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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7)화 (17/292)

17화 

“음,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아주 복잡하고 단단한 금고의 열쇠가 한낱 작고 허술한 쇠막대에 불과한 거죠.”

그런 열쇠가 아홉 개 있었던 거고요.

“그 말은, 라크에게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봉인의 마력이 미미한 수준이라는 건가요?”

“제가 느끼기엔 그렇다는 건데. 어쨌든 제가 한 봉인이 아니니 잘 모르겠군요. 원래 이렇게 허술한 건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약해진 건지.”

라크시스가 설계도를 훑다 말고 선 채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가벼운 코트 차림만으로 분위기를 내고 있는 길쭉한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그의 말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라크, 고대 마법사라면서요.”

“네. 그렇습니다만.”

“광룡의 심장을 봉인한 게 당신이 아니라고요?”

라크시스는 여전히 태연했다.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턱을 괸 손은 그대로 둔 채 시아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말하자면 길어서. 일단 전 그 아홉 명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거라고만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전해지는 이야기에선 신의 사도라 불리던 고대 마법사 아홉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광룡의 심장을 봉인했다고 했지. 희생의 의미가 죽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이렇게 눈앞에 멀쩡히 있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지금의 라크시스에겐 뭘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원체 비밀도 많은 사람이었고. 후대에 알려진 이미지와도 많이 달랐으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아는 말없이 라크시스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설계도를 보면서 마정석이 들어갈 만한 기계를 골라주면 그가 확인하는 식이었다. 마정석이 보관된 부품 창고도 일일이 들여다봤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메이슨의 연구실을 거의 다 둘러본 후 라크시스가 말했다.

“강한 마력을 이용하는 물건은 없군요.”

메이슨은 멋쩍게 웃었다.

“마정석은 비싸니까요. 제가 마법사였다면 더 성능이 높은 기계들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요.”

하얀 마법사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마법사가 여자에게 무어라고 속삭인다. 마치 그녀보고 결정을 내리라는 것처럼.

메이슨은 시시각각 변하는 로렌 허슬러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초조했다.

지금껏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특허를 내도 써주는 곳이 없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의뢰와 장의사 일로 겨우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던 차에, 고대 마법사를 대동한 레이디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손님이었다.

공동묘지에 누워 총을 들고 의뢰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알 게 뭔가. 레이디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 시간 넘게 제 발명품들을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심지어 라크시스 옌과 똑같은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있으니 메이슨은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레이디. 마음에 드는 게 없으셨나요? 구체적으로 말씀 주시면 구상해 보도록 할게요.”

이런. 메이슨이 생각보다 기대가 컸던 것 같은데.

메이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시아가 그냥 가버릴까 봐 겁내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탐정도 아니고 의뢰를 넣으려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선 광룡의 봉인에 대해선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지.

헛발을 짚었다.

내가 공동묘지에서 눈을 뜬 건 정말로 우연에 불과했던 거였나.

내내 고생한 라크시스에겐 미안하지만, 다음 장소에서 봉인의 흔적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글레이셜 홀이었나.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다음으로 갔던 곳이.’

그때 라크시스의 시선이 한 설계도에 머물렀다.

“이건 완성 표시가 되어있는데. 여기서 실물을 본 기억이 없군.”

뭔데? 라크시스의 기다란 손가락이 설계도 하나를 짚고 있었다. 근처에서 기웃거리자 라크시스가 슬쩍 어깨를 비켜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메이슨이 당황하는 게 아닌가.

“그건 시중에 있는 오토마톤을 개조한 것뿐이라. 고대 마법사께서 궁금해하실 줄은 몰랐는데…….”

사람을 똑 닮은 인형이었다.

이 시대엔 오토마톤이라는 장난감 인형이 유행했다. 스스로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그림까지 그리는, 그러나 딱 그 정도의 신기함을 가진 태엽 인형.

부유한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 집에 놓아두었다고 하지. 시아는 설계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얇은 망사가 겹겹이 달린 흰 치마가 눈에 띈다. 복잡한 태엽이 가득한 내부와는 달리 외관은 완벽한 무용수 그 자체였다.

도면에 있는 그림마저 아름다웠다. 공기처럼 가볍게 뛰어오르고 턴을 돌 수 있는 인형은 지금 당장 무대에 주역으로 올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아와 라크시스가 설계도에서 발견한 것은 심장 위치에 박혀있는 하트 형태의 마정석이었다.

메이슨은 그걸 몰랐다.

“미스터 비렌체.”

시아의 나직한 부름에 메이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맞아요. 레이디. 제가 속물 같아 보이시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엥?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제가 만든 발명품은 거들떠도 안 보시죠. 당연해요. 그들이 고용한 마법사는 제 기계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회색 더벅머리의 순박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자기 비하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빨리 말할 수도 있었나.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듣고 있었다.

“오토마톤도 결국은 눈요깃거리 아니겠어요? 맨틀러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떻게든 일단 유명해져야 사람들이 제 발명품에도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요.”

“…미스터 비렌체.”

“그래서 만든 거예요. 팔릴 만한 물건, 귀족들이 사랑할 만한 물건. 그들은 절 오토마톤 장인이라 생각하겠죠.”

발명가가 아니라. 메이슨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미스터 비렌체. 전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다.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나. 그간 마음고생이 퍽 심했던 모양이다. 괜히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어.

메이슨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들었다. 맞닿은 손에 빨개진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오토마톤에는 관심도 없고요.”

“…레이디.”

“당신의 발명품은 먼 미래에 빛을 발할 거예요. 사람들은 당신 덕분에 문명을 다시 한번 누리게 되고요.”

메이슨의 심장이 뚝 멈췄다. 다들 돈도 안 되는 일에 매달리지 말라고만 했지. 그래서 발명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사람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 발명에 대한 욕구는 그에게 본능과도 같았다.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건 파리스 맨틀러 교수 다음으로, 눈앞의 로렌 허슬러가 처음이었다.

“레이디. 당신은 대체…….”

“워워, 울지 말고.”

메이슨을 다독이며 라크시스를 흘끔 쳐다봤다. 워, 표정이 왜 저리 딱딱하담. 미래에서 왔다는 직접적인 말은 안 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나, 라크시스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오토마톤에 대해 물어봤던 건 순전히 제 의뢰 때문이었으니까요.”

내 손 안에 담긴 메이슨의 거친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이 오토마톤은 지금 어디 있나요?”

이윽고 꾹 다문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글레이셜 홀에요.”

* * *

“레이디. 제가 조만간 파리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마련해서 연락드릴게요.”

“아, 예…….”

“어차피 기계 의수를 완성하려면 교수님 도움이 필요한걸요. 무엇보다 교수님은 레이디 같은 분을 좋아하시니까요.”

그, 의술사셨나. 여튼요.

사람이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나. 메이슨은 만난 이래 가장 밝고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가로등만 겨우 남은 새까만 밤에도 건실한 치아가 다 보일 정도였다.

결국 의뢰를 하긴 했다. 의뢰 내용은 아까 봤던 대체 신체 기계의 완성과 독점 계약. 의뢰를 하러 온 탐정 역할극을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도 묘하게 어울려 주고 있고 말이지.’

연구실 입구에서 의뢰인 둘을 신나게 배웅하고 있는 메이슨의 손엔 새하얀 종이가 들려있었다.

황립 모르간 중앙은행이라는 글자가 떡하니 박힌 백지 수표. 라크시스 옌의 이름으로 달아놓은 의뢰비였다.

백지 수표라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천 년 넘게 살아왔다는 라크시스는 쌓인 재산도 많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돈을 모았냐는 물음에, 숨 쉬고 살다 보니 어느새 모여있었다고만 대답할 뿐이다.

진짜 부럽네. 질투 아닌 질투를 조금 하고 있었는데, 라크시스는 그새 어디선가 나타난 수표를 들고 메이슨에게 내밀었다.

‘라크, 이런 게 어딨어요?’

‘미스 로렌 허슬러. 당신이 맡은 임무는 발명가 미스터 비렌체를 찾는 것까지, 아닌가요?’

요약하자면, 라크시스는 사설탐정인 로렌 허슬러를 고용해서 발명가 한 명을 찾아낸다는 설정에 충실하겠다고 한 거다. 그러니 본인이 돈을 낸다는 것이고.

‘투자하는 셈 칠 겁니다.’

‘뭘 믿고 투자해요?’

어차피 광룡의 부활을 막지 못하면 헛수고가 될 터였다. 마도 시대가 막을 내리면 의뢰품 제작에 들어가는 마정석 수급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라크시스의 말은 가관이었다.

‘당신을 믿으니까요.’

미리 알게 된 복권 번호쯤이라 생각한 걸까. 내가 메이슨의 대체 신체 기계를 극찬한 걸 보고, 미래엔 이게 잘 팔리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잘 팔리려면 마도 시대가 끝나선 안 된다.

광룡이 부활해선 안 된다는 거다.

“그런데 기계 의수 말고 좀 더 괜찮은 이름은 없을까요?”

수표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던 메이슨에게 물었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재깍 대답했다.

“새 이름을 원하시면 열심히 생각해서 만들어올게요!”

“아니 뭐 굳이 그렇게까지는…….”

백지 수표에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그였다. 지금 보니 꾀죄죄한 몰골에 비해 얼굴이 앳돼 보인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말투며 태도가 이해가 갔다. 생각보다 어리구나.

그는 정말로 발명을 좋아하는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수표를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건가요?”

“몇 번을 물어보나요. 당신 의뢰비라니까. 자꾸 그러시면 제가 도로 가져가요?”

“아, 아녜요. 다시는 수표 얘기 안 할게요.”

거금의 의뢰가 낯설긴 한가 보다. 메이슨은 행여 잃어버릴세라 수표를 꼭꼭 접어 주머니에 깊이 찔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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