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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화 (15/292)

15화 

“미스 허슬러. 탐정이 아니라 의사입니까?”

“…정확히는 탐정 겸 의술사죠.”

의사면 의사고 치유사면 치유사지, 의술사는 뭐람. 슈나이더는 와중에 그녀가 환자를 보는 손놀림이 능숙한 걸 알아차렸다.

수년간 환자를 치료하던 사람이 분명하다. 눈썰미 좋은 슈나이더는 곧 그녀의 치료 방법이 제국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뭐, 어디 서대륙에서 오신 분입니까?”

그러자 여자가 뒤편에 앉아있던 고대 마법사를 흘끔 봤다. 라크시스가 허락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로렌 허슬러는 애매하게 대답해 왔다.

“…술란에서 왔어요. 제국 최남단의 항구 도시요.”

“그쪽에선 의사를 의술사라고 부릅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이내 로렌 허슬러가 주사 놓기를 포기하고 주사기를 분해해 챙겨왔던 천에 감아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러더니 가방 속에서 벨벳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열린 입구 사이로 은은한 녹색 빛이 감도는 마정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치유술도 하는 의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그 광경을 본 라크시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마정석이라니. 광룡의 부활 이후에도 지르가나의 마정석 광산은 무사한 것인가.

주사로부터 해방된 메이슨이 억울하단 눈으로 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럼 처음부터 그걸로 치료해 주셨으면…….”

“마정석이 얼마나 비싼데요.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마정석은 이게 전부란 말이에요.”

그리고 저, 주사 놓는 거 아직 포기 안 했어요. 그 말에 메이슨이 울상이 됐다.

지금껏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다가왔다. 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로렌. 우리가 만나기로 한 이유가 있었잖아요.”

은근한 음성에 순간 놀라서 마정석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 남자는 걸핏하면 속삭인단 말이야. 라크시스를 흘겨보자 그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곤 쿡쿡 웃었다.

저거 분명 일부러 그런 거다.

“굳이 귓속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미안해요. 워낙 잘 놀라니까 반응이 재밌어서 그만.”

갑자기 끼어든 고대 마법사에 슈나이더가 어리둥절해진 사이, 라크시스가 슈나이더의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아선 다리를 길게 꼬았다.

“슈나이더 경사였던가요?”

“아, 예. 고대 마법사님.”

“저와 여기 있는 미스 허슬러는 발명가 미스터 메이슨 비렌체에게 의뢰할 것이 있어 찾아다니던 중이었습니다만.”

의뢰를 위해 찾아다녀? 그런 식으로? 묘지에서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는 슈나이더는 차마 고대 마법사의 말을 끊을 수 없어 입을 닫았다.

“보시다시피 미스터 비렌체가 워낙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라. 이렇게 해서라도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독특하다뇨! 전 발명 의뢰라면 언제든, 읍!”

항변하던 메이슨의 입술이 라크시스의 손짓 한 번에 본드로 붙인 것처럼 달라붙어 버렸다.

메이슨이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시아는 그의 입이 다물린 것을 고소하게 생각했다.

“미스 허슬러가 기막힌 방법을 생각해 준 덕분이죠. 어쨌든 저희는 의뢰 때문에 미스터 비렌체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크시스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슈나이더는 고대 마법사가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기분이 확 상했다. 모르간 광역 경찰청이 설립된 이래 수사권은 오롯이 경찰의 소유였다. 신분도 계급도 법이 보장한 권리를 건드려선 안 된다. 자부심 하나로 일해왔던 슈나이더는 용의자를 멋대로 빼내 가려는 라크시스가 너무나도 고깝게 보였다.

슈나이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고대 마법사이시더라도 이렇게 살인 용의자를 멋대로 데려가실 수는…….”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라크시스가 내민 건 황제의 서명이 있는 특별 수사 허가권과 면책 특권 증명서였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랑 맞먹을 수 있는 존재, 아니 엄밀히 따지면 황제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눈앞의 이 마법사라는 것을.

보란 듯이 합법적인 수단까지 내미는 데 한낱 경찰이 무슨 수로 그를 막겠는가.

그나저나 아까까지만 해도 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슈나이더는 차마 라크시스의 코트 소맷자락을 기웃거리지 못하곤, 우울하게 대답했다.

“대신 가실 때 서류 하나만 작성해 주고 가시죠.”

“물론이죠.”

하얀 마법사가 미소 지었다. 슈나이더는 왠지 속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아까 그거 진짜예요?”

“뭘 말입니까?”

“그, 수사권이랑 면책 특권이요.”

메이슨을 앞장서게 하고 시아와 라크시스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지금 세 사람은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의 연구실로 가는 중이었다.

“물론이죠. 전 거짓말은 안 해요.”

요르문의 친척 누나라던 누구와 다르게 말이죠. 라크시스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짐짓 모르는 체했다.

지금 일부러 약 올리는 거지? 천 년을 넘게 살면 능구렁이 그 자체가 되는가 보다. 잘생겨서 봐줄 만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얄미워 보였다.

“저도 친척 누나라는 말 빼곤 거짓말한 거 없거든요.”

“흠. 이래서 사람이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나 봅니다.”

저 인간이.

“당신, 지금 엄청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진실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외로운 법이죠.”

라크시스는 투덜거리는 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종알종알 혼잣말을 하는데, 내용이야 뻔하지.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욕하는 정수리를 보니까 피식 웃음이 났다. 조금 더 놀려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메이덜린은 확실히 아르카나와 달랐다. 중하층민 주택가가 많고 상대적으로 소박한 분위기의 거리엔 한밤중에도 뚜렷한 공장 그림자가 가득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도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연기 잘하던데요. 미스 로렌 허슬러.”

와중에 로렌이라고 착실하게 불러주네. 급조한 설정에도 라크시스는 금방 눈치채고 동조해 줬다.

내 원래 계획엔 슈나이더 경사가 없었다.

일기장에 따르면 난 묘지에서 하반신이 살짝 묻힌 채 눈을 뜨게 되고, 역병 의사 마스크를 쓴 살인마가 코앞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살아, 있었네?]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저항하는 대신 마스크의 뾰족한 부리 부분을 냅다 잡아당겼다.

벗겨지려는 마스크를 붙잡으려던 남자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자 그의 눈에 흙을 뿌리고 그가 놓친 삽으로 마구 때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도와줄 사람이 전무한 상황에서 용케 살아남아 도망쳐 겨우 경찰서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만일을 대비해 총을 준비했다. 살인마를 붙잡아 함께 신문해 줄 라크시스도 준비했다.

시간 여행으로 도착하게 되는 장소는 광룡의 봉인과 관련이 있다 했으니. 그 장소에서 맞닥뜨린 살인마도 분명 단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순찰을 돌던 슈나이더 경사는 그녀가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떠올랐을 뿐이에요. 마침 총도 들고 있어서.”

“지어낸 것치곤 이름이 그럴싸한데요. 혹시 준비라도 했어요? 슈나이더 경사를 만난다는 내용은 일기장에서 못 봤는데.”

그럴싸하긴 하겠지. 진짜 미스 로렌 허슬러는 칠십 년 후, 게으른 요르문 님을 대신해 의회의 보좌관실에 앉아있는 실존 인물이니 말이야.

“라크야말로 준비한 거 아녜요? 어떻게 사설탐정이라는 한마디에 의뢰니 뭐니 하는 설정이 줄줄 나와요?”

그때 앞서가던 메이슨이 갑자기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미스터 비렌체.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요.”

라크시스가 잔소리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메이슨이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이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디, 탐정이 아니셨던 거예요? 의뢰하겠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나요?”

뭐야, 다 듣고 있었어? 한참 앞에서 가더니만 귀도 밝지.

천재라고 해서 언제나 잘 풀리는 건 아니다. 후대에 비운의 천재 발명가라 불리는 이 남자는 생전에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지.

내 거짓말로나마 발명을 인정받았다고 느꼈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마는.

경찰서에서 징징거리던 메이슨의 전적은 후대에 전해진 가슴 아픈 생애를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저 탐정 맞으니까 길 안내나 제대로 해주세요.”

“미스터 비렌체. 길 안내나 똑바로 하죠.”

시아와 라크시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라크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럴 땐 마음이 잘 통하는군.

두 사람의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메이슨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대로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 * *

“여기예요.”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 어느 건물 뒷문을 열고 들어간 메이슨은 그들을 창고처럼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메이슨이 수줍게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본 건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사면의 벽을 가득 채운 종이마다 온갖 발명품의 도안이 빼곡했다. 갈리프콜을 태우는 화로에서 연통이 천장을 따라 밖으로 이어진다.

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자그마한 유선형 비행선 모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정석 없이도 하늘을 나는 방법을 고안해낸 발명가를 실제로 만난 건 아주 짜릿하고 기이한 경험이었다.

“…진짜 발명가로군요.”

“절 보자마자 발명가라고 해주신 건 정말로 레이디가 처음이에요.”

“분명, 저 비행선은 하늘을 날게 될 거예요. 그거 하나는 장담하죠, 미스터 비렌체.”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하지만 저건 그냥 생각나서 만들어 본 거구요.”

그러면서 메이슨은 한쪽 벽을 가리켰다.

사람의 인체를 상세히 분석해 그린 수십 장의 그림 사이로, 신체의 각 부위를 닮은 기계의 설계도가 있었다.

“제가 만들고 싶은 건 바로 이거예요.”

의족, 의수, 나아가 신체의 각 부위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였다.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완전한 대체품.

불현듯 원래 시대에서 벌어지던 서대륙 전쟁이 생각났다. 사지를 잃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시아가 알고 있던 의족과 의수는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전부였다. 만약 그들에게 다시 한번 건강한 몸을 되찾아줄 수 있다면. 재활에 성공한 환자를 보는 것만큼 의술사로서 보람찬 일도 없겠지.

메이슨의 발명품은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었다.

“…이거, 완성품인가요?”

“아뇨. 샘플도 겨우 만들었는걸요. 아직 문제점이 많아요.”

“미스터 비렌체. 이 기계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게 된다면 당신은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구하게 될 거예요.”

칭찬이라 생각했는지 메이슨이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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