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하지만 의회의 귀족들도 결국 모르간의 시민이었다. 그들 역시 감당되지 않는 수도의 치안 문제를 억지로 버텨내고 있었다.
참다못한 한 의원이 총리 리암 블레어에게 정치와 완전히 분리된 수사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리암이 의회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3507년, 황립 모르간 광역 경찰청이 창설된다.
독립된 수사 및 치안 기관의 위력은 대단했다. 법이 보장해 주는 권력은 시민에게 의지할 기둥이 되었으며, 동시에 범죄자가 활개 치지 못하는 그물이 되었다.
‘경찰 하길 잘했지.’
슈나이더는 변변찮은 집안의 차남이었다. 집과 가게를 큰형이 물려받을 것이 뻔해 그나마 똑똑한 머리와 체격으로 경찰 시험을 봤다.
반항을 포기하고 진이 빠져 유치장 벽에 기대있는 시체 도굴꾼을 바라보았다. 슈나이더는 경찰이 되지 않았더라면 저 자리에 자신이 들어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암, 도굴꾼보단 도굴꾼 잡는 사람이 낫지. 공장 직공보다도 낫고. 그렇게 다시 한번 자부심을 끌어 올리며 슈나이더는 서류 더미에 파묻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밤 열 시가 다 되어갔다. 어느새 경찰서는 썰렁해져 있었고, 같이 당직을 서는 헨리과 해밀턴만 근처 책상에 앉아있었다.
신입은 뭐 하나. 일 잘하고 있나? 헨리의 책상을 흘끔 쳐다봤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녀석의 머리가 갑자기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 자식, 감히 졸아? 괘씸한 마음에 헨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얀마, 한 게 뭐가 있다고 졸아.”
“스읍……. 헙, 슈나이더 경사님.”
슈나이더는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헨리를 내려다보았다. 잘생긴 놈은 졸다 깨도 잘생겼네. 팔짱 낀 팔이 제 불뚝한 배에 걸리는 기분이 새삼 불쾌했다. 그래서 한 대 더 때렸다.
“악!”
“해밀턴 경장이랑 순찰 돌고 올 거니까 거기 명부 빨리 깨끗하게 옮겨 적어.”
“예, 예!”
“어이, 해밀턴 경장! 나가자고.”
그런데 대답이 없다.
뭐야, 이놈도 졸아? 도대체 다들 여기가 직장이라는 생각은 있는 거냐고. 낙하산으로 들어온 부잣집 한량 막내인 해밀턴은 언제나 설렁설렁했다. 그 꼴이 아니꼬워 해밀턴의 뒤통수는 두 번 때렸다.
잠결에 비척거리는 해밀턴의 멱살을 끌고 경찰서를 나섰다. 경찰봉과 리볼버가 양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렸는지 습관적으로 확인을 하곤 본격적으로 순찰을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메이덜린의 거리는 낮과 사뭇 다르다. 아르카나는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다는데.
처음 발령받을 때 내심 아르카나로 가길 바랐었다. 수도 중심부의 아르카나는 마도 문명의 절정 그 자체였다. 환락가조차 마정석으로 불을 켜고 물을 끓인다지.
지방에서 올라온 슈나이더는 아르카나 생활이 내심 부러웠으나, 얼마 안 가 그 생각을 싹 바꾸게 된다.
“경사님, 얼마 전에 제 친구가 아르카나에서 술을 마셨는데 글쎄 맞은편 테이블에서…….”
또 술 취한 놈들끼리 시비가 붙었다는 얘기겠지.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사건 사고도 많다. 매일같이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해밀턴 경장 때문에 슈나이더는 공장 밀집 지대인 이 조용한 동네를 사랑할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떠들고 경계나 살펴.”
“옙.”
그렇게 메이덜린 주택가를 다 지나쳐갈 즈음이었다.
“경사님, 슈나이더 경사님!”
해밀턴 경장이 덩치에 안 맞게 속살거렸다.
“아니,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개미만 한 소리로 부르나?”
좀 더 잘 들리게 부를 순 없어? 그렇게 다그치려는 데 해밀턴이 이상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공동묘지를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저기요, 그, 그그…….”
“뭔데?”
해밀턴이 보고 있던 건, 어둠 속에서 삽을 든 채 서있는 기괴한 실루엣이었다.
새까만 중절모 밑의 길쭉한 부리의 마스크. 과거 역병 의사가 썼다고 하는 까마귀 모양이었다.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는 건 반쯤 묻힌 시체였다. 멀리서 봐도 젊은 여자다. 아직 깨끗한 걸로 봐선 죽은 지 얼마 안 됐다.
묻을 생각이 없는지 이젠 쪼그려 앉아 죽은 여자의 얼굴을 관찰하곤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기까지 했다.
‘재키 레이븐!’
불현듯 떠오른 이름에 슈나이더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래, 레이븐이 까마귀지. 젊은 여자만 노리는 변태 자식. 한밤중에 묘지에서 서성이면 다 도굴꾼인 줄 알겠지만 나, 슈나이더 경사는 다르다.
오만한 건지 모자란 건지. 대놓고 정체를 드러낼 만한 가면까지 썼으니. 됐고, 넌 오늘 내 손에 잡힌다.
“재, 재키 레이븐 맞죠?”
“네가 봐도 그래 보이냐?”
해밀턴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죠?”
“좀 조용히 해! 다 듣겠다!”
아까 해밀턴에게 속살거린다고 호통쳤던 건 까맣게 잊은 슈나이더가 말했다.
“어떡하긴, 체포해야지!”
“여자는 어떻게 해요?”
“안됐지만 저 여자는 이미 죽었어. 일단 재키 레이븐이 저항할 수 없도록 포위부터 하자고.”
묘지 뒷문 알지? 넌 그쪽으로 돌아서 와.
해밀턴 경장과 수신호까지 다 맞춘 슈나이더는 해밀턴이 반대편에서 나타날 때까지 재키 레이븐을 관찰하고 있었다.
찰칵.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조용히 장전하고 몸을 숨긴 채 지켜보는데 놈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
안절부절못하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게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설마 편지를 두고 온 거냐?’
자신의 살인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놈의 성격상 그럴 수도 있었다. 완전 미친놈이군.
그렇다면 놈이 자리를 뜰 수도 있었다. 총구를 놈에게 겨누고 침을 꿀꺽 삼키며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는데.
“그대로 멈춰. 움직이면 쏜다.”
시체였던 여자가 갑자기 리볼버를 꺼내 들어 재키 놈에게 겨누는 게 아닌가!
‘뭐야……?’
당황한 재키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 순간.
“컥!”
놈의 뒤에 홀연히 나타난 은발의 마법사가 바닥에 있던 삽으로 재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재키는 뾰족한 마스크를 흙에 박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슈나이더와 막 묘지를 돌아 뒷문으로 들어선 해밀턴은 어이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당신이 진짜 메이슨 비렌체 맞아요?”
“제가 벌써 그렇게 유명합니까?”
무슨 헛소리야. 시아는 남자의 팔뚝을 붙잡은 채 어깨 밑 근육 부위를 소독솜으로 문질렀다.
“아닐걸요.”
“그렇다면 유명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죠?”
“언젠간 그렇게 될 거란 뜻인데요. 지금은 아니라고요.”
시아가 냉정하게 말하거나 말거나 회색 더벅머리의 남자, 메이슨 비렌체는 한 손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순박한 낯으로 헤실거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슈나이더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디가 누구시라고요?”
“…로렌 허슬러. 사설탐정이에요.”
본인을 탐정이라 소개한 여자는 여기가 경찰서라는 것도 잊은 듯 보였다. 검붉은 머리를 질끈 묶고는 아까부터 재키 레이븐, 아니 메이슨 비렌체라는 남자를 치료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요, 미스 허슬러. 그래서 진짜 저 남자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은 게 확실합니까?”
“경사님! 전 장의사라고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전 재키 레이븐이 아니라니까요.”
“당신은 용의자야. 조용히 좀 있어!”
“잠깐, 장의사라고요? 발명가 아니었어요?”
“발명도 하고 장의사 일도 하는데요. 물론 발명 쪽이 본업이지만요. 그런데 절 발명가로 알아보신 분은 레이디가 처음…….”
“어허, 딴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진술해!”
“전 억울해요! 해부됐던 시신을 묻어주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미스터 비렌체, 주사 좀 놓게 가만히 있어요!”
아주 난장판이군. 라크시스는 슈나이더와 메이슨, 시아가 벌이는 촌극을 멀찍이서 남 일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고대 마법사님. 차를 좀 드릴까요?”
헨리가 쭈뼛거리며 라크시스에게 차를 권했다.
분명 순찰만 돌다 오신다던 경사님이 갑자기 재키 레이븐이라며 사람을 끌고 오시더니, 웬 탐정이랑 고대 마법사까지 데려와 한밤중에 이 난리가 나버린 것이다.
선배 해밀턴 경장은 진작 줄행랑치고 없었다. 지금은 슈나이더에게 말을 걸기만 해도 혼날 것이다. 다행히 고대 마법사는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차가운 은발 밑으로 푸른 시선이 찻잔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정확히는 덜덜 떨리고 있는, 흰 장갑을 낀 채 찻잔을 쥔 헨리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고맙지만 됐습니다.”
“아, 예…….”
이런 보급품은 역시 안 좋아하시나. 헨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 때와 마찬가지로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미스터 비렌체, 제발 가만히 있으면 안 될까요?”
주사 한번 놓기 더럽게 힘드네. 일 분이면 끝날 걸 십 분 동안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메이슨은 주사가 신기한지 어깨 부근을 왔다 갔다 하는 바늘을 자꾸만 흘끔거렸다. 시린지에 약물을 넣는 것도, 바늘 끝에서 약물 한두 방울을 빼는 것도 마치 식민지인을 처음 본 마도 시대 사람처럼 구경하는 것이다.
손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기절한 메이슨을 경찰서로 데려오고 난 후에 그의 한쪽 손이 피투성이인 걸 알았다.
공동묘지에서 라크시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넘어지면서 그만 흙 속에 숨어있던 나뭇가지에 깊이 찔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곧장 치료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서는 이게 뭐냐 저게 뭐냐, 하며 계속 말을 걸어대지 않는가.
이젠 파상풍 주사를 놔주려는데 슈나이더가 신문할 때마다 꿈틀꿈틀 일어서기까지 한다. 진짜 짜증 나는 환자네.
시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주사 처음 봐요?”
“아뇨.”
그런데 왜!
“제가 알던 거랑은 많이 다르게 생겨서요. 물론 주사기란 걸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맞은 적도 없고요. 그러고선 메이슨이 자꾸 움찔거렸다.
“자꾸 이러면 다른 데 찌를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몸에 약을 넣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먹으면 안 되나요?”
그, 신기한 주사기는 저 주시고요. 왠지 뒷말이 그럴 것만 같았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다시 사용하는 것도 절대 안 돼요.”
으름장을 놓자 메이슨이 슬쩍 눈을 피한다. 진짜 그러려고 했나 본데. 감염의 위험성을 모르는 시대이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슈나이더는 사설탐정이라던 로렌 허슬러가 낯선 방식으로 메이슨을 치료하는 것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