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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화 (8/292)
  • 8화 

    아르카나 시계탑의 종소리를 마지막으로 난데없이 기공식 현장에 떨어진 것처럼, 일기장의 시아 켈튼도 예고 없이 정신을 잃고 낯선 곳에서 눈을 뜨기를 반복했다. 대륙 횡단 비행선 선수루에 걸려있기도 했고, 공동묘지에 반쯤 파묻힌 상태로 깨어난 적도 있었다.

    스크롤을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을 최대한 모면하기 위함이었으며, 또 하나는.

    ‘당장 쓸 일이 생겼으니까.’

    으슥한 뒷골목까지 기웃거리며 로튼데일을 실컷 구경하고 나자 마차가 초입에서 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님, 죄송해서 어쩌죠? 전 할 일이 있어서 갈리프도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요르문은 갈리프도흐 마류학 겸임 교수였지.

    “마차가 저택까지 모셔다드릴 거예요. 저녁때까진 돌아올 테니까요. 같이 식사해요.”

    아쉬워하는 얼굴에 비해 목소리엔 들뜸이 묻어났다. 보아하니 강의는 절대 아닌 것 같고. 역시 연구 쪽인가.

    날 데려가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 이쪽도 혼자서 할 일이 있었다.

    스크롤을 찢은 요르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마부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아르카나 중앙 우편국에 잠시 들러주세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라크시스 없이 로비를 가로지르려니 줄을 서는 것조차 쉽지 않다. 새삼 여기 와서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음을 느끼고 만다.

    무려 2실랑짜리 고급지를 사서 급보를 썼다.

    [오늘 밤에 만나요. 빚지는 건 질색이라.]

    그리고 요르문과 어색한 저녁을 보낸 후, 밤 열 시가 다 되었을 무렵.

    “성미가 급하시군요.”

    아르카나 시가지 뒷골목의 점멸하는 가스등 앞에서 라크시스 옌을 만날 수 있었다.

    * * *

    갑자기 나오긴 한 모양인지 라크시스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순백의 무거운 로브는 온데간데없고, 가벼운 프록코트에 크라바트조차 없는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하얀색이 아닌 라크시스는 낮에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생기있어 보인달까. 와중에 탄탄하게 잘 여민 베스트가 눈에 띈다.

    이 남자라면 뭘 걸쳐도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제가 원래 좀 그래요.”

    “그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불러낸 겁니까?”

    “…로브 벗은 건 처음 보네요.”

    라크시스가 본인의 차림을 한 번 훑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거, 그쪽 동생도 알아요?”

    글쎄.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숫자가 가득한 종이를 들고 곧장 연구실로 갔으니 아직 거기 있지 않을까.

    “아마 모를걸요. 요르문이 한밤중에 잠든 친척 누나의 방에 들락거리는 취미만 없다면요.”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알 만하다는 표정이다.

    “저녁은 먹었고요?”

    “네. 아주 배부르게요.”

    실험체라곤 해도 일단은 친척 누님 취급을 해주기로 결심한 탓인지 대접이 후했다. 요르문의 속을 알 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제국 번영의 절정이라는 마도 시대의 아르카나는 지지 않는 태양이라도 뜬 것처럼 밤에도 밝았다. 홍등이 걸리고 한층 농밀해진 거리는 낮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치스러운 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앞섶을 풀어 헤친 여자들이 독한 궐련 연기를 뿌리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싸구려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가스등 밑의 남녀를 흘끔거리며 들어간다. 하얀 마법사와 함께 있는 여자는 어떻게 봐도 밤거리와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여긴 여자도 받아요. 머리에 꽂은 깃털을 살랑이던 여자들이 문간에서 입 모양으로 속삭이며 웃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라크시스는 그들을 외면하며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든 일단 들어가죠.”

    * * *

    한산한 바 테이블에 앉자 바텐더가 다가왔다. 라크시스에겐 뭘 마실지 묻지도 않고 시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이걸로 주세요.”

    메뉴판 위에서 갈팡질팡하던 손가락을 보고 있던 그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잘 고르셨네요. 여긴 그것도 괜찮아요.”

    “저건 뭐예요?”

    “샤샤리아. 기분은 좋겠지만 권하진 않을게요.”

    몸에 안 좋거든요. 남대륙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화병을 닮은 길쭉한 유리병에서 파이프를 돌려가며 피우고 있었다. 병에 담긴 물이 오묘한 색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혹시 그거? 비슷하죠.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의술원에서 종종 마주하는 중독자들이 생각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곳엔 안 다닐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요.”

    “그런가요?”

    바텐더가 무심하게 입가심용 차를 따라내는 옆에서 라크시스가 한쪽 턱을 괴고 물어왔다.

    “그럼 어떤 인상이었는데요?”

    “어, 음. 요르문 같은……?”

    그 말에 라크시스는 속에서부터 터진 진심 어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구실에 틀어박힌 마류학자보다야 제가 낫죠.”

    아, 예. 그래서 이런 곳도 다 알고 그러셨구나. 황궁에 기거하면서 고급 사치품이 아니면 손도 안 댈 것 같은 귀족 같은 외모와는 퍽 상반되는 생활이다.

    문득 미도리 셰프 식당에서 그가 내러 지구를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그는 위험한 곳에 자주 발걸음을 하는 모양이었다.

    태어나길 고대 마법사로 태어났으니 뒷골목 출신일 리는 만무하다. 그도 연구에 미치면 어떤 것도 서슴지 않는 타입인가?

    그런 거라면 딱 요르문의 친구다웠다. 이런 걸 끼리끼리라고 하지.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시아가 먼저.”

    “그게.”

    머뭇거리자 라크시스가 의자를 당겨와 가까이 붙었다. 잠시 실례, 라고 하더니 그녀의 손등 위에 희고 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린다.

    “한밤의 아르카나 유흥가에서 당신과 단둘이 있는 걸 대공이 봤어야 하는데.”

    “무슨 뜻이에요?”

    전기가 오른 듯 따끔거리더니 이내 피가 혈관을 타고 뜨끈하게 흐르는 느낌이 번졌다.

    간지러워서 손을 화들짝 빼자 라크시스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동작을 멈췄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그 작자를 놀릴 거리가 생각나는 바람에.”

    리듬감 있는 아코디언 반주가 이내 뭉근한 블루스로 바뀌었다. 황동 태엽이 끝없이 돌아가는 축음기가 악사처럼 이리저리 음악을 바꿨다.

    노란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라크시스의 잔은 진작 비어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라크시스를 불러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다.

    “라크.”

    “네.”

    “할 말이 있어요.”

    “말해봐요.”

    와인 잔의 물기를 닦던 바텐더가 흘긋 이쪽을 본다. 순간 입술까지 튀어나왔던 목소리가 멈칫했다.

    수연통에 고개를 박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왠지 이쪽을 향해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여기 있는 누구도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듣는 귀 없는 조용한 곳이 필요해요.”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우리 둘뿐이잖아요?”

    샤샤리아의 희뿌연 연기보다 더 짙은 가림막이 필요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라크시스가 지난번처럼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면 여기서도 속삭여야 할 만큼 비밀스러운 이야기인가요?”

    그의 숨결이 닿은 곳에 솜털이 섰다. 묘한 느낌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사람 많던 미도리 셰프 식당 앞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맞지만 이런 식으로 속삭일 필요는 없어요.”

    라크시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내일 다시 만날까요? 살롱 하나를 통째로 빌려두도록 하죠.”

    지금 당장 갈 수 있다면 모를까. 내일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저, 동이 트면 수도를 떠나요.”

    “떠난다고요?”

    “저도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에요. 시간이 넉넉했다면 굳이 이 밤에 라크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고요.”

    라크시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주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물어볼 법도 한데 하얀 마법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바텐더에게 술값을 지불하고는 뒷문으로 향했다.

    내가 내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실크햇을 손에 든 그가 그녀의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 씌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실례.”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팔을 들어 옮겼다. 단단한 팔뚝 위로 손이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사라고 하면 몸이라곤 영 못 쓸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코트 너머로 자주 사용했음이 분명한 잔근육이 느껴졌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승마나 사격 정도는 취미로 즐겼을지 모르지.

    이 남자가? 설마. 그는 고대 마법사였다. 숨 쉬는 것도 마법으로 한다면 모를까.

    “뭐 해요? 제대로 안 잡고.”

    어색하게 굴긴 싫다. 그걸 이 남자에게 들키는 건 더더욱 사양이다. 에스코트 받는 게 일상이 아닌 시대에서 와서 라크시스가 자꾸만 팔뚝을 내미는 게 당황스럽지만.

    “켈튼이라면서요. 설마 에스코트를 받아본 적이 없는 건 아니겠죠.”

    “잡았거든요.”

    배려라곤 느껴지지 않도록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럼에도 라크시스는 태연한 것 같았다. 심지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자챙에 가려져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 감아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음률처럼 들려왔다.

    시원한 밤공기. 싸구려 궐련 향. 술 취한 노동자들의 시끄러운 주정이 아득해진다.

    발밑이 붕 떴다.

    그가 머리 위의 모자를 벗겨줬을 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여긴…….”

    무르익은 밤이 별을 쏟아냈다. 바람결에 장미 향이 실려 온다. 펜스를 휘감은 덩굴장미가 탐스러운 열매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다.

    마법사를 닮은 하얀 저택의 첨탑이 달에 걸렸다. 올려다본 끝에 황동 새 조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정원이죠. 제 저택 뒤편에 있는.”

    곳곳에 놓인 작은 등 주위로 연구실에서 봤던 별 가루 같은 빛무리가 돌아다녔다. 분명 똑같은 빛인데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끼는 곳이라 황제도 못 들어오게 하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군요.”

    “영광이에요. 저도 고대 마법사의 저택에 와보긴 처음이라.”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라크시스가 슬쩍 묻는다.

    “계속 잡고 계실 겁니까?”

    아, 맞다. 팔을 잡고 있었지.

    얼른 빼려는데 라크시스가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이렇게 잡고 계시면 제가 손을 어떻게 빼요, 악!”

    그가 손을 붙든 채로 아무것도 없던 잔디 위로 갑자기 주저앉았다. 넘어질까 봐 화들짝 놀라다 발을 헛디뎠는데 난데없이 엉덩이에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이 소파라는 것을 채 알아채기도 전에 티 테이블의 기둥이 발끝에 닿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잔디밭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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