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0)화 (20/292)

20화 

연구실에서 메이슨을 급히 지혈하고 부축해 오느라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한여름 날씨에 상처만 들여다봤더니 등까지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저야 괜찮죠. 그나저나 미스터 비렌체를 좀 더 편안한 곳으로 옮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라크시스는 또다시 대답 없이 시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하지만 다친 건 그녀가 아니다. 그리고 열 몇 시간씩 걸리는 대수술을 혼자 도맡아 한 것도 아니었다. 의술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다만 라크시스는 수술을 끝낸 그녀를 더 이상 의술사가 아닌 시아 켈튼이라는 개인으로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적막이 흐르는 것을 견디다 못한 요르문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누님, 빈방이 있으니 그리로 옮길게요.”

“아, 그렇게 해줄래?”

계단이 이렇게 많은데 충격 없이 가능하려나. 저택의 위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와중에, 라크시스가 어느새 메이슨 앞에 바짝 다가가 서있었다.

“…옮기는 건 제가 하죠.”

* * *

메이슨은 다행히도 무사히 깨어났다.

“으, 흐윽. 레이디…….”

“움직이지 마요. 당신 지금 환자니까. 머리맡에 있는 마정석에 회복 수식 걸어놨으니까 건들지 말고요.”

“이게 무슨 상황, 여긴 어디…….”

“자고 일어나면 알려줄게요. 푹 쉬어요. 이상 생기면 날 부르고요.”

상황 파악이 안 되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지만, 메이슨은 곧이곧대로 얌전히 말을 들었다. 마취 기운이 남은 데다가 엄청 지쳐서 그랬는지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방 안엔 메이슨을 공간이동시키느라 따라온 라크시스와 수술 내내 보조를 섰던 요르문이 함께 있었다.

“후……. 한시름 놨네요.”

“시아.”

“네?”

라크시스는 시아를 불러놓고 대답이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인데,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는 거야. 궁금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부르지 말았어야죠. 괜히 궁금해지잖아요.”

“…아닙니다. 그저.”

시아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옷에도 피가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메이슨의 연구실에서 목격했던 현장이 차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크시스가 시아의 손을 붙잡고 이동한 곳엔 쓰러진 메이슨을 내려다보며 단도를 겨냥한 남자가 있었다.

온통 검어서 얼굴을 채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기척을 느꼈는지 라크시스가 뭘 해보기도 전에 검은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죽은 올빼미를 보며 라크시스는 욕설을 짓씹었다. 메이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 그 올빼미를 보고 알았던 모양이었다.

무사히 잠든 메이슨을 함께 앞에 두고 있으니 동지애가 생겨나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고생했어요. 시아.”

“뭘요. 라크가 아니었음 저 사람 그대로 죽었을 텐데요.”

라크시스가 제때 발견하지 않았으면 메이슨은 난도질당해 죽었겠지.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메이슨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그런 원한을 산 거야.

“당신이 치료해서 산 겁니다. 미스터 비렌체가 살아난 건 당신 덕분이에요.”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대화를 할 때마다 그에게 말려드는 경험만 했기에, 라크시스가 진지하게 말하는 이 순간이 못 견디게 어색했다.

“하하, 라크답지 않은데요.”

“저답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게. 무슨 뜻인지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

하지만 라크시스의 반문은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원래 라크시스의 태도였다.

“그건 안 알려줄 거예요. 뭐, 그래도 그렇게 칭찬해 주니 고맙네요.”

괜히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라크도 고생했어요.”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검붉은 머리카락 밑으로 살며시 걸린 미소가 새삼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값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수술 현장을 보지 못했더라면 흙먼지에 땀이 뒤엉킨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선명하게 뇌리에 스며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요르문이 라크시스를 불러냈다.

“라크. 자네 나 좀 보지.”

요르문의 표정이 어딘가 삐걱거렸다. 그것만으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심지어 라크시스까지 웬일로 조용히 요르문을 따라나섰다.

“어디 가요, 둘 다?”

“누님, 이 녀석이랑 대화만 하고 금방 돌아올게요.”

금방 오긴 할거고? 하지만 요르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라크시스를 끌고 갔다.

그렇게 결국 두 사람이 방을 나가버렸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아가 할 수 있는 건 잠든 환자의 상태를 계속해서 살피는 것뿐이었다.

* * *

“라크,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연락도 없이 늦었잖아. 저 남자는 뭐고, 왜 누님이 치료를 하고 있었던 건데.”

요르문은 당장이라도 라크시스를 벽에 밀칠 기세로 그를 바짝 몰아세우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예의 태연한 낯빛으로 조곤조곤 대답해 주었다.

“메이슨 비렌체를 말하는 건가? 너도 알다시피 시아의 일기장에 있던 광룡의 봉인과 관련이 있는 단서이지. 그녀는 의술사니까 다친 사람을 치료한 거고.”

“상황이 이해가 가도록 설명해. 그리고 의술사? 그건 또 뭐야.”

“네가 본 그대로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이야. 아까 옆에서 보조까지 했으면서 물어보나?”

인기척 하나도 없는 고택의 복도에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요르문은 라크시스가 보이는 날 선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가 어지간한 치유사 정도의 실력이 있는 건 온 제국민이 다 아네. 누님 힘들어하는 거 못 봤어?”

“웃기는군. 다시 말하지만 너와 시아는 진짜 친척도 아닌데 말이야.”

“라크!”

정이 들어야 한다면 가짜이긴 해도 친척이란 이름으로 묶인 자신과 시아가 가까워지는 것이 옳았다. 그간 그녀를 위해 술란에 유령 무역회사를 만들고 켈튼의 방계 신분과 작위까지 준비해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고.

하지만 지금의 라크시스는 뭐랄까.

‘아주 누님의 가족이라도 되는 양 구는데.’

실험체 취급을 하며 요르문의 연구실에 떠밀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예민하게 구는 게 영 아니꼬웠다. 세 달 전 누님이 처음 시간 여행을 했을 때 한밤중에 아르카나의 홍등가로 꼬여낸 것도, 그의 저택에 데려간 것도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라크시스는 그런 요르문의 심정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시아를 고생시키려고 한 건 아니야.”

달빛을 받은 파란 눈동자가 요르문을 똑바로 향했다. 요르문은 멈칫하고 말았다.

“…단지 그녀의 의술을 존중해 준 거지.”

“…자네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다. 라크시스의 입에서 튀어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말해. 누님이랑 뭘 한 거야.”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오히려 뭘 한 건 시아 그녀였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똑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와 그녀 사이에는 계획된 시간 여행과 준비해 둔 대책밖에 없었는데, 저 방 안에 앉아있는 시아와 달리 라크시스에게는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결국 말문을 돌리고 말았다.

“그보다 이런 걸 발견했는데.”

라크시스가 내민 건 죽은 올빼미였다. 메이슨의 연구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대마법사인 그는 단박에 알아차리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도 요르문의 인상이 구겨진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노든 대공이 저 남자를 죽이려 한 건가?”

노든의 대공이자 황제의 동생인 차탈 세페란테.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라크시스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보다 위에 선 존재.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신하이나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대 마법사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에겐 아주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고, 대공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다. 황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현 황제와는 달리 대공이 의회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황제의 편도 의회의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회는 그가 황제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의회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를 방증하듯 대공의 눈길은 항상 라크시스 옌을 향해있었다. 차탈 또한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대 마법사 주위의 변화를 대공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크시스는 더더욱 조심하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시아 켈튼의 존재는 절대로 현시대에 드러나선 안 되었기에.

“하여간. 도둑놈도 아니고 왜 자꾸 훔쳐보는 건데.”

더러워. 요르문은 죽은 올빼미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징그럽다는 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타인의 몸을 빌려 세상을 보는 건 마법사 차탈 세페란테의 특기였다. 그가 주로 애용하는 건 새. 이번 희생양은 죄 없는 올빼미였다.

“날 보던 건 아니었을 거야.”

“그 작자가? 설마.”

“아마 나와 같은 기척을 느끼고 먼저 움직인 걸 테지.”

마력을 갈무리하지도 않은 올빼미가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것을 보자마자 순간이동을 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땐 이미 연구실은 난장판이 되어있었고, 메이슨은 칼에 찔려 쓰러져 있었다. 목격할 수 있었던 건 사라져 가는 검은 코트의 실루엣뿐이었다.

“분명 강한 마법사였어. 메이슨 비렌체를 노린 자 말이야.”

“저기 끙끙대면서 누워있는 남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 마법사가 노리나?”

요르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메이슨 비렌체라는 이름도 이 소동 때문에 처음 들어보게 된 것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뭐가 그리 두려워 그렇게나 강한 마법사가 직접 죽이러 온단 말인가.

그것도 차탈의 시선까지 빼앗으면서.

“하지만 저 남자에겐 광룡의 봉인이 없는걸. 이미 마류 탐지기로 다 훑어봤는데 말이야.”

“글쎄.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나.”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일기장을 따라 광룡의 봉인만 찾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인 건지.

두 남자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침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