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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화 (10/292)

10화 

한 가지 다행이었던 건 시아 켈튼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은 꽤 수준급이었다는 거다.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도 상당하고. 갈리프도흐 출신이라는 게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르문. 마류 이상 현상의 진짜 원인을 알았어.”

“그것도 누님이 알려준 거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동생인 나한테는 말도 없고. 요르문은 툴툴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요르문과 시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자꾸 누님거리다 보니 본인이 진짜 동생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군.”

그리곤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친척을 실험체로 쓰진 않지.”

미도리 셰프의 가재찜이 되는 줄 알았다던데. 라크시스의 빈정거림에 요르문이 발끈했다.

“그거야 라크 자네가 확인해 보라고……! 설마 일부러 나한테 시킨 거야? 본인은 빠져나가려고?”

“마류 이상 현상은 광룡의 봉인이 불안정해서 그런 거라더군.”

“말 돌리지 말게! 잠시만. 광룡의 봉인이, 뭐?”

종이 뭉치가 툭 떨어졌다. 갈리프도흐에 몇 시간 동안 붙어있으면서 얻어낸 귀중한 결괏값보다 더 엄청난 얘기를 듣고 만 것이다.

라크시스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광룡의 봉인이라니. 그의 진지한 표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건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요르문은 잔뜩 흥분했다. 호흡을 몇 번이나 진정시키고서야 들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마침내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태고룡 갈리프라니. 광룡을 실물로 영접하고도 살아남는 마법사는 내가 유일하다 이 말이지.”

마도 시대의 종말을 듣고 난 요르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정신 나갔군.”

라크시스는 본인도 시아에게 진실을 듣고 난 후 지나치게 태연했던 것을 잊은 것 같았다.

“물론 마류학자로선 절망적인 미래이지만.”

마력이 사라진 시대에 마력의 흐름을 읽어내는 연구는 할 수 없겠지. 요르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좋아. 봉인은 어떻게 찾지?”

“아홉 개 중 세 개는 이미 행방을 알고 있잖나.”

고대 마법사 아홉이 스스로를 희생해 광룡의 심장을 봉인했다는 전설이 괜히 내려오는 게 아니다.

봉인은 아홉 개. 일기장에 기술된 미래에는 카얄이라는 고대 마법사가 결국 봉인 아홉 개를 모두 파괴해 광룡을 부활시키고 만다.

시아 켈튼이 과거로 오는 시기는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날 때와 맞물린다.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마류 이상 현상이 광룡의 봉인이 불안정해질 때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남은 봉인의 개수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오 년 전 북부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의 붕괴 사건.

두 번째는 랑겔 후작령의 저주받은 보석 사건.

세 번째는 이번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정치와 거리가 먼 라크시스 옌이 굳이 본인을 적대시하는 노든 대공의 사업에 발을 끼워 넣은 것은 바로 마류 이상 현상 때문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으나 얼마 전부터 공사 현장 근처에서 미약하지만 기이한 마력 흐름이 감지되었고, 요르문과 조사한 결과 그것이 앞선 두 사건에서 발견한 마류 이상 현상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냈으니까.

잘 진행되고 있던 기공식 현장을 박차고, 차탈의 의심을 사면서까지 인부 쉼터에 들어갔던 건 그 안에서 마류 이상 현상의 근원과도 같은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이 정체불명의 레이디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지만.’

하지만 일기장 내용을 봤을 때 시아 켈튼의 시간 여행은 그녀가 마류 이상 현상에 이끌린 결과이지, 봉인 파괴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 말인즉, 아르카나 중앙역 공사 현장 어딘가엔 불안정한 광룡의 봉인이 아직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간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 쭉 관계자로 관여했는데도 이상함을 몰랐군.’

일반적으로 봉인이라 하면 수식과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가리킨다. 하지만 마류 이상 현상의 원인이라는 봉인은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뭔가를 가져와 보라는 듯 턱짓으로 요르문에게 신호를 보냈다.

요르문은 벽면 가득한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것을 신호로 책장이 서서히 열리더니 황동 톱니바퀴 수십 개가 맞물려 돌아가는 잠금장치가 나타났다.

그가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꺼내 온 흑단 상자를 열자 묘한 빛을 흘리는 새하얀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이 상자의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자 연구실의 모든 기계가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바늘이 마구 움직여 댔다. 어떤 기계에선 꺼주기 전까진 절대 안 멈출 기세로 경보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요르문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돌았다.

“이게 광룡의 봉인이었을 줄이야.”

일명 인어의 눈물. 원소유자이자 애처가로 소문난 랑겔 백작이 아내인 백작 부인에게 선물했던 보석이었다.

이름이 붙은 보석들은 명성에 걸맞은 저주가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이 아름다운 보석도 소유자마다 병들거나, 다치거나 혹은 죽는 바람에 인어가 인간을 저주하며 흘린 마지막 눈물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인어의 눈물을 탐냈다. 죽은 자보다는 산 자가 무섭다는 말이 있다. 인어의 저주보다는 백 캐럿짜리 다이아몬드와 맞먹는 희소성에 부호들은 목숨을 걸었다.

랑겔 백작 부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전주인이 죽고 경매에 올라온 보석을 보란 듯이 걸고 다니던 백작 부인은 보석은 받은 날부터 원인 모를 병으로 건강이 서서히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 이르게 된다.

그뿐이랴. 하나뿐인 후계자가 헛것을 보기 시작하더니 사용인들까지 하나둘 그만두고 성을 떠나버렸다. 이유는 비슷했다. 정신착란에 의한 건강 악화.

그렇게 당해 영지의 경작까지 말아먹고 나서야 랑겔 백작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석을 팔기에 이른 것이다.

“난 그냥 저주받은 보석인 줄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경매에 나오자마자 최고가를 불러 보석을 샀던 요르문이 중얼거렸다.

“보석에 관심 없던 자네가 마류 탐지기를 로브에 숨기고 경매장에 앉아있었던 걸 난 기억하고 있지.”

요르문은 뜨끔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봉인은 죄다 이런 모양인가?”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군. 이런 마정석 따위를 누가 봉인이라고 생각했겠어.”

무엇보다 내가 한 봉인도 아니고 말이야. 라크시스의 중얼거림에 요르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카얄이라는 작자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멀쩡한 나라를 망하게 한 그 정신 나간 고대 마법사?”

“그래.”

요르문의 표현에 라크시스는 피식 웃었다.

“계획은 천천히 세워보자고. 우선은 기공식 현장부터 봐야겠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쪽도 바빠서 말이야.”

라크시스는 요르문이 봉인을 다시 보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연구실 문을 걸어 잠갔다.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요르문이 뒤돌았다.

“뭐 해?”

“자고 갈 거야.”

라크시스는 요르문이 쪽잠을 청할 때 쓰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방을 준비시킬까?”

“소파면 충분해.”

내일 아침이면 주인을 깨우러 집사가 올 것이다. 헤이든이라면 침실도 아닌 곳에서 주인과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잠들어 있는 것을 요크 부인에게 조르르 가서 이를 것이 틀림없었다.

집주인이라면 어쩌구, 손님을 어쩌구, 연구실이 건강에 어쩌구. 말투까지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써부터 요크 부인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군.”

“어차피 또 밤새 연구할 거잖나. 요크 부인은 내가 막아주지.”

“막아준다고? 그럴 바엔 집으로 돌아가. 자네가 있으면 잔소리가 두 배야.”

“해가 뜨면 술란에서 온 레이디 켈튼이 떠나고 없을 텐데?”

아.

요르문은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요크 부인은 친척 누님의 행방을 찾지 않는 게으른 집주인을 보곤 분명 실종 신고를 할 것이다. 칠십 년 후로 간 사람을 무슨 수로 찾을 것인가.

안 그래도 요즘 수도에는 흉흉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크 부인의 성격상 술란에 있다는 미스터 켈튼에게 편지를 보내고 경찰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테지. 그러면 거짓으로 만든 그녀의 존재가 들통난다.

‘그냥 잔소리 한 번 듣는 게 낫겠어.’

요르문은 한숨을 쉬었다. 라크시스는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이었다.

“그럼 부탁하지.”

* * *

요크 부인은 꼭두새벽부터 저택을 뒤집어 놓았다.

“아가씨가 사라지셨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술란으로 내려가게 됐어. 덕분에 신세를 졌네. 고마워.]

하지만 그 어떤 사용인도 방 밖으로 나온 시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식사도 단장도 없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요르문은 정적이 많았고, 저택 내부로 공간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도 적지만 존재했다.

주인이라는 작자가 손님이 행방불명이 됐다는 데도 퍼질러자고 있다니. 요크 부인은 헤이든을 앞세워 요르문의 침실을 돌진하듯 열었으나 익숙한 냉기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또 연구실에서 주무신 건지.”

“주인님의 일상이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닌데요, 뭐.”

헤이든은 머쓱하게 웃었다.

요크 부인은 곧장 연구실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불렀다.

“주인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자리엔 집주인 대신 웬 새하얀 남자가 잠이 덜 깬 눈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 요크 부인.”

셔츠 앞섶을 한껏 풀어 헤친 라크시스였다. 요크 부인은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 * *

뎅―

아르카나 시계탑 너머로 질척한 불야성의 거리가 점점이 흩어졌다. 늘어선 가스등 밑으로 한밤을 즐기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라크시스의 얼굴이 샤샤리아 연기처럼 아른거렸다. 등 뒤에서 그가 ‘안 가고 뭐 해요.’라고 부르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과거와 현재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었다. 여긴 어디지. 지금은 언제?

뎅―

새벽녘의 어스름 대신 초여름 밤의 공기가 서늘하게 귓가를 스친다. 마지막 종소리의 끝자락에 묻어있는 알싸하고 매캐한 갈리프콜 냄새.

갈리프콜 냄새? 마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초점이 맞춰진 시야로 의술원 정문이 들어왔다.

시아는 그제야 3587년, 원래의 시대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아가씨. 삯은 이미 받았습니다.”

통보에 가깝게 대꾸하고 사라진 기사가 아니었다면 계속 멍하니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시간으로 되돌아올 땐 쓰러지지 않나 보다. 아르카나 중앙역에서처럼 기절한 채 눈을 떴다면 기사가 틀림없이 호들갑을 떨었을 테니까.

그것참 다행이군. 어이가 없어 피식거리면서 재빨리 몸부터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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