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하얗던 셔츠 앞섶이 꼬질꼬질하다. 기공식 때 인부 쉼터에 쓰러져 있을 때 묻은 흙먼지였다.
가방 안도 그대로였다. 일기장, 지갑, 간단한 화장품, 의술원 내 담당 서류, 만년필 케이스 그리고.
‘스크롤!’
로튼데일에서 한가득 샀던 스크롤의 부피감이 시간 여행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내가 정말로 과거에 갔다 왔단 말이지.
기억조차 불신할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다. 당연했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의 기술로는 칠십 년 전은커녕 단 일 초 전으로도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진작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마도 시대에도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 것 같았지만.’
누가 스크롤을 볼세라 일단 가방을 꽁꽁 여몄다. 그리고 재빨리 내정을 가로질러 기숙사로 뛰어 들어갔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옆방에 혹여 들릴까 조심스럽게 들어간 방은 하루 종일 사람 하나 드나들지 않은 그대로 고요하고 썰렁했다. 전등을 켜자 노란 필라멘트가 책상 위를 밝혔다.
그 한가운데에 일기장이 있었다.
짙은 보라색 양장에 손때 묻은 모서리. 의술원에 들어가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쏟아놓던 바로 그 노트.
문 앞에 우뚝 선 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가방 틈새를 흘끔 봤다. 스크롤 더미 사이로 똑같은 보라색 표지가 살짝 보인다.
다시 한번 책상을 바라봤다 가방을 들여다보길 반복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일기장이 두 개야.’
벌레라도 만지는 것처럼 검지로 책상 위의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차라리 벌레를 만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꺼운 표지가 천천히 열렸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글씨로 울어버린 내지를 한 장씩 넘겼다.
사락―
책상 위의 일기는 동창회 전날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텅 비어있었다.
이게 내가 원래 쓰던 일기장이잖아. 그럼 가방에 들어있는 건 뭐지. 전신을 엄습하는 싸한 느낌에 허겁지겁 가방에서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꺼내 든 순간이었다.
툭.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소리의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이건 펜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분명했기에 더 두려웠다.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삐걱거리며 겨우 시선을 돌렸다.
원래의 일기장에 끼워놨던 가느다란 펜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일기장이 사라졌어.”
불현듯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장난 삼아 하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도플갱어, 였나.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던.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한창 스물여덟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칠십 년 전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적어도 여기서 또 다른 저를 만나 죽을 일은 없을 게 아닌가.
팔뚝을 세차게 문질러 소름을 애써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이건 이거고, 할 일이 많았다. 찜찜한 기분으로 가방 안의 일기장을 펼쳐 들고 메모지를 꺼냈다.
‘다음 시간 여행은 이틀 후 아침, 대략 나흘.’
필요한 게 뭐 이렇게 많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과거를 활보하던 일기장의 시아 켈튼 때문에 야밤에 이 고생이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환자도 보고 아이작 교수랑 면담도 해야 하는데.
당직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쓰고 있던 서류가 타자기에 끼워진 채 책상 한편에 엉망으로 놓여있다. 아아악. 의술사는 역시 만만치 않은 직업이다. 의술원에 진학하지 않고 부유한 중상류층이나 귀족들의 전담 회복술사로 일했더라면 지금처럼 머리를 쥐어뜯을 일도 없었겠지.
문득 유능한 가정교사로 이름이 나버린 마리가 떠올랐다.
마리도 하고 싶은 게 있었더랬지. 집안에서 대주던 비용을 무시할 수 없었던 마리는 결국 유적 조사관 대신 가정교사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론 훨씬 더 잘 됐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가져도 가정교사는 계속할 수 있었고, 귀족가를 오가며 눈도장을 찍은 덕에 사교계에서 구애하는 남자도 많았으니까.
가정이 생기면 일을 그만두게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남편이 누구냐에 따라 가정교사 일 정도는 허락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리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봤음에도 회복술사가 아닌 의술사를 선택했다. 편안하게 일하고 많은 돈을 벌어도, 글쎄. 언젠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의술원에 갈 것 같았다.
하루라도 뇌가 더 팽팽 돌아갈 때 의술원 입학시험을 봐야지. 딱 그 마인드로 의술원에 들어왔던 것 같다. 그 대가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만.
어떻게든 할 일과 필요한 것들을 간추려 메모지에 정리했다. 이 시간에 뭘 더 하긴 글렀고. 간단히 배나 채우고 씻고 잘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보면 체력일지도 모르니까.
* * *
“켈튼 선생. 남들은 하고 싶어 안달인 자리를 왜 선생만 자꾸 거부하는지 모르겠어.”
또 시작이다. 저 대머리 독수리. 시아는 소매를 찔끔찔끔 구기며 아이작 맨틀러 교수의 벗겨진 머리만 물끄러미 보았다.
“여기서 삼 년 채우고 의원 차리려던 것 아니었나? 일부러 미들 이상 환자를 배정해 준 건데.”
미들은 중산층인 미들 클래스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교수의 말을 요약하자면, 마리와 비슷한 루트를 밟을 수 있도록 본인이 의도했다는 말이다.
편하게 지내면서 귀족들이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라. 아이작은 나름 배려라고 한 모양이었다.
“내 말에 집중 안 하나?”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건 못 본 걸로 하지. 대마법사도 선생이 지금처럼 지내다가 졸업하길 원할 걸세.”
수술방 지원서가 아이작의 손에서 무참히 구겨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의술원엔 인원이 부족하지 않았고, 상류층 출신 여자에게 사람을 가르고 째는 광경은 흔히 부적합하다고 여겨졌었기 때문이었다. 갈리프도흐라는 학벌도 관습을 이기진 못하는 모양이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지원서를 보면 서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지원서야 다시 쓰면 되지.
그리고 일기장에서 미래를 본 결과, 조만간 일손이 부족해져 그녀도 수술방에 끌려가게 된다. 갈리프도흐에서 회복학과 출신치곤 특이한 환자 수술을 보조한 경험이 있어 아이작 교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시아를 보조로 둘 수밖에 없었다.
시아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아이작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본인 말을 알아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 오해를 하게 두긴 싫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작과 싸워봤자 남는 것도 없고, 일단 외진부터 가야 했다.
하루 종일 환자를 보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
퇴근하려는데 복도에서 부인과의 엠마 브룩스를 마주쳤다.
“젤마니 부인은 아직도 그래요, 선생님?”
“네, 뭐. 누워있어야 할 이유가 아직 남았나 봐요.”
낮에 왕진 다녀온 걸 들었나 보다.
“웃겨, 정말. 그러게 누가 바람을 피우래? 애먼 켈튼 선생님만 왔다 갔다 하시네요.”
서대륙에서 발발한 전쟁이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제국도 새로운 식민지에 눈독을 들이며 참전하게 되었다. 젤마니 남작의 증조부는 과거 남대륙 식민 전쟁에 참전하여 출세한 군인이었으며, 증조부가 만든 가풍의 영향 탓인지 남작 역시 전쟁이 나자 임관을 받곤 곧장 프리드실 공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남겨진 젤마니 남작 부인이었다. 남작이 떠나자마자 그녀는 저택에 드나들던 오페라 가수와 눈이 맞았고, 정사의 흔적을 채 지우기도 전에 예상보다 빠르게 남작이 본국으로 되돌아오자 급히 앓아누운 척을 해버린 것이었다.
둘러댄 병명은 전염성 있는 피부병. 남작 부인이 의술원에 치른 상당한 비용 때문에 시아는 일주일째 젤마니저를 오가며 부인의 하소연이나 들어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죠. 아이작 교수님과 친분 있는 분이니.”
“제발 부인과까지는 안 왔으면 좋겠네요. 젤마니 부인이 없어도 여긴 늘 바쁘니까요.”
고생했어요, 켈튼 선생님. 엠마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터덜터덜 사라졌다. 엠마가 오늘 부인과 당직이던가. 어쩐지 유난히 지쳐 보이더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의술원 밖으로 빠져나와 곧장 마차를 잡아탔다.
“세레타 지구로 가주세요.”
세레타라는 말에 기사는 곧장 시동부터 걸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켈튼 저택이요.”
마차가 곧장 내달렸다. 큰 손님이었다.
마도 시대가 끝났다고 해도 제국은 여전히 세상의 중심이었다. 갈리프콜이 대신한 기술 문명은 우아하고 오만한 기계들을 거리에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블레어 스트릿의 대로를 따라 도는 트램에서 최신 유행의 양장을 갖춰 입은 숙녀들이 내린다. 제복 차림의 군인들이 은근슬쩍 다가가 작업을 걸었다.
유선형 비행 함선이 창공을 유유히 날았다. 갈리프콜 전투기가 대열을 이루고 꼬리를 그리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죽고 나서야 천재성을 인정받은 비운의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의 역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노집사 헤이든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온다는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집사는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다.
“…헤이든.”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고랑처럼 패인 주름 사이로 칠십 년 전의 젊은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같다. 왜 몰랐을까.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요크 부인은 그때도 나이가 꽤 있었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지금까지 살아있긴 어려울 것이다.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왠지 무겁게 눌리는 느낌이었다.
“요르문 님은요?”
“주인님은 황궁에 가셨다가 의회에 들른 후 귀가하실 예정입니다.”
광룡의 부활 후 시대가 뒤집히면서 귀족의 지위는 관습적 계급과 부의 상속 정도의 의미로 변했다. 사교계라든가 상류사회를 여전히 쥐고 있긴 했지만, 정치에의 영향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가씨가 오셨다고 하면 곧바로 달려오실 텐데요. 연락을 넣을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끝까지 계실 성미도 아니신걸요.”
“틀림없이 빠져나올 궁리를 하고 계실 겁니다. 아가씨를 핑계 삼으면 더 빨리 나오시겠네요.”
헤이든은 결국 전화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한층 느려진 걸음걸이에 세월이 묻어났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 층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청소야 진작 끝냈을 시간이니까. 그러면서도 시아는 주변에 사용인들이 있나 살피며 조심스럽게 요르문의 서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