서 씻기는 불편하실 텐데…….”

    이유를 물었더니 가관이었다. 주방에도 자동식으로 설치되어 있는 마정석 온수기가 딱 한군데, 욕실에만 사람 손을 타는 수동식으로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운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지만 결국 사람이 수도에서 일일이 물을 떠다가 욕조에 채워야 된다나 뭐라나. 제일 충격적인 건 이 시대의 상류층들에겐 이런 최신식의 불편하고 귀찮은 욕실이 대유행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마도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무슨 일이람. 기가 막혔다.

    “아니, 수도가 있는데 도대체 왜……?”

    요르문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저야 필요할 때 물을 만들어 쓰면 그만이니까요. 사용인 욕실은 따로 있고요.”

    하여간 귀족들은 이게 문제다. 엄연히 수도꼭지가 보급된 시대에도 귀찮게 일일이 모든 일에 사람을 쓰니까.

    이런 게 부의 과시라는 걸까. 바뀌지 않는 관습일 수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일단 절실하게 씻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요크 부인을 끌고 올 것만 같은 요르문의 소맷단을 붙잡고 애원했다.

    “진짜야. 나 혼자서도 잘 씻어. 정 안 되면 사용인 욕실에서라도 씻을게. 찜찜해서 죽을 것 같아.”

    “누님, 그래도…….”

    요르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물만 받아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켈튼의 일원으로 있는 사람인데.

    그때, 두 사람 사이로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시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 * *

    “돕긴 뭘 도와!”

    요르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귀 끝까지 시뻘게져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아는 라크시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수술하기 전 손을 씻던 물. 요르문이 마법으로 허공에 띄워놓았던 물 덩어리가 생각이 났다.

    고대 마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니 라크시스야 그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럼 욕조에 물만 좀 채워줄 수 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몇 번 갈았으면 하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요. 제겐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라.”

    라크시스가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재수가 없긴 한데 미소가 걸린 얼굴이 잘생긴 탓에 뭐라고 말도 못 하겠다.

    “와아, 대단하셔서 참 좋겠네요. 그런데 라크도 얼른 씻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라크시스가 그제야 제 몸을 내려다봤다. 시아만큼은 아니어도 그도 만만찮게 더러웠다.

    “그건 그러네요.”

    그럼 같이 갈까요? 라크시스가 문틈 새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요르문이 펄쩍 뛰며 라크시스의 손을 낚아챘다.

    “아무리 쉬워도 안 돼. 뭘 물을 채워줘? 누님 씻는 중간에 들어가기라도 할 셈이야?”

    “흥분하니 이성이 멈춘 모양이군, 꼬맹이. 좌표만 정확하면 눈 감고도 뭔들 못하나?”

    “그건 나도 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대 마법사가 스스로 원격 자동 수도꼭지가 되어 주겠다는데. 그게 모두에게 좋잖아. 안 그래?

    요르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 돼요. 요크 부인 깨워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절대 저놈 따라가지 마세요.”

    누님이 씻는 소리를 밖에서 다 듣겠다는 건지 뭔지. 물을 중간에 갈아주려면 누님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데.

    요르문은 구시렁거리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요르문보다 두 배로 성난 걸음으로 달려온 요크 부인에게 욕실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결국 팔자에도 없는 이 새벽에 요크 부인의 잔소리를 들으며 시중과 함께 몸을 씻어야만 했다.

    “어휴, 아가씨. 앞으로는 저런 마법사랑 어울리지 마셔요. 신사가 되어서는 숙녀를 제대로 보필하는 법도 모르는 한량 같으니.”

    요크 부인의 뒷담화가 끊이질 않는다. 라크시스가 얼굴만 반지르르해선 그동안 주인님을 어디에 데려갔고, 무슨 사고를 쳤고, 도대체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나 뭐라나.

    오늘도 주인 대신 손님을 마중 나가겠다고 하고선 손님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야단이다. 거기에 다 큰 여인이 씻는 욕실 앞에서 감히 뭘 하려고 했냐며 욕 아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댔다.

    몸을 문지르는 요크 부인의 손길이 거침이 없다. 시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제 아들이었으면 벌써 수도원에 보내고도 남았어요. 안 그런가요, 아가씨?”

    “하하…….”

    라크시스, 꽤나 미움받고 있었나 보다.

    * * *

    “아가씨. 저 위에 계신 손님은 어떻게 할까요?”

    헤이든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쟁반을 들고 시아 뒤에 시립해 있다가 물었다.

    “그대로 자게 둬요. 이따가 제가 묽은 스튜라도 좀 끓여서 올라갈게요.”

    어젯밤의 사건으로 수면 시간이 부족한 탓에 하품이 쉴 새 없이 나왔다. 함께 식당에 앉아있는 요르문과 라크시스의 얼굴에도 그늘이 시커멓게 졌다.

    집주인의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추구하는 요크 부인의 잔소리가 이뤄낸 결과였다.

    “그럼 식사가 끝나실 즈음에 스튜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헤이든.”

    “부디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아가씨.”

    헤이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하지만 곤란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볼 때마다 자꾸만 칠십 년 후의 노집사인 헤이든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라크시스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미스터 비렌체에게 곧바로 가보실 생각이신가요?”

    “네, 뭐. 깨어나든 안 깨어나든 상태를 살펴보긴 해야 되니까요.”

    “그럼 같이 가죠. 그자가 정신이 들었다면 물어봐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요.”

    그건 그렇다. 메이슨은 어젯밤 살해당할 뻔했던 사람이다. 살인 사건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강력 범죄 사건이지만, 메이슨 비렌체는 광룡의 봉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원한을 샀든 아니면 운이 나빠 피해자가 되었든 메이슨이 죽으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바로 이쪽이었다.

    다만 어제 봤던 메이슨이 꽤 심약해 보였던 터라 트라우마가 생겼을까 걱정이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너무 부담 주지 마요.”

    라크시스는 생각 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헤이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귀신같이 스튜를 대령해 왔다. 낯선 얼굴이 많으면 메이슨이 힘들어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시아가 직접 스튜를 가져가기로 했다. 저택에 들이기엔 그가 아직 수상하다는 이유로 요르문이 따라왔다.

    의료도구와 마정석이 든 가방을 챙기고 회진가듯 메이슨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메이슨은 퀭한 눈으로 이미 일어나 앉아있었다.

    “미스터 비렌체. 일어나 있었네요?”

    “…네에.”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럴 만도 하지. 살인이니 피격이니 하는 건 신문에서 활자로 볼 때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본인이 당하고 나면 그 어떤 것보다도 두려운 것이 되기 마련이지.

    그나마 사용인들이 옷을 갈아입히고 피가 튄 머리며 얼굴을 닦아놔서 창백한 낯빛에도 사람처럼 보였다.

    “회복 수식이 있어도 살이 붙으려면 좀 걸려요. 무리하지 말고 도로 눕는 건 어때요?”

    하지만 메이슨은 시아의 말을 듣는 대신 묘하게 고집스러운 태도로 계속 앉아있었다.

    “저, 레이디.”

    잔뜩 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레이디는 로렌 허슬러가 아니시지요?”

    시아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확신을 한 듯 서글픈 눈을 했다.

    “사용인분께 들었어요. 여기가 대마법사의 저택이고 레이디는 켈튼의 영애이시라는 걸요.”

    “이런, 시아. 들켰네요.”

    라크시스가 고개를 움직여 그녀의 귓가에서 말했다.

    “저도 알아요.”

    “어떻게 할래요?”

    속삭임치고는 큰 목소리였다. 장난기가 다분한 라크시스의 짓궂은 표정에 메이슨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떻게 한다니…….”

    메이슨이 겁먹고 움찔거리다가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렸다. 아, 진짜. 시아는 라크시스를 한 번 흘겨보고 메이슨에게 다가갔다.

    “힘주지 말아요. 다시 말하지만 회복 수식이 걸려있어도 함부로 움직였다간 상처 터질 수 있어요.”

    그의 머리를 받치고 천천히 눕히자 메이슨은 시아의 손길을 그대로 따라 완전히 누웠다.

    “그리고 내가 켈튼이란 걸 알면 뭐 어때요. 그쪽은 환자고 난 당신을 살피러 온 의술사라는 건 변하지 않는걸요.”

    메이슨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무엇이 그의 시선을 떨리게 만드는가. 시아는 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로렌 허슬러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메이슨은 시아 켈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스터 비렌체. 귀족이 무서워요?”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었다. 여기가 아직 황제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란 걸.

    아무 생각 없이 원래 살던 시대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황제가 있지만 총리가 실권을 쥐고, 유명한 배우나 소설가, 과학자에게 명예직인 기사 작위를 내려주는.

    내게 귀족이란 단어는 특권층이라기보단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부산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3587년의 요르문 님도 의회 출석을 연금 수령으로 인식하곤 했으니까.

    그제야 메이슨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불자락을 꼭 쥐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감히 레이디 켈튼에게 청을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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