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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9)화 (19/292)
  • 19화 

    메이슨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동물의 직감이 불길함, 그 이상의 위험을 온 머리에 경고하고 있었다.

    역병 의사 마스크 불청객과 지나치게 어울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의 가면이었던 것처럼.

    “재, 재키 레이븐……!”

    “재키? 아아.”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레이디가 그랬었지. 재키 레이븐은 자신을 사칭하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살인마는 저를 죽이러 왔고.

    탐정은 탐정인가 보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이쪽이야말로 고맙지.”

    남자는 올빼미를 바닥에 던지고 피 묻은 손으로 마스크의 안쪽을 쑤셨다. 타버린 샤샤리아가 그의 손가락에 가차 없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이윽고 남자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가면이 적막 속에 바닥에 툭 떨어졌다.

    피 묻은 가죽 장갑의 끝이 반짝였다. 불청객이 찾고 있던 건 바로 이파리를 짓누르던 돌이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을까?”

    “나, 나머지라뇨…….”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발명이 잘 안 풀린다고 투정을 부릴 때, 파리스 맨틀러 교수가 뼈아픈 현실을 깨우쳐주며 대중적인 물건을 만들어보라 권했다.

    그녀도 연구비가 부족한 교수였다. 치유사에게 받은 것이라며 파리스가 건네준 한쪽이 깨진 마정석은 마치 심장을 닮아있었다.

    그걸 보고 무용수 오토마톤을 떠올렸던 것이다. 인생 조언을 해준 파리스를 생각하며, 그녀가 준 마정석을 오토마톤의 동력으로 썼다.

    ‘그리고 깨지고 남은 조각은…….’

    마스크 속에 샤샤리아 이파리를 고정하는 용도로 썼다. 치유사가 사용하던 마정석이니 괜히 몸에 좋을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어차피 크기가 작은 마정석은 공업용으로 쓸 수도 없었다.

    “그, 건 마정석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돌일 뿐이에요.”

    살인마를 목전에 둔 인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재키 레이븐은 포식자처럼 여유로웠다.

    검은 살인마가 메이슨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잔인하리만치 환한 미소였다.

    “나도 알아.”

    메이슨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수표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 설계도며 발명품은 살아만 있다면 다시 머리 밖으로 꺼낼 수 있으니까.

    “마정석이 필요하신 거면 모두 가져가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다 드릴게요, 제발…….”

    환하게 웃고 있던 재키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진다.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재키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나머지는 너도 모른다는 거구나.”

    하관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 않은 채 턱을 괸 재키가 말했다.

    “그럼 곤란한데. 목격자는 필요 없는걸.”

    텅 빈 살인마의 손에 예기가 번쩍였다. 죽는다. 메이슨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아아아아악―!”

    순식간이었다.

    몸을 뒤로 물렸을 땐 이미 잘린 셔츠 틈새로 피가 잔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쿵.

    메이슨은 피가 흥건한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작열하는 쓰라림에 경련하며 바닥에 엎어져 있으니 재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죽이려는 거야. 날 확실하게 죽이려는 거야.

    재키가 머리 위에서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미칠 듯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루지 못한 모든 것들, 막 잘 풀리려던 인생.

    온갖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도 죽음을 믿기가 싫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왜, 왜 내게.

    나한테 왜 이런 일이.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었다.

    “메이슨―!”

    가물거리는 정신을 비집고 들어온 건 재키의 단도도 단말마의 비명도 아니었다.

    “레이, ㄷ…….”

    로렌 허슬러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제 이름과 함께 메이슨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누님, 왜 이리 늦으셨나요! 제가 세 달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 왁!”

    요르문은 그답지 않게 응접실에 나와서 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밤은 요크 부인과 헤이든도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었다.

    “주, 주인님. 무슨 일이세……. 으악!”

    마류 이상 현상의 원인. 광룡의 봉인과 가장 밀접한 여자. 그 자체만으로도 요르문의 흥미를 동하게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통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망이라도 갔나 싶어 찾으러 가려던 순간.

    “아악! 아가씨!”

    시아 켈튼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났다.

    * * *

    “누님! 괜찮으세요? 이거 다 누님 피…….”

    “요르문. 환자가 누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해. 지금 당장.”

    “네? 아, 네, 네!”

    요르문은 급한 대로 응접실의 테이블과 소파를 이어붙여 침대를 만들었다. 헤이든은 피를 보고 까무러친 요크 부인을 부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토록 기다리던 누님은 옷이 피로 범벅이 된 낯선 남자와 나타나서는 누울 곳을 내놓으라 하질 않나. 고대 마법사씩이나 되는 녀석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건지.

    “누님은 괜찮은 거야?”

    “…시아는 괜찮아. 그보다 지금은 네 누님을 돕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새 시아는 가방을 열어 급히 도구들을 꺼냈다. 각종 의술 도구와 색색별로 빛나는 마정석, 호스들이 어떻게 그 가방 안에 다 들어있었냐는 듯 줄줄이 나왔다.

    “깨끗한 물을 떠 와요. 아무나 빨리요!”

    그 말에 요르문이 달려와 허공에 물을 만들어냈다. 오는 동안 급하게 거즈와 붕대로 지혈해 둔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끄흐, 흐, 윽, 아윽…….”

    “미스터 비렌체, 말하지 마요. 배에 힘도 주지 말고.”

    메이슨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지금 혹시 추워요?”

    “레이디, 아흑. 저 죽, 기 싫어, 요. 흐으윽.”

    아직까진 괜찮은가 보네. 가져온 마정석으로 혈액은 해결할 수 있겠어. 시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해 나갔다.

    “나쁜 마음 먹지 말고. 죽을 만큼 다친 거 아녜요. 날 믿어요. 내가 잘 치료해 줄 테니까.”

    메이슨의 셔츠를 모두 잘라내고, 우유 같은 빛이 감도는 마정석에 호스를 꽂고 그의 입에 물렸다. 간단한 주문을 외자 술식에 반응한 마정석의 흰빛이 연기로 변해 메이슨의 입으로 서서히 흘러들어 갔다.

    “누님, 더 도울 게 있나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곁에 있어. 손 깨끗이 씻은 다음에 여기 장갑부터 끼고.”

    그사이 상처를 다시 한번 세척하고 상태를 살폈다. 관통상이 아니라 내장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칼에 베인 상처라 단면이 깔끔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휴, 아까는 쇼크로 기절한 줄 알았네.

    겁을 잔뜩 먹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일단은 안심이다. 이대로 메이슨이 죽나 싶었는데. 가방에 든 건 응급처치용 의술 도구였다. 리볼버를 챙겨야만 했던 이번 시간 여행에서 시아는 자신이 다칠 극단적인 경우를 대비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의술원이 통째로 필요한 상황이 아님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시각 라크시스는 기묘한 행위를 벌이고 있는 시아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체 모를 약물을 메이슨에게 투여하고 팔목에 기다란 호스가 연결된 투명한 마정석을 연결했다. 어느새 메이슨은 잠에 빠진 것처럼 축 늘어진 상태였다.

    요르문이 만든 물에 손을 씻고 장갑을 끼고 상처를 소독한 후, 밀봉된 수술용 바늘을 꺼내 마치 황제의 옷감을 바느질하듯 길게 벌어진 상처를 정교하게 꿰매기 시작했다. 피가 흥건하던 응접실 테이블에서 붉은 증기가 피어오르며 팔목 혈관 호스와 이어진 투명한 마정석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응접실에 펼쳐진 봉합 수술은 꽤나 장관이었다.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는 건 시아의 숨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 수술을 진행하고 있는 손가락의 아주 섬세한 움직임뿐이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의술사는 물론이고 의사조차도 만날 일이 없는 고대 마법사였다. 여차하면 실력 좋은 치유사를 부르면 그만이었고, 라크시스 본인이 가진 방대한 마력으로 어지간한 부상은 자가 치유가 가능했다.

    의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무지했다. 갈리프도흐의 학장이면서 의학 교수인 파리스 맨틀러가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몰랐다.

    의술사는 이런 존재로군.

    수술에 집중한 그녀의 모습은 성자와도 같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고대 마법사로 태어나 평생을 가장 위대한 존재로만 살아왔기에 누군가를 향해 경외심은커녕 놀라움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하고 자만하며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겸손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알아서 고대 마법사를 추앙했고, 라크시스는 그런 호의를 자연스럽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시아 켈튼은 거침이 없었다. 쓰러진 메이슨 비렌체를 보자마자 제가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듯 곧바로 가방을 열고 냉각된 주머니에서 식염수와 거즈를 꺼내 상처를 씻고 지혈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위험한 공구와 흙먼지가 뒹구는 더러운 마룻바닥을 보곤 곧장 그에게 안전한 장소로 갈 것을 명령했다.

    남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오랜만이었지. 그의 눈에 비친 오롯한 열의는 라크시스에게 생경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엇이 그녀의 정신을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아는 다친 메이슨의 앞에서 마치 최전방의 지휘관처럼 보였다. 요르문도 꼼짝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고, 대마법사라는 수식이 붙은 두 명을 무려 보조로 곁에 세워둔 채 그녀는 그대로 환자에게 빠져들었으니까.

    중간중간 메이슨의 입에 물린 호스와 팔에 꽂힌 마정석을 확인하며 수식을 다시 외는 장면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치유사의 치료와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마법이 아닌, 오롯이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면 누구나 그럴 테지만 말이다.

    의술원에서의 어마어마한 수술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라크시스는 그렇게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는 시아 켈튼이란 여자를 무의식적으로 재평가하고 있었다.

    “됐어요, 다 끝났어요.”

    챙겨온 도구들로 해결할 수 있는 상처라 다행이었다. 팔에 꽂힌 혈액 정화 공급 마정석을 떼어내고, 입에 물려놨던 마취 마정석도 빼냈다. 높이가 애매한 응접실 테이블에 계속 쪼그리고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라크시스가 미동 없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으니까요. 가져온 마정석으로 봉합 부위 회복까지 될 것 같네요.”

    내 말이 안 믿기나.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건데. 문득 이 시대의 의학과는 거리가 먼 장면을 보여줬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응급처치라고 하기엔 너무 바리바리 싸 들고 오긴 했지. 설마 메이슨이 죽은 줄 아는 건 아니지?

    “마취가 풀릴 때까진 제가 있을 거예요. 이래 봬도 회복학 전공이라니…….”

    “아뇨. 당신 말입니다. 시아.”

    나?

    그제야 시아는 자신의 몰골이 처참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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