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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화 (6/292)
  • 6화 

    배부르니 노곤했다. 부어라 마셔라 술까지 마신 몸이었다. 상류층 주거 지역 세레타로 향하는 잠깐의 안락한 여정에 시아는 금세 잠들어 버렸다.

    요르문은 그런 그녀를 맞은 편에 앉아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확인해 봐.’

    라크시스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이다.

    그는 요르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손가락을 연달아 한 개, 두 개 펼쳐 보였다. 그리고 멀뚱히 서있는 검붉은 머리의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요르문은 그의 말뜻을 한 번에 이해했다. 그의 오랜 벗은 오늘 자정 세레타 지구 중심에 위치한 켈튼 저택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저 여자를 저택에 붙잡아 두면서 ‘확인’해 보라는 거다.

    자신을 켈튼이라 주장한 여자는 라크시스가 보낸 전보 그대로였다.

    [네 친척 누님이 수도에 왔으니 모셔가도록 해. 이왕이면 걸맞은 대접도 곁들여서.]

    요르문은 라크시스의 성정을 알았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사람이니 별 볼 일 없는 사기꾼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굴 것 없이 경찰에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라크시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 자체로 요르문은 흥미가 동했다.

    살 만큼 살았다는 고대 마법사가 관심을 가질 일은 몇 없었으므로.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요르문은 드물게 대꾸 없이 라크시스의 계획에 동참했다.

    * * *

    “주인님, 금방 돌아오셨, 어머나.”

    요크 부인은 요르문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놀란 듯 입을 가렸다.

    생전 여자 손 한번 잡아본 적 없을 것 같은 주인이 본인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가씨를 데려왔다.

    검붉은 머리가 어둠 속의 루비처럼 요요하게 흘러내리는 묘한 매력의 여인이었다. 상류 귀족이라 하기엔 전문직 노동자에 가까운 경장을 한 여자는 무려 요르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에스코트 받는 솜씨도 서툴다. 회계사나 들 법한 투박한 가방을 꼭 둘러메고 내린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작정하고 유혹하면 안 넘어올 영애가 없을 미모를 가지고도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하던 주인이었다. 저 껍데기 속에 서른은 족히 넘은 남자가 들어있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

    가장 친하다는 라크시스 옌도 똑같다. 친구는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지. 둘 다 허구한 날 만나서 마법 얘기만 해대니 제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애인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자의 눈썰미는 날카롭다. 영애들도 잘난 얼굴에 다가왔다가 골방 학자의 본질을 깨닫곤 모두 떨어져 나갔다.

    저 아가씨도 애먼 데 코가 꿰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을 오랫동안 모셔온 입장에서 요크 부인은 이 상황을 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요크 부인. 헤이든은 어디 갔나?”

    요크 부인은 아가씨를 소개해 줄 생각이 영 없어 보이는 요르문을 채근하듯 대답했다.

    “암만 업무가 있다 해도 모름지기 고용된 입장에서 참으로 게으르지요? 주인님을 번거롭게 하려는 모양인지…….”

    그 말인즉, 집사 된 자가 늦게 마중을 나와 주인이 손님을 두 번이나 소개하도록 만든다는 뜻이었다.

    요르문은 피식 웃었다. 얼른 소개받고 싶어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쪽은 내 친척 누님인 레이디 시아 켈튼이네. 누님, 이쪽은 저택의 실세이신 요크 부인입니다.”

    친척이라는 말에 까무러칠 뻔했다. 이웃도 이 둘보단 닮았겠는데? 하지만 요크 부인은 이내 능숙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인사했다.

    “실세가 아니라 켈튼가의 고용인 되는 요크 부인이랍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가씨.”

    그때 저 멀리서 복식을 갖춰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집사 헤이든이었다.

    “마차까지 대동하시기에 황궁에라도 다녀오시는 줄 알았더니.”

    “그래서, 내가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랬으면 일하기엔 편했겠지만요.”

    집사 헤이든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가 요크 부인이 허리를 꼬집는 바람에 뒤늦게 시아를 발견했다.

    시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친척 누님이신 레이디 시아 켈튼이야. 누님이 묵을 방을 준비했으면 하는데.”

    헤이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요크 부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오셔서는 이리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손님께 보이는 건 실례랍니다. 주인님.”

    요르문과 시아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요크 부인이 말했다.

    “아가씨께선 잠시 응접실에 계시겠어요?”

    “무료하면 연구실을 구경 와도 좋아요, 누님. 어릴 적엔 관심 많으셨잖아요.”

    연구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헤이든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본다. 연구실이 어지간히 지저분한가.

    그것보다 있지도 않은 어릴 적을 어떻게 기억하는 건데.

    “숙녀분께 적절한 대접을 하지 않는 것도 집주인이 할 일은 아니지요.”

    실세라더니 역시 주인에게 말하는 모습도 당당한 요크 부인이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요크 부인과 헤이든의 뒷모습에서 법도와 절차를 무시하는 데 도가 튼 주인을 욕하는 것이 분명한 소곤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말도 없이 와서 폐만 끼치네.”

    “그런 말씀 마세요. 부디 편하게 머물다 가셨으면 해요.”

    요르문이 배시시 웃었다. 남대륙의 투명한 바다 같은 화사함이었다.

    ‘그렇게 웃는다고 내가 편해지겠니.’

    시아는 불편하게 마주 웃었다. 분명 라크시스는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걸 알고 있었다. 급보에 적어 요르문을 불러낸 것엔 그녀를 엿 먹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요르문도 이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당신은 진짜로 왜 절 알은척하시는데요.

    이쯤 되니 자신이 진짜 요르문의 친척 누나가 맞는 것 같다. 정말로 알려지지 않았던 친척이 있었던 거 아니야?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오래 산다. 마력량에 비례하는 젊음은 덤이다. 수명이 긴 동물들이 으레 그러하듯 마법사들은 대체로 결혼도 자식을 보는 것도 평균보다 늦게, 자유로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시아가 살던 원래 시대의 요르문은 백 살을 훌쩍 넘긴 나이로 이제 막 삼십 줄에 들어선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입양되었던 시기에 켈튼에는 이미 요르문 혼자만 남아있었고, 요르문이 딱히 친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시아는 당연히 양부에게 혈연이라고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칠십 년 전으로 떨어질 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라크시스에게 본인을 시아 켈튼이라고 소개하지도 않았을 거다. 조금만 찾아보면 켈튼의 가계 같은 건 다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뭐가 이렇게 꼬여가지고선.

    요르문은 응접실에 가만히 앉아 요크 부인의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연구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을 것이라 했다.

    ‘보통은 반대를 권하지 않나.’

    시아는 요르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켈튼의 유서 깊은 저택을 실제로 방문해 본 건 처음이었으므로.

    광룡이 수도 모르간, 그중에서도 중심지인 아르카나에서 부활하면서 인근에 위치한 세레타 지구 역시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그녀가 살던 시대의 켈튼 저택은 지금 이 저택을 본떠 작게 만든, 말하자면 신축인 셈이었다.

    구조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건축에도 유행이 흐르면서 생긴 변화였다.

    무엇보다 마도 시대의 마법사가 어떻게 연구하는지가 궁금했다. 칠십 년 후의 요르문 켈튼은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비에서 이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난간조차 짙은 나무에 섬세한 음각이 되어있었다. 반질반질한 남대륙 도자기며 조각상들이 으레 귀족들이 집에 전시해 놓듯 복도를 따라 줄지어 있다.

    요르문의 취향은 아닌 것 같았지만, 고택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연구실은 한층 복잡했다. 일단 사방이 책상이었다. 스파크가 튀는 와이어가 달린 기계와 계기판이 달린 레버 장치가 바닥 가득 깔린 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방 중심에는 속이 투명한 마정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연결된 건지, 파란 모눈종이 위로 축음기 바늘 같은 길쭉한 막대가 붉은 그래프를 자잘하게 그려내는 중이었다.

    “…마류학자답네.”

    “누님이 알아주시니 기쁜걸요.”

    또 저렇게 웃는다. 신이 나서 이건 뭐고 저건 뭐라 설명한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마류학에 문외한인 그녀가 봐도 신기하기는 했다. 요르문은 시아를 살피는 듯하더니 기계에서 소리가 나자 후다닥 달려가 이것저것 손을 봤다.

    “…됐다.”

    “뭐가 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이든입니다.”

    “들어와.”

    집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은쟁반에 편지와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노든에서 온 초대장입니다. 제가 감히 답을 할 수 없는지라.”

    노든이라는 말에 반응한 것처럼 요르문은 이내 기계에서 떨어져나왔다.

    “누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응, 다녀와.”

    “제가 실험하고 있는 게 있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요르문은 연구실 문 바로 옆 기계의 레버를 내리더니 헤이든과 함께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구경할 게 남아서 딱히 상관은 없었다.

    상상했던 마도 시대 마법사의 연구와는 다른데. 기계 사이로 흐르는 것이 마력이 아닌 전기라면 칠십 년 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별 가루 같은 빛 알갱이들이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달까. 사소한 차이 하나가 새삼 마도 시대를 실감하게 했다.

    건드리지 않고 그의 장치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이었다.

    지지직―

    방 한편에서 일자에 가까운 선을 그려내던 바늘이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사납게 그래프를 그려댔다.

    나 아무것도 안 만졌는데.

    바늘이 종이를 벗어나 책상 위를 찢어질 듯 긁었다. 날카로운 것이 지나간 자리가 흉터처럼 파여있었다.

    방 중앙에 있던 마정석에 하얀빛이 고였다. 계기판의 눈금이 정신을 못 차리고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잉 하는 소음이 조금씩 커졌다.

    ‘워어, 이러다 뭐 하나 터지는 거 아냐?’

    내가 생각했던 허용할 수 있는 시끄러운 소리는 이런 게 아니었다고. 아무리 봐도 기계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아까보다 더워진 것 같은데. 식은땀이 났다. 시아는 일이 커지기 전에 무작정 연구실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요르문을 찾았다.

    “요르문!”

    “어이쿠, 아가씨.”

    마침 근처에 헤이든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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