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화 (13/292)
  • 13화 

    붉게 빛나는 수정구는 과거에서 봤던 연구실 중앙의 마정석을 연상케 했다. 설마 이거, 그때 그 망할 기계의 작은 버전인가?

    “…마력을 측정하셨군요.”

    “…네가 그걸 어떻게.”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선 쉽게 도출할 수 없는 결과겠지만. 시아는 친척 동생 요르문이 자신에게 한 짓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력을 감지하면 붉게 빛나나 본데.

    “붉은빛이 마력을 뜻하나 봐요?”

    “어, 어어. 그렇지. 일단 마력이 맞긴 해. 그나저나 언제부터 마법에 관심이 생겼니? 응?”

    요르문 님이 이젠 다른 의미로 흥분하고 있었다. 마류학을 같이 하자며 또다시 끈질긴 설득이 이어질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 기계를 받으셨으면 젤마니 대위랑 할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신가요?”

    “대위가 그러는데, 이 붉은빛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자가 이번 연회에 공작 부부와 함께 온다더구나.”

    “군인이 아니라요?”

    적국의 지휘관이었으면 패배한 즉시 죽었을 것이다. 살아서 볼모와 함께 제국에 올 게 아니라.

    “그래서 궁금한 거야. 군인도 아닌 자가 어떻게 전쟁터까지 간 건지.”

    “그래서 연회에 가려고 하셨던 거군요.”

    마류학자다운 행동이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황제의 말도 거절할 수 있는 대마법사가 황실을 핑계 삼아 연회에 가자고 하는 걸 보면.

    “그래서 시아 넌 어떻니? 연회에 갈 수 있을까?”

    교류는 해야겠는데 혼자 가긴 싫은 모양이었다. 파트너가 없다면 황제가 어떻게든 붙여놓을 테니.

    나이가 들다 보면 다시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있지. 이렇게 보니 친척 동생 쪽의 요르문이 좀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제가 간다면요?”

    “네가 간다면 나도 따라가야지.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어울릴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야.”

    시아는 피식 웃었다.

    “저 춤추는 법 다 까먹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못 추는 사람끼리 있으면 우스꽝스러울걸요.”

    “다른 사람과 춤추다가 민망해질 일은 없을 테니 괜찮지 않겠니?”

    나름 필사적이다. 이 정도면 같이 가줘야겠는데.

    “좋아요. 대신 요르문 님도 저랑 멀리 떨어져 계시면 안 돼요.”

    요르문은 그제야 안심하듯 길게 숨을 내쉬곤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헤이든이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연회는 일주일 후인데. 내일 저녁에 시간 되니?”

    “내일은 당직이라 안 되고, 모레 저녁 어떠세요?”

    “좋아. 그럼 모레 퇴근하고 같이 블레어 스트릿에 가는 거야. 잊으면 안 된다?”

    요르문은 곧바로 뒤돌아 헤이든을 불러 이런저런 명령을 했다. 이런 일이 익숙할 대로 익숙한 노집사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일정을 수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적잖이 신나신 모양이었다. 블레어 스트릿에 가면 아무래도 다음 날 출근은 불가능할 것 같다.

    휴가부터 내야겠군. 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요르문 님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새벽같이 나가신 걸 주인님이 아시면 속상해하시겠군요.”

    막 동이 터 아직 어슴푸레한 하늘 밑에서 헤이든은 손수 짐 가방을 들고 내려와 마차 문을 열었다.

    기사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하품을 연신 해댔다.

    하인도 없이 짐을 든 헤이든을 보곤 기사가 얼른 뛰어 내려와 가방을 받아 들려 했으나 헤이든은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았다.

    “어쩔 수 없는걸요. 기숙사에서 출근하는 게 아니니까요.”

    “마차로 그리 오래 걸리는 길은 아닌 줄 압니다만.”

    시아는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짐을 받아들었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주방장이 만든 간식이 들어있었다. 총이 든 가방은 몸에 따로 메고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가씨.”

    “고마웠어요, 헤이든.”

    마차에 오르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요르문 님은 언제나 아가씨를 환영하실 겁니다.”

    마차의 문이 닫혔다. 엔진을 달구는 갈리프콜 소리에 새벽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잠시 바깥을 감상하던 시아는 얼마 안 가 창문을 꼼꼼히 닫았다. 철제 프레임과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운전석과 좌석이 한 공간에 있는 갈리프콜 마차와 달리 켈튼의 마차는 마도 시대를 재현하듯 마부석과 좌석의 분리가 분명했다.

    겉옷을 벗고, 미리 준비한 편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었다. 리볼버와 필요한 물건 몇 개를 챙겨 넣은 가방을 둘러매듯 몸에 붙였다.

    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곧 시야가 창백하게 물들어 갔다.

    【 공동묘지의 발명가 】

    3517년 황립 모르간 광역 경찰청 서부 메이덜린 지구.

    “슈나이더 경사님! 제발 그이를 찾아주세요!”

    “앤더슨 부인. 저희도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부군을 발견하는 즉시 연락드릴 테니 댁으로 돌아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여요. 남들 다 하는 도박도 안 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던 사람이었는데…….”

    슈나이더는 애먼 콧수염만 매만지며 낡은 숄을 붙들고 애원하는 앤더슨 부인을 달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며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불쌍한 부인이 이젠 악성 민원인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후. 윽박질러 쫓아낼 수도 없고.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멀찍이서 슈나이더의 눈치만 보고 있던 신입 순경 헨리가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하는 게 보였다.

    ‘제가 나서볼까요?’

    그래, 얼굴 반반한 네놈이 좀 해봐라. 대충 손짓했더니 재깍 일어나서 앤더슨 부인 쪽으로 후딱 달려갔다.

    “앤더슨 부인. 진정하시고 이쪽으로 잠시 오실까요?”

    어리바리한 녀석도 이럴 땐 쓸모 있단 말이야.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미인상에 6피트는 족히 넘을 법한 제복이 잘 어울리는 체격, 친절하다 못해 무르기까지한 성격인 헨리는 민원인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커피와 차 중 어떤 걸 더 좋아하시는지?”

    헨리가 사르르 웃자 칙칙하던 경찰서가 순간 환해졌다.

    “헨리 순경님. 어쩜 이리 친절하세요. 순경님 덕분에 제가 모르간 경찰을…….”

    저거저거, 내가 비품 아끼랬는데. 그래도 서가 조용해지니 한결 낫다. 앤더슨 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슈나이더는 목 끝까지 바짝 채운 제복 단추를 하나 풀면서 다시금 중요한 사안으로 되돌아갔다.

    요즘 수도 모르간은 희대의 살인마 때문에 떠들썩했다.

    재키 레이븐.

    그의 타깃은 하층 계급의 가난하고 젊은 여자들. 피해자는 대부분 잔느 강 인근의 직물 공장에서 일하거나 파출부, 메이드 등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로,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는 항상 죽은 피해자를 애도한다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재키 레이븐의 서명이 남아있었다.

    [피지 못한 장미꽃도 아름다워라. 순결한 꽃봉오리는 신께서 보듬으시니. 나는 죄를 구원하는 사도이니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이런 놈들이 문제다. 법과 질서를 멋대로 무너뜨리고 다니는 사람.

    슈나이더는 하층민을 동정하긴 했으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본인이 뭐라도 되는 양 피해자를 죄라 칭하고 그들을 구원한다는 뉘앙스의 말투가 참 거만하기 짝이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 수단이 살인이라는 것도 잔인하고.

    슈나이더가 재키 레이븐의 편지를 보고 느끼는 건 딱 그런 것이었다.

    “경사님, 앤더슨 부인 가셨어요.”

    헨리는 힘들었다는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슈나이더는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펜을 멈추곤 손짓했다.

    “어, 수고했어. 가서 마저 일 봐.”

    멀어져가는 헨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슈나이더는 실종된 미스터 앤더슨과 재키 레이븐의 편지를 번갈아 떠올렸다.

    근래 메이덜린에선 사람이 실종되는 일이 잦아졌다. 실종된 사람 역시 공장 직공 등의 하층민. 다만 이 중엔 남자와 노인도 섞여있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슈나이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키는 젊은 여자만 노리지.

    ‘그런 걸 보면 놈은 꽤나 미끈한 낯짝일 수도 있고.’

    피해자를 뒤따라가서 죽였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피해자를 유혹해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잡히지 않는 재키 레이븐을 두고 경찰들이 실없이 하던 농담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놈이 여자만 노리는 변태라는 건 똑같지.

    그러니 재키의 연쇄 살인과 메이덜린 실종 사건. 두 사건의 범인은 아마 다를 것이다.

    한숨 돌리려는데 이젠 유치장 쪽이 문제였다.

    “어차피 죽고 나면 흙이 될 거, 그냥 묻는 것보다 이득 아닙니까!”

    어젯밤 순찰을 돌다 현행범으로 잡힌 놈이 창살을 붙들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있었다.

    “됐고, 네놈은 감옥행이야. 요즘 황제 폐하께서 시체 도굴꾼 문제에 엄청 민감하셔서 말이지. 봐주지 말고 처넣으라셨어.”

    “아악! 두고 봅시다. 그쪽이라고 뭐 죽고 나서 무사할 줄 아시나?”

    해밀턴 경장이 흠칫 놀랐다. 내가 범죄자들이 하는 소리에 쫄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놈은 기세등등해져서 이젠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아니, 메이덜린엔 심기 튼튼한 경찰이 왜 이렇게 없어. 해밀턴 저 녀석은 신입도 아닌데 왜 저런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디아우스 국교 신자가 대다수인 제국 특성상, 죽고 나서 제 몸이 훼손된다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릴 순 없을 테니까.

    슈나이더는 불뚝한 배를 문지르며 유치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해밀턴에게 눈짓하자 헨리처럼 재빨리 자리를 피한다. 슈나이더는 허리춤의 경찰봉을 풀어 유치장에 매달린 놈의 머리를 딱 때렸다.

    “이것아, 정신 차려. 난 죽고 나서 삼중으로 짠 관에 들어갈 거니까.”

    “아, 왜 때려요! 경찰이 사람 때려도 돼요?”

    “총경님께 물어봐라. 내가 잘못했나 네가 잘못했나. 엉?”

    뭣하면 총경님께 데려가 줄까? 거기서도 그렇게 털어보든가. 그러자 놈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역시 권력이 최고다. 여기가 경찰서가 아닌 치안대였으면 놈은 날 무서워하기는커녕 비웃었을 테니까.

    모르간 광역 경찰청이 생긴 지도 꼬박 십 년이었다. 제국은 이전까지 각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만든 집단에 민병대라는 이름을 주어 치안을 관리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사이 산업이 발달하고 모르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더 이상 민병대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인근 지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단 모르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장이 들어선 도시는 모두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모르간 인구의 삼 분의 일은 도둑이나 다름없었고, 적법한 수사 및 방범 기관이 없어 절도범은 대부분 잡히지도 않았을뿐더러 잡히면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뿐인데도 교수형을 받을 때도 있었다.

    상황이 이럼에도 황권의 강화를 반대하던 의회 탓에 제국에는 경찰이 없었다. 서대륙의 수많은 왕들이 경찰을 수족으로 사용했던 걸 봤던 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