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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화 (7/292)
  • 7화 

    “요르문 어디 있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다치긴 왜 다쳐요. 뜨거워지긴 하던데.”

    잠깐만.

    “헤이든. 혹시 제가 다칠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헤이든이 대답을 피했다. 눈을 마주치자 고개도 돌려버렸다.

    “아가씨, 주인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허, 이거 봐라?

    반쯤 열린 연구실 문으로 기계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 닿는 어렴풋한 열기에 헤이든의 멱살을 잡으려다 상황부터 설명했다.

    “…연구실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일단 빨리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요.”

    헤이든이 헐레벌떡 뛰어가 요르문을 끌고 오자 사태는 금방 해결되었다. 실험 도중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하필이면 손님방이 다 준비되었음을 알리러 온 요크 부인이 목격하고 말았다.

    “앞으로 손님은 응접실에서 모시는 것으로 합시다, 주인님.”

    “진짜야. 실수였대도.”

    헤이든이 옆에서 쫑알쫑알 일러바친 탓이었다. 앙숙 같던 두 고용인이 이럴 땐 곧잘 한 패가 되었다.

    저택의 유일한 아가씨를 걱정하느라 요크 부인이 차며 티 푸드를 아낌없이 내왔다. 이 더운 날씨에 담요까지 둘러준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떨고 있었나 보다.

    “이 저택에서 켈튼의 명예를 가장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주인님일 겁니다.”

    “누님, 정말 죄송해요. 당숙을 뵐 면목이 없네요.”

    적당히 뜨거운 차로 목을 축이며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인 요르문을 바라봤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이미 시아에게 신뢰를 잃었다.

    여기서 시아는 신원도 불분명하고 보증인도 없는 사람이다. 그 말인즉 설령 누군가가 납치하거나 죽여도 ‘없는 사람’이기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내러 지구 같은 곳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제국민이 훨씬 많겠지만. 애초에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지.

    마법사는 대체로 어디 하나가 돌아있다고들 한다. 그녀의 거짓말을 알아챈 요르문이 앞에선 누님, 거리면서 뒤로는 진작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찰에 안 넘긴 거야? 뒤탈 없는 실험체를 구한 것 같으니까?

    먼저 그들을 속인 건 자신이라는 사실이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을 겨우 누르고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냐. 어쨌거나 별일 없었잖아.”

    “아무래도 아가씨에겐 휴식과 안정이 필요할 것 같으니 준비된 방으로 안내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요크 부인은 어린아이에게서 사탕을 빼앗듯 시아를 데리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일기장을 읽어봐야겠어.’

    일기장이 정말로 오차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거라면 지금 이 상황도 적혀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건 자신이 원래 있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였다.

    뭐가 됐든 3587년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까지 목숨만 잘 보존하고 있으면 됐다. 돌아가는 순간 지금까지 겪은 일은 모두 역사의 티끌이 된다. 경찰에 끌려가든 여기서 요르문에게 실험체로 발목이 잡히든 모든 시간을 하룻밤의 꿈처럼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다면?

    눈앞이 아득했다.

    요크 부인이 저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밖으로 나가고,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푹신한 침대 가에 테이블을 끌어당겨 앉았다.

    막상 일기장을 펼치려 하니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 사실 불안했던 거다. 표지를 넘겼을 때 맞닥뜨릴 미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 일기장에 원래 시대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 없으면?’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렇게 되면 3517년에 꼼짝없이 갇히는 거다.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란 법은 없지. 뭐가 됐든 일단 현실을 마주하는 게 나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 줄씩 천천히, 잘게 쪼개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반복해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난데없이 칠십 년 전으로 끌려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도 시대의 종말에 내가 있었다고?”

    【 선택의 기로 】

    [라크시스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라크가 죽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고대 마법사 카얄이 광룡의 봉인을 모두 파괴해 버렸고, 부활한 광룡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떨려왔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벌써 다섯 번은 넘게 읽었던 부분이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의 난 시아 켈튼일 뿐이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일기를 쓴 건 바로 나였다.

    * * *

    “누님,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내가? 멀미가 좀 나는가 본데.”

    “…여기서요?”

    그들이 있는 곳은 잘 닦인 도보였다. 마차에서 내린 건 오래전이었다.

    요르문은 이러다 시아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확인’을 위해 잠시 연구실에 둔 걸론 이 정도로 부작용이 나타날 리가 없는데.

    안 그래도 흰 피부가 창백해 보였다. ‘확인’ 말고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저택에서 내 눈을 피해서 한 일은 딱히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시아가 그와 떨어져 있었던 건 손님방에 안내된 후 잠시 쉬었던 그때뿐이었다.

    요크 부인이 힘들게 했나. 그런 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애인 하나 없는 주인을 모시며 적령기의 영애만 보면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애를 쓰던 저택의 실세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친척이라는 게 시아 켈튼을 저택에 들이려고 둘러댄 핑계라는 것쯤은 단박에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둘이 마차에 태워 바깥나들이를 꾸역꾸역 보낸 거다. 소문이라도 나길 바랐던 게 분명하다.

    요르문은 그런 짐작을 했음에도 기꺼이 시아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지금은 제 친척이라 주장한 이 여자를 붙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차피 없었던 가족. 잠시 어울려 주는 거야 쉬운 일이었으니까.

    “힘들면 쉬었다 가실래요?”

    “아냐. 잠깐 헛소리가 나왔어. 나 진짜 여기 궁금하니까 구경시켜 줄래?”

    각종 마법 관련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모인 이 거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로튼데일이었다. 스크롤이 만든 잔상이 사방에서 번쩍거렸다. 쇼윈도 너머로 정령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귀를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블레어 스트릿보단 훨씬 낫네.”

    “누님이 요크 부인을 말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거기서 내렸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시아는 멋쩍게 마주 웃으며 입에서 보랏빛 불을 요란하게 뿜어대는 광대를 구경했다.

    둘의 외출을 준비하며 요크 부인은 블레어 스트릿에 가서 당장 아가씨에게 필요한 옷이며 구두, 보석을 한가득 마련해 오라 엄명했다.

    ‘켈튼의 손님이 파리 날리는 사설탐정의 비서 같은 차림으로 머물게 하는 것도 결례랍니다, 주인님.’

    ‘요크 부인, 전 진짜 괜찮아요. 술란에선 다들 이렇게 입고 다녀요.’

    ‘이렇게 마음씨 고운 아가씨가 이 저택에 계시다니. 하지만 그렇게까지 주인님을 감싸주시지 않으셔도 되어요.’

    줄행랑치듯 마차에 올라 출발했다.

    요르문은 옷이 필요하거든 정말로 블레어 스트릿으로 가도 된다고 했지만 친척 누님이라는 여자는 단박에 거절했다.

    어차피 내일 동트자마자 수도를 떠날 거라 옷은 필요 없다나 뭐라나. 요르문은 갈 곳도 없는 처지에 그녀가 왜 그렇게 확신에 차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그녀를 얌전히 보내줄 생각도 없었다. 시아 켈튼은 귀중한 실험체였다. 마류학적으로나 그녀 그 자체로나 뭐든 간에 말이다.

    “저기, 스크롤을 좀 사고 싶은데.”

    “누님.”

    “응?”

    “술란에는 스크롤 상점이 없나요?”

    그 말에 누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스크롤 타령을 하더니, 혹시 저택에서 도주라도 할 생각인가?

    “괜찮아요. 수도에 온 김에 많이 사가시면 되니까. 원하시면 남부로 보내드릴까요?”

    “아냐. 그럴 것까진 아니고.”

    요르문은 자연스럽게 시아를 근처의 상점으로 안내했다. 별과 달 무늬가 요상하게 얽힌 외벽을 넘어서자 돌돌 말린 종이가 삼면의 벽장을 가득 채운 내부가 펼쳐졌다.

    할 일 없이 요르문이 한구석에 서있는 사이, 시아는 그의 눈치를 보며 거리 별로 이동 스크롤을 집어 담았다. 계산하면서 사용법도 은근슬쩍 묻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스크롤에 집착하는 건 바로 일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를 3587년의 시아 켈튼이 읽고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거겠지.]

    [부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길.]

    일기는 거기서 끊겨있었다. 종말의 혼란을 보여주듯 마지막 일기가 적힌 장 앞뒤로 재와 핏자국이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휘갈겨 쓴 글자가 이어지려다 마치 칼로 벤 것처럼 멈췄다.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은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광룡의 부활을 막는 것, 정확히는 라크시스의 죽음을 막는 것일 테지.

    예기치 못한 불행을 미리 알게 된 자로서 시아에겐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녀가 바란 대로 과거를 바꿀 것이냐, 이대로 역사가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게 둘 것이냐.

    무엇을 선택하든 상관은 없었다. 광룡이 부활해도 3587년의 시아 켈튼은 의술사로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과거를 바꾼다면 요르문의 양녀이자 갈리프도흐 출신인 의술사인 시아 켈튼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기장의 부탁을 쉽사리 외면하지 못했다.

    한 번 맞닥뜨린 진실은 알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종국에 수만 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하려고 들 것이다. 광룡은 다시 봉인되지만, 그 후에 남겨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쩌면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답이 정해진 선택지를 내어놓고 골라보라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말하는 마지막 기회를 선택하기로 했다.

    논리적으로 따져본 건 아니었다. 무의식이 찰나에 내린 판단이었다. 어쩌면 의술원에 들어가며 했던 선서 때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험지도 원래 맨 처음에 찍은 답이 정답이라고.

    한 번 기울어버린 마음은 어느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과거로 올 때마다 영 이상한 곳에 떨어진다 했으니.’

    일기장에 따르면 과거로 오게 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떠나오는 시간과 도착하는 시간에도 규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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