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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8)화 (18/292)
  • 18화 

    “조심히 들어가세요. 레이디.”

    “모레 아침이었죠? 글레이셜 홀에서 봬요.”

    무용수 오토마톤에 박힌 마정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의뢰와는 별개의 약속이었다.

    “아 참, 파상풍 주사도 그때 다시 맞아요.”

    “싫은데…….”

    “어허. 나중에 나뭇가지에 손이 찔려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어요?”

    “…아뇨.”

    몸만 컸지 아직 어리다니까. 주사가 무섭긴 한가 보다.

    어디선가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비행하는 그림자가 시선을 잡아끈다. 새삼 밤이 깊었음을 느꼈다.

    “미스터 비렌체. 우리 진짜 가요.”

    힘차게 팔을 흔드는 메이슨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천천히 거리로 걸어나갔다. 아르카나만큼은 아니어도 메이덜린 역시 수도의 일부답게 밤거리가 환했다.

    두 남녀는 나란히 가스등 밑을 걸었다. 닫힌 술집 문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리다 사라지고, 아주 간간이 삯마차 한두 대가 급히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메이덜린과 아르카나는 걸어서 다닐 만큼 가까운 동네가 아니다. 메이슨을 만나 경찰서와 연구실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뒤늦게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다리가 묵직했다. 축축 늘어지는 그녀의 걸음과 달리 라크시스의 구두 소리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일정했다.

    마법사는 뭐가 다른가. 문득 시아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 여행에서 마법으로 그의 저택 정원까지 공간이동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팔이 생각보다 단단했었지.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해왔다면 굳이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지금처럼 지친 기색 없이 멀쩡할 수가 있긴 하다.

    이쪽도 운동을 안 하는 건 아닌데. 매일같이 환자를 보려면 의술사도 체력이 상당히 필요했다. 그런데 같은 일을 겪고도 이렇게 몸 상태가 차이가 난다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밤이 깊었다. 몇 시쯤 됐으려나.

    요르문이 켈튼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이번 시간 여행에서도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까. 계획이 틀어져 연락도 없이 꽤 늦었으니, 요크 부인이나 헤이든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라크시스에게 이대로 걸어서 집에 가려는지 물어보려다, 문득 메이슨의 연구실에서 나오고 나서 그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말았다.

    오토마톤 이야기라도 할까 싶어 나란히 걷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밤바람에 요정 같은 은발이 흩날렸다. 달빛에 반짝이는 머리칼에 그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층 짙어지는 것 같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잘나긴 잘났어.’

    라크시스는 지난번에도 오늘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 무거운 순백의 예복보단 몸에 딱 맞는 셔츠와 베스트가 훨씬 어울리는 남자였다.

    “시아.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뇨.”

    괜히 기운이 쭉 빠진다. 그 후로 한참을 그와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어색하고 말고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순간이 왔다.

    ‘아르카나까지 걷는 건 무리야.’

    내가 먼저 스크롤을 쓰자고 해야겠다. 스크롤 따위 필요 없는 고대 마법사에게 스크롤을 권하는 상황이 웃기긴 했지만 공동묘지에서 경찰서, 메이슨의 연구실까지의 여정이 이미 몸을 상당히 좀먹은 상태였다.

    가방에서 스크롤 두 개를 꺼낸 후, 하나를 옆에 있는 라크시스에게 건넸다.

    “라크. 삯마차도 없는 시간인데 스크롤을 쓰는 건 어때요?”

    그런데 옆에 기척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그 잠깐 사이에 라크시스가 저 뒤 도보 한복판에 우뚝 서있었다.

    “라크. 거기 서서 뭐 해요?”

    그의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대체 뭘 보는 건데?

    그를 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하늘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라크시스의 표정은 사뭇 날카로웠다.

    “…시아.”

    “왜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불길하고도 기묘한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오싹한 가운데, 라크시스가 갑자기 멈춰 선 이유가 이 미묘한 공기와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천천히 시아를 향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고대 마법사의 발밑에 둥근 원을 그리며 푸른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것이 순간이동을 위한 것임을 직감하고 말았다.

    이건 켈튼 저택으로 가는 게 아니다. 한껏 구겨진 라크시스의 미간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요?”

    시아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자 잡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단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실크햇을 또 한 번 그녀의 머리 위에 씌운다.

    모자챙에 시야가 가려지기 직전, 시아는 깊게 가라앉은 라크시스의 눈동자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발명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군요.”

    【 살인마의 사칭범과 까마귀 가면 】

    “내 생에 이런 날도 다 있구나.”

    두 의뢰인의 뒷모습이 대로로 향하는 블록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메이슨은 이내 천천히 손을 내렸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었을 텐데. 낮에는 연구실에 처박혀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고 밤에는 파리스 교수에게 부탁받은 시신들을 묻어주러 가는, 그런 일상. 부패한 시신에서 나오는 악취와 시체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샤샤리아를 양껏 담은 가면을 쓰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만남이었지. 탐정이란 족속이 의뢰를 달성하기 위해 스토킹이나 주택 침입 등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레이디가 시체들과 함께 흙바닥에 몸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애초에 평범하게 발명 의뢰를 하러 온 건 아니었을 거야. 어쩌면 재키 레이븐을 추적하는 경찰에 협력하던 탐정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졌다. 하지만 울적한 기분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빳빳한 수표의 질감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미스 로렌 허슬러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칭찬이 단순히 메이슨 본인을 위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은 알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메이슨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으니까.

    ‘레이디의 정체가 뭘까.’

    귀족 영애가 의사인 경우는 드물다. 사설탐정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마법사의 일종인 치유사라면 모를까, 의사나 탐정은 자수나 놓는 묘령의 귀족 여인이 갖기 어려운 직업이었다.

    그런 면에서 메이슨은 파리스 맨틀러 교수를 존경했다. 그녀는 의사라는 꿈을 위해 일찌감치 본가와의 연을 끊고 서대륙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었고, 본인의 힘으로 갈리프도흐의 교수까지 된 사람이었다.

    로렌 허슬러는 그런 파리스 교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메이슨은 로렌 허슬러 곁에 있던 고대 마법사를 떠올렸다. 참 기묘한 조합이다. 라크시스 옌은 고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염문설 하나 없는 사내였다. 결벽증이라나 뭐라나. 제 잘난 맛에 살아서 어지간한 여자로는 성에 안 찬다는 소문도 있고.

    로렌 허슬러는 그런 남자를 대동하여 친히 의뢰까지 넣게 만든 여자였다. 황성의 연회가 아니면 참석조차 안 할 것 같은, 고급지고 까탈스러운 이미지의 그 고대 마법사의 벽을 뚫은 여인.

    로렌 허슬러를 흔한 아가씨가 아닌 진짜 레이디로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는 메이슨이 파리스 맨틀러 교수를 제외하고 귀족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던 탓도 컸다.

    마법사가 아닌 메이슨에게 있어 괴팍한 골방 학자의 기질을 이해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그 고고하신 고대 마법사가 제 연구를 위해 썩은 물이 고인 내러 지구의 시궁창에도 기꺼이 발걸음을 한다는 것을 알면, 지금 같은 오해를 하진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다니는 것이고, 그간 고대 마법사가 대외적으로 보여왔던 태도로 인해 라크시스를 재수 없는 이미지로 생각한다는 걸 메이슨 본인은 까맣게 몰랐다.

    물론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다만 생전 처음 호감을 느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메이슨에게 묘한 불쾌함을 주었다.

    심지어 메이슨은 그 불쾌함의 정확한 원인조차 몰랐다. 오만하게 백지 수표를 건네던, 고귀함 그 자체인 고대 마법사가 아주 조금 재수 없게 느껴졌다는 것뿐.

    그래도 두 사람은 연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기껏해야 오래 알고 지내 친밀한 의뢰인과 고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제아무리 지성을 갖춘 귀족 영애래도 그 잘난 고대 마법사의 눈에 찰 리가.

    메이슨 본인도 발명에 몰두하느라 연애 한 번 못하고 살아온 건 생각도 못 한 듯했지만 말이다.

    난 연애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내 발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파리스 맨틀러 교수님 같은 분이 또 있다면 그땐.

    “그때는? 참, 나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메이슨은 텅 빈 거리를 보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일단은 의뢰를 완수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대 마법사는 백지 수표로 기계 의수 제작에 들어가는 모든 돈을 청구하라 했다. 완성되면 추가금을 얹어줄 것이고, 특허 또한 메이슨 비렌체의 이름으로 낼 수 있도록 했다.

    의뢰품에 대한 독점 거래 조항. 라크시스 옌이 요구한 유일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대 마법사도 꽤 좋은 사람 같고. 어쩌면 소문과 달리 괜찮은 성격일 수도 있지.

    메이슨은 싱글벙글하며 뒤를 돌았다. 연구실로 돌아갈 때였다.

    그러나 열린 연구실 문 너머에 있는 건.

    “안녕?”

    차분하기에 도리어 소름 돋는 목소리와.

    책상이며 모든 기물들이 엎어져 난장판이 된 연구실 한가운데 서있는 불청객이었다.

    * * *

    온통 새까만 남자였다. 코트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손목마저 감추려는 듯 새까만 가죽 장갑과 검은 셔츠 소매가 남자의 피부를 빈틈없이 막고 있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부분은 검은 가면 밑으로 드러난 고아한 하관과 실크햇 밑으로 흘러내린 백금발이었다.

    “누, 누구…….”

    불청객은 주인을 아랑곳 않고 사방에 날리는 설계도를 들춰보고 있었다. 남자는 분명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메이슨은 뒤늦게 남자의 손에 목 졸린 올빼미가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죽 장갑에서 떨어진 새의 피가 바닥에 뚝뚝 고여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엉망이 된 연구실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던 역병 의사 마스크를 주워 들었다. 안을 살펴보는 불청객의 얼굴이 까마귀를 닮은 기괴한 가면과 맞물린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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