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화 (12/292)
  • 12화 

    마류학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요르문은 연구실보다 서재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시아는 고택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서재의 책상으로 가 서랍 앞에 쭈그려 앉았다.

    ‘왼쪽 맨 밑 서랍.’

    주머니에서 얇은 핀을 꺼내 열쇠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리저리 돌려도 철컥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열려야 되는데.

    이래서 헤이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데. 요르문이 오기 전에 빌려 가야 할 것이 있었다. 빌린다, 는 표현을 하기엔 이미 절도에 가까웠지만.

    급한 마음에 서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

    열렸잖아. 서랍 안에는 매끄러운 몸체 위로 서명이 각인이 된 리볼버 권총 한 자루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왜 안 잠겨있지.”

    어릴 적 서재로 놀러 올 때마다 문 앞에 그녀를 잠깐 세워두고 항상 서랍부터 잠그던 요르문이었다. 무엇이 들었냐고 물으면 목숨을 위협받을 때가 아니면 열어선 안 된다고만 대답하셨지. 이젠 내가 다 컸다고 서랍을 안 잠그시나.

    어쩌면 최근에 사용했을 수도.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했다.

    총열을 꺾어 연 탄창에는 총알 하나가 비어있었다.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어찌 됐건 몰래 챙겨서 나왔다. 딱 하루만 빌릴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방 속에 든 총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쓰게 되어도 문제인 게 총이었으니까.

    총을 쓸 상황보다 총에 맞은 사람이 먼저 떠오르고 만다. 어쩌면 의술사의 직업병일지도 몰랐다.

    일 층이 소란스러웠다.

    “시아는? 시아가 왔다면서.”

    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래서 마법사가 무섭다.

    “방에 계실 겁니다. 일단 편하게 갈아입으신 후에 아가씨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시아는 후다닥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은 그간 사용인들의 손길에 먼지 한 톨 없었으나, 그런 것에 감탄할 새가 없었다.

    일단 눕자! 가방부터 일단 한구석에 숨겼다. 침대에 누워 쉬던 것처럼 머리도 흐트러뜨리고 신발도 벗어 던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시아!”

    길게 내려 묶은 물빛 머리하며, 진남색 로브까지 그대로다. 다만 칠십 년 전에 비해 살짝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

    같이 다니면 누나와 남동생이 아닌, 오빠와 여동생으로 보일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

    “주인님, 아무리 따님이라도 이제 아가씨도 숙녀가 되셨습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여시면…….”

    “아, 정말. 요크 부인 없다고 이젠 집사가 잔소리야?”

    “이젠 부인의 심경을 좀 알겠군요.”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변하는 건가?”

    “주인님 연세에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앞뒤가 안 맞는 기분인데요.”

    “연세라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말게!”

    문간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를 계속 지켜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요르문 님을 위해서 끼어들기로 했다.

    “…오셨어요?”

    그러자 요르문이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시아! 말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니. 물론 말없이 와도 언제나 환영이지만.”

    “전화 받자마자 오신 거예요?”

    “미스 허슬러가 고생 좀 하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월급은 두둑이 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시아는 매번 요르문 대신 의회에 눌러살다시피 하는 보좌관을 애도하는 심정으로 떠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곧 저녁 시간인데, 먹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요르문은 베개에 눌린 시아의 머리카락을 손수 빗어 넘겨주곤 다정하게 물어왔다. 어지간한 귀족가에선 친부도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친딸이 아님에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요르문 님이랑 같이 먹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요.”

    “이거 봐라, 헤이든. 시아는 자네 같은 늙은이와는 달라.”

    헤이든은 자랑스럽게 딸을 자랑하는 주인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예전엔 미치광이 과학자 같더니, 이젠 팔불출이다.

    “예예. 그럼 저녁은 어떻게 준비하라 이를까요?”

    “시아가 좋아하는 걸로. 주방장은 알고 있겠지.”

    “너무 차리진 말라고 전해주세요. 제가 갑자기 온 바람에 다들 당황하고 있을 테니까요.”

    헤이든은 밖으로 나가려다 멈춰 서서 대답했다.

    “걱정 마시지요, 아가씨. 주인님 때문에 주방엔 언제나 아가씨를 위한 요리가 대기 중이랍니다.”

    그 말이 진짜였는지 거짓말처럼 성대한 요리들이 줄줄이 식탁을 채웠다. 요르문은 저녁 내내 싱글벙글했다. 새삼 칠십 년 전, 가짜 친척 누나 신분으로 그와 함께했던 어색한 저녁이 떠오르고 말았다.

    딸기 셔벗까지 알차게 즐기고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마차를 타고 출근하려고요.”

    “또 삯마차를 타려고?”

    “아뇨. 저택에서 타고 가려고 하는데…….”

    요르문은 화색을 띠었다. 갈리프도흐에 진학한 이후 내내 서먹하게만 굴던 딸이 제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독립한답시고 지원을 거절하던 것이 기특하면서도 내심 아쉬웠던 차였다.

    “그럼. 당연하지. 시아 켈튼이 켈튼의 마차를 타고 가는 건 당연한 일이야.”

    요르문은 한결 표정이 밝아진 시아의 얼굴을 보면서 넌지시 말문을 텄다.

    “헤이든.”

    “예.”

    “아까 그거 가져와.”

    노집사가 은쟁반에 빳빳한 봉투를 담아와 내밀었다. 붉은 인장에 음각으로 찍힌 문장이 심히 익숙했다. 불안한데, 이거.

    “그거, 설마.”

    “켈튼 앞으로 온 초대장이란다. 너도 알겠지만 얼마 전에 키르 해협 전투에서 제국이 승리해서 말이다.”

    키르 해협은 이곳 세페란테 제국이 위치한 중앙 대륙의 최서단 씨즐턴과 서대륙을 연결한다. 통행권은 프리드실 공국이 갖고 있었으나 공국이 전쟁에서 패하며 이후 승전국 회의를 통해 해협 통제권과 영유권이 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광룡 부활 후 마법사단을 비롯한 막강한 군사력을 잃고 내내 패전만 반복하던 제국이었다. 식민지 가멜을 잃은 이후 본토 외의 땅을 얻은 것이 처음이었던 제국은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에 젖어 들고 있었다.

    “황실에서 승전 기념 연회를 열겠다고 하더구나.”

    연회의 주인공은 프리드실 공작 부부였다. 하지만 그들은 볼모가 될 터였으니 연회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황제는 제국령이 된 프리드실에 보낼 총독을 진작 임명해 둔 상태였다.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녀는 닥쳐올 시간 여행을 몰랐으니까. 미리 대비한답시고 이렇게 켈튼 저로 와서 요르문을 만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의술원에서 환자 보기에도 시간은 모자랐다.

    요르문이 그런 일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불참해도 상관은 없지마는, 너는 어떻느냐?”

    “설마 가시게요?”

    “황실의 초대장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볼멘소리로 말하면서도 입꼬리는 웃고 있다.

    연회를 안 좋아하는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런담. 심지어 묘하게 들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관심을 둔 여자가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요르문이 사교계의 여자들과 어울리는 성격이었다면 시아를 입양하기에 앞서 긴 수명을 이용해 진작 여러 번 결혼했을 것이다.

    춤추는 걸 싫어해서 어지간한 무도회도 잘 안 가는 사람이 이렇게 물어본다면, 답은 하나다.

    “뭔가를 발견하셨군요.”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거짓말 마세요. 티 나는걸요.”

    요르문의 뒤에서 시립해 있던 헤이든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헤이든. 지금 주인을 비웃나?”

    “아닙니다. 비웃진 않았습니다.”

    비웃진 않고 그냥 웃었을 뿐이라는 거다. 시아와 헤이든은 시선을 마주치다가 또 웃고 말았다.

    “이젠 딸마저 내 편이 아니라 이거지.”

    “서운하셨어요?”

    “아아니. 아니다. 서운하진 않아.”

    삐졌다. 저건 분명 삐진 거다. 그 많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요르문은 토라지고 말았다. 내일 당직을 바꿀 게 아니라면 빨리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다.

    “발견하셨다는 게 혹시 마법인가요?”

    요르문은 순식간에 화색이 돈 얼굴로 재깍 대답했다.

    “맞아. 그래, 그 말을 하려고 했지. 내가 젤마니 대위에게 공국에 가져가 달라고 부탁했던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다.”

    젤마니 대위? 설마 그 젤마니?

    설마 요르문 님 때문에 젤마니 남작이 빨리 돌아온 거야?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렸다.

    요르문은 품속에서 계기판이 달린 작은 기계를 꺼내 보여주었다. 기계 상단에 박힌 작은 수정구가 붉은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너도 알잖니. 광룡이 부활해서 종말이 찾아온 이후에 대지 위의 마력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단 것 말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광룡의 부활과 마도 시대의 종말. 라크시스 옌이 광룡을 처치할 때, 대기를 채우고 있던 마력 대부분이 봉인에 휩쓸려 증발하고 만다. 고대에 신의 아홉 사도가 힘을 합쳐 봉인했던 광룡을 혼자서 막으려니 역부족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광룡은 어떻게 보면 진짜로 종말을 가져온 셈이다. 마도 공학으로 문명의 절정을 누리던 제국에서 마법으로 지속되었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쓸모없는 깡통으로 만들고 말았으니까.

    “전쟁터에서 돌아온 누군가가 그러더구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공격을 목격했었다고.”

    차가운 불꽃이라고 했다. 폭격이 비처럼 쏟아지고 난 참호의 바닥에서 발견된 시체가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금세 질척하게 녹았지만 말이다.

    그런 말을 장교들이 아무렇지 않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했을 리가 없다. 말한들 믿지도 않았을 테고. 군부와 관련 없는 대마법사가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었을까?

    “또 내러 지구에 가셨어요?”

    “또라니. 누가 들으면 맨날 가는 줄 알겠다.”

    “예전엔 거의 맨날 들락거리셨잖아요.”

    뻔했다. 살아 돌아왔으나 사지 중 하나를 잃고, 받은 보상은 가난한 살림에 보태느라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병사들은 내러 지구의 싸구려 선술집에 모여들곤 했으니까.

    근거 없는 소문에도 실체는 있는 법이다. 요르문은 아마 그런 소문을 모아서 의미 있을 법한 정보를 추렸을 것이다.

    “술은 안 마셨어.”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주인님.”

    제 발 저린 요르문은 변명하듯 헤이든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러 지구에서 뭔갈 듣고 확인해 보려고 젤마니 대위에게 부탁을 했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리고 부탁하셨던 물건이 바로 이거구요.”

    “맞아.”

    바늘이 바들바들 떨며 최고점을 가리키는 기계를 보니 문득 칠십 년 전의 요르문이 떠올랐다. 은근슬쩍 연구실에 홀로 남겨두고 기계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가재찜처럼 익을 뻔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