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화 (9/292)
  • 9화 

    “라크, 놀랐잖아요!”

    “홍차 좋아해요?”

    라크시스가 환하게 웃으며 작은 도기에 은은한 향을 풍기는 찻물을 조르르 따르고 있었다. 주전자를 들고 있는 남자는 한 폭의 명화 같았다.

    화가 올라오다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이런 게 진짜 마법이라는 건가. 신기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찻잔을 들고 있었더라.

    “전 설탕이랑 우유를 곁들이는 게 취향이라.”

    각설탕 두 개가 씨즐턴 특유의 덩굴 문양 찻잔으로 퐁 떨어졌다. 우유를 붓자 티스푼이 저절로 휘휘 움직인다.

    “신기해요?”

    “네. 엄청요.”

    그의 어깨에 묘하게 기합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하긴 이 시대엔 마법이 흔하다 보니 이런 것쯤은 다들 그러려니 했나 보다.

    “이 시간에 마셔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좋아하니까 즐기는 것뿐.”

    그의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풍요로운 마력이 만월처럼 그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수식이나 계산 따위가 필요 없는, 진짜 마법사가 눈앞에 살아있다.

    “사실 술은 그리 즐기지 않아요.”

    “그러면 아까는 왜.”

    “시아는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야 라크가 다짜고짜 데려간 거잖아요. 그 술집. 라크시스가 웃으며 동조했다. 그건 맞네요.

    어느새 비워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술, 좋아하죠. 하지만 홍차도 나쁘지 않네요.”

    원래는 차보단 커피를 자주 마셨다. 순전히 일하는 도중 잠을 쫓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이다.

    차는 이런 맛으로 먹나.

    어쩌면 그가 준 차라서 괜찮았을지도.

    “그래서 할 말이 뭔가요?”

    가방에서 주섬주섬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라크시스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그거, 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들여다보던 거 아닌가요?”

    “맞아요.”

    궁금하긴 했나 보다. 하긴 내가 어지간했어야 말이지.

    그에게 일기장을 내밀었다. 라크시스는 받지도 않고 되물었다. 실망한 티가 역력하다.

    “뭡니까. 설마 이 낡은 노트 하나 보자고 절…….”

    “라크시스 옌.”

    고백이라도 하려고 불러냈나 싶었던 여자의 눈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고백을 했으면 받아줬을 것이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눈앞의 여자는 그와 요르문이 몇 년간 행적을 쫓았던 사건과 분명 관련이 있었다. 어떻게 잡은 귀중한 단서인데, 놓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불러낸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장단을 맞춰주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지해진 시아 켈튼의 뒤로 마력등 몇 개가 깜빡였다. 강한 마력이 주변에 있으면 곧잘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역시 그녀는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다. 아까와는 다른 긴장감이 심장을 서서히 뛰게 만들었다.

    “전 미래에서 왔어요.”

    소름이 돋았다. 첨탑 위의 새 조각이 역풍을 맞은 듯 미친 듯이 돌아갔다.

    기이한 고양감이 온몸을 감싼다. 검붉은 머리와 빛나는 자주색 눈동자에 홀릴 것만 같다.

    내민 노트를 받아들자, 그제야 그녀가 말했다.

    “마도 시대가 종말을 맞은 칠십 년 후의 아르카나에서요.”

    * * *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여긴 아르카나 시계탑도 없는데 어디서 들리는 걸까.

    라크시스와 벌써 두 시간이나 함께 있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됐다. 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가 어느새 옆에 서있었다.

    “빚은 두 개로 치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갚으려고 불러낸 건데. 이건 좀 치사하네요.”

    잘생겨서 재수 없는 얼굴로 라크시스가 실실거렸다.

    “제가 원래 좀 치사합니다. 억울하면 또 만나는 걸로 하시죠.”

    “어차피 만나게 될 거잖아요.”

    세 달 후에. 조그맣게 덧붙인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라크시스는 못 들은 척 휘파람을 불었다.

    라크시스는 일기장을 읽고 난 후에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설마 본인이 오 년 후에 죽게 되는 부분만 쏙 빼고 읽었나.

    너무 아무렇지도 않길래 충격이라도 받았나 싶어 말을 걸었더니, 곧바로 두 번째 시간 여행 때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부터 줄줄 읊는 것이 아닌가.

    마법사는 원래 저런가. 제어장치가 고장 난 열차인 양 앞으로 돌진하려고만 하니.

    그래도 다가올 비극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라크시스가 그럴 성격이 아니란 걸 느꼈으니까 그녀도 그에게 일기장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게 아니었을까.

    “그거랑 이거는 또 다르죠. 전 공과 사는 명확하게 구분하는 편이라.”

    “공과 사요?”

    광룡의 봉인을 찾으려고 만나는 건 공이고, 그렇지 않은 만남은 사란 소리야? 애초에 구분될 리 없는 만남이다.

    저 남자는 본인이 내킬 때마다 그녀에게 빚을 만들려는 생각인 게 분명했다.

    “기껏 광룡이 부활할 거라는 심각한 얘기를 해줬더니, 그게 공과 사 정도라는 건가요?”

    “천 년도 넘게 살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나이 많아서 좋겠네요.”

    “…좋지만은 않죠. 무뎌지게 되니까.”

    라크시스는 환기하듯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어쨌든 좋습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요르문의 친척 누님 빼고요.”

    저, 저 자식. 은근히 뒤끝 있다니까. 그가 안 볼 때 몰래 혀를 내밀었다가 들키고 말았다.

    “빚은 사적으로 만날 때 갚아요.”

    “알겠으니까 라크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으라고요.”

    “물론 다 생각해 놨죠. 당신의 그, 뭐랄까 험악한 일기장을 보자마자요.”

    표시해 둔 곳만 보라고 했는데! 아이작 교수 욕한 것까지 다 본 게 분명하다.

    열한 번째 종소리가 들려왔다. 스크롤을 찢으려고 하자 라크시스가 은근슬쩍 다가와 붙었다.

    “설마 따라오는 건 아니죠?”

    “따라가면 안 됩니까?”

    따라오면 요크 부인에게 일러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자 하얀 마법사는 진절머리를 쳤다.

    “장난이에요. 조심히 들어가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또 붙잡는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다.

    “스크롤, 쓸 줄 알죠?”

    “다시 말하지만 기공식 땐 스크롤 잘못 쓴 거 아니었어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시아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더 놀리면 얼굴도 안 보려고 하겠어.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세 달 후에 만나요.”

    인사도 없이 스크롤을 찢어버린 시아 켈튼이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찢어진 종잇조각과 둥근 바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선물처럼 어마어마한 진실을 내던지고 끝났다.

    누군가에겐 지옥과도 같은 미래일 테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맞이했더라면 라크시스 역시 지옥이라 생각했을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선물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마법사의 본질에 새겨진 탐구 정신과 호기심 때문일까. 어쩌면 색이 다른 무언가가 심장 부근을 물들이다가 사라진 탓일지도 모른다.

    사위가 고요했다. 요르문에게 약속했던 자정이 훌쩍 넘어버렸다.

    몸에 깃든 마력 탓에 그의 은발이 반짝였다. 흥미롭다는 기색 반, 흥분감이 번진 기색 반.

    정원을 떠나는 라크시스의 얼굴엔 아주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늦었잖아.”

    “오늘따라 시간 타령이군.”

    연구실 책상에 처박혀 있다가 계기판 바늘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려 하자마자 요르문은 자리를 박차고 그의 오랜 친구를 기다렸다.

    빛무리와 함께 라크시스가 나타나자마자 요르문은 냅다 종이 뭉치를 들이밀었다.

    물빛 머리 남자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이것 봐, 그 여자가 바로 마류 이상 현상의 원인이었어.”

    보기만 해도 눈이 돌아갈 것 같은 복잡한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했으나 라크시스는 그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비정상적인 과다 마력 발현.’

    밑줄을 두 번 그어 강조한 결론 밑에 조그마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갈리프도흐 모르간 제1 대학 마력 측정 연구소]

    연구실에 처박혔단 얘긴 역시 시아 때문이었군. 라크시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잠깐만. 자네 술 마셨나?”

    요르문은 라크시스의 몸에서 배어 나온 희미한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샤샤리아는 끊었다며.”

    “냄새만 맡았어. 진짜야.”

    요르문은 알 만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공 전하 말대로 애인이 생긴 게 맞군. 설마 샤샤리아 피우는 여자야?”

    “…아닐걸. 수연을 본 적도 없는 것 같았으니.”

    진짠가 보네.

    라크시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본인의 연애는 신경 쓰지 않아도 친구의 연애에는 관심이 많은 요르문이 확신했다.

    애인이 생긴 게 분명하다. 아니라면 관심이 가는 여자가 생겼거나.

    ‘확인’의 결과를 설명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던 요르문은 흥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누구야?”

    짜증 나는 놈. 이래서 꼬맹이는 안 돼. 라크시스는 말없이 웃기만 하는 요르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술란에서 면화 무역을 하는 네 당숙의 딸 말이야. 마력 이상 현상의 원인을…….”

    “설마 누님이야?”

    “뭐?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일 가능성이 높다. 요르문이 쐐기를 박았다.

    “아니긴. 그, 홍등가로 이 야밤에 누님을 납치해 간 거잖아! 샤샤리아도 네가 준 거지?”

    “안 피웠다고.”

    “오, 세상에. 순진한 누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저질스러운 마법사 같으니.”

    연구를 위해 시궁창에 빠지는 것보다 억울하게 모함당하는 것을 더 싫어하는 하얀 마법사가 울컥했다.

    “…레이디 켈튼이 날 먼저 꼬드겼다고 하면 믿겠어?”

    결국 라크시스가 파르르 진실을 고백했다. 심지어 말도 조금 더듬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더니 진짜였나.

    요르문은 괜히 성을 내며 토라진 척을 했다.

    “이상하다 했어. 왠지 냉큼 자러 간다고 하더니.”

    “진짜 친척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야. 네가 시아의 후견인이라도 되나?”

    그러더니 라크시스는 이내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후견인이 되면 좋겠군.”

    요르문은 그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저택 주위를 맴돌던 까마귀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마력장에 부딪혀 스파크가 일었다.

    요르문은 창밖으로 낙하하는 새를 흘끔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신분이 필요해?”

    “그녀가 말했던 대로의 신분이면 더 좋겠지. 대공이라면 분명 뒤를 캐볼 테니까.”

    낮에 있었던 삼자대면이 떠올랐다.

    미도리 셰프 식당에는 분명 대공의 수하가 앉아있었다. 뱀 같은 인간이라는 본인의 평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라크시스 본인이나 요르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노든 대공 역시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다.

    아까 샤샤리아를 피우던 사람 중 하나의 눈에서도 기이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남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는 것은 대공의 알려지지 않은 특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