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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화 (5/292)
  • 5화 

    난데없이 기공식에 나타난 여자를 깰 때까지 기다려 정체를 물어보고, 대공에게서 신변을 보호해 주고,

    ‘이건 본인의 평판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식사를 권하기까지 했다. 요르문 님의 이름을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수상한 점이 여전히 많은데도.

    나 같았으면 뒤탈 없이 경찰에 넘겼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고마워지기도 한다. 거리에서 헤매는 대신 미도리 셰프의 호화로운 요리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라크시스 덕분이었으니까.

    그를 딱히 번거롭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괜찮아요. 이대로 먹어도.”

    요리가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라크시스도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지 이내 로브를 벗어 종업원에게 맡겼다.

    “짐이 있으면 맡겨두시죠.”

    평소 같았으면 흔쾌히 가방을 넘겨주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이곳의 서비스는 믿어도 됩니다. 내러 지구가 아니니까요.”

    빈민가 근처의 식당에선 손님의 짐이 종종 분실되는 경우가 있었다. 종업원이 손을 댈 때도 있었고, 뒷골목 소매치기들이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 훔쳐 갈 때도 있었다.

    그런데 고대 마법사도 내러 지구의 식당을 가나. 빈민가에 걸음 할 일 없는 상류층은 내러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어쨌건 라크시스의 말에 그제야 분실 걱정이 들기 시작했으나, 애초에 좀도둑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일기장.

    이건 인간이 동물로서 느끼는 본능 또는 육감과도 같았다. 일기장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남의 짐에 손을 대려는 자들이 돈이 가득 든 지갑과 별 볼 일 없는 노트 중 무엇을 가져가려 할진 뻔했지만, 사람이 기우에 시달리는 건 그런 논리적인 판단을 못 해서가 아니었다.

    라크시스는 눈앞의 여자가 가방을 대단한 가보라도 되는 듯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곤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지금까지 차림새나 행동을 살펴본 바로 딱히 별 볼 일 없는 물건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식사를 권하던 때의 판단은 미묘하게 결이 달라져 있었다.

    훈제 연어 샐러드와 식전주가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먹어봐요. 입맛이 좀 돌 겁니다.”

    그의 권유대로 식기를 들어 샐러드 한 점을 집어먹었다. 상큼한 맛에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음식이 들어가자 그제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근처에서 약간의 웅성거림과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짝 힘이 들어간 종업원의 안내가 들렸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라크시스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는 게 보인다. 이유도 없이 웃을 사람이 아닌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시아는 저도 모르게 먹던 자세로 얼어붙어 버렸다.

    “라크, 미안하네. 내가 조금 늦었지?”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까 하는 미청년이 시원시원한 움직임으로 종업원에게 진남색 로브를 맡기며 다가왔다.

    길게 늘어뜨려 묶은 물빛 머리가 남자의 한쪽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저런 남자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제국에 하나밖에 없었다.

    “친척 누님을 이렇게 수도에서 방황하게 하면 쓰나.”

    라크시스가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젊은 요르문 켈튼.

    바로 친척 동생 요르문이었다.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치우지 않았던 자리에도 샐러드와 식전주가 놓인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제야 라크시스가 일부러 세 명 분의 자리를 테이블에 준비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사기꾼……!’

    그러면서 나한테 식기를 치워주네 마네 그랬던 거냐고. 아주 제대로 낚였다. 잠시지만 그가 배려심 넘친다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지.

    라크시스는 함정을 판 것이었다. 요르문을 통해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함정.

    이건 무조건 경찰서행이다.

    노려보거나 말거나 라크시스는 요르문을 재빨리 앉혀 대화를 시작했다.

    “소개 순서가 이상하게 됐지만 말이야. 요르문, 이쪽은 네 친척인 시아 켈튼.”

    라크시스의 미소가 이토록 사악해 보일 줄이야.

    “시아, 저쪽은 당신의 친척 동생인 요르문 켈튼입니다.”

    친척이란 말이 거짓인 걸 아니까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는 거다. 세상 어느 친척이 생면부지인 남을 통해 소개를 받냐고.

    요르문의 반응이 두려웠다. 굳게 닫힌 입을 보니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고 켈튼을 사칭한 사람이라며 경찰에 넘길 것 같다.

    친딸이었으면 친족 검사라도 해보자고 우길 텐데, 아쉽게도 요르문과 그녀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먼 친척이라며 우길 거리조차 없단 말씀이다.

    그때 요르문과 눈이 마주쳤다.

    “누님! 연락도 없이 이리 오시면 어떡합니까!”

    뭐?

    “술란에서 모르간은 기차로도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데요. 혹여 오는 길에 몸이라도 상하진 않으셨는지 라크의 전보를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예고도 없이 누님을 외쳐대며 요르문이 시아의 손을 잡았다. 고생시킨 게 미안한 것처럼 몇 번이고 손등을 쓸어내린다.

    낯선 감촉에 그녀가 화들짝 손을 빼내 감싸 쥐었다.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소름이 오소소 돋아있었다.

    아무리 마법사는 잘 안 늙는다지만 그래도 미래의 양부와 저 얼굴은 분명 달랐다.

    그래, 이건 처음 보는 남자가 대뜸 손을 잡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그런 걸 원체 신경 안 쓰는 성격이고, 칠십 년 후는 훨씬 개방적인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거랑 그거는 별개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어릴 적에 하듯 그만…….”

    제가 요르문과 어릴 적에 만난 적이 있어요? 하마터면 라크시스에게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당숙께선 잘 계시지요? 사업은 잘되고 계시고요.”

    “어? 으응…….”

    “부친께선 무슨 사업을 하십니까?”

    라크시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어온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요르문의 입에서 나온, 자신도 몰랐던 출신이 번득이는 대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남대륙에서 면화를 수입하고 계셨어요. 요즘 들어 많이들 찾는 품목이라 운 좋게 번창하고 있네요.”

    술란은 남대륙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제국 본토의 최남단이다. 제국은 이 시대 기준으로 얼마 전 남대륙 가멜과 인근 제도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고 독점 교역 협정을 맺었다.

    가멜산 면직물은 제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갈리프도흐 근대사 교양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었다.

    “선견지명이 있으셨군요.”

    “노련함이라고들 하죠. 아버지는 기회를 잘 잡으신 것뿐이랍니다.”

    “그런 분이 어째서 호위를 붙여 보내도 모자랄 따님을 이렇게 수도에 보내셨을까.”

    사기 피해 당사자인 요르문은 가만히 있는데, 어째 라크시스가 더 난리다. 패트릭이 생각나는걸.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술란에서만 살아오다 보니 수도가 이렇게 무서운 곳인 미처 줄 몰랐네요.”

    아버지는 절 끔찍이 사랑하신답니다. 과장되게 말투를 공손히 하며 웃어 보였다.

    미래에 아버지가 될 분 앞에서 이러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죄송해요, 요르문 님.

    라크시스는 무얼 생각하는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다들 이러지 말고 식사하지요. 가재찜은 속이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가재가 나온 줄도 몰랐다. 애피타이저 접시가 어느새 치워져 있고 종업원이 옆에서 큼직한 가재를 먹기 좋게 손질하고 있었다.

    요르문은 먼저 나서서 가재찜을 덜었다. 시아의 접시에도 덜어주었다.

    “누님,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해요. 이따 저택에서 마저 모실 테니 화는 푸세요.”

    저 진짜 화 안 났는데요. 하지만 시아는 그가 오해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이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잠자코 가재를 먹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도리 셰프의 요리는 명성만큼 대단했다. 입 속에서 살살 녹는 매콤한 가재살을 배부르게 먹고 나자 기분까지 상당히 좋아졌다.

    계산을 하려는데 문전에서 거절당했다.

    “신사분께서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라크시스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시아는 곧바로 뒤쫓아가 로브 소매를 붙잡았다.

    “저보고 각오하라면서요. 이러기 있어요?”

    “원래 식사는 권한 쪽이 내는 겁니다.”

    돈을 아낄수록 좋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그가 저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얻어먹기로 한 식사 값을 낸 걸까.

    “이런 식으로 빚진 기분 들게 하는 거라면…….”

    라크시스가 반색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빚지게 한다라. 뭐, 그것도 좋네요.”

    그가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마법 염료라도 바른 듯 빛나는 은발 밑으로 푸른 눈이 뜻밖에 화사하게 휘어있었다.

    라크시스가 속삭이듯 귓가에 말했다.

    “그럼 다음에 만나면 사주시는 걸로 합시다.”

    뭐, 다음? 설마 또 만나자고?

    그사이 라크시스는 요르문에게 가서 무어라 말을 하더니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 파란 마법진이 잔상처럼 남았다 사라졌다.

    “라크!”

    스크롤을 쓴 건가? 아니 그런 건 또 대체 언제 꺼내 쓴 거람.

    “요르문 니, 아니 요르문. 라크는 어디 갔어요?”

    당황하니 존대와 반말이 마구 뒤섞여 나왔다. 요르문의 친척 누나를 연기해야겠다는 결심이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현장에 가봐야죠. 아르카나 중앙역은 이제 첫 삽을 떴으니까요.”

    아. 그런 거였구나.

    “말씀은 편하게 하세요. 오랜만에 만나 어색하셔서 그러신 거라면.”

    “아,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섭섭할 뻔했네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데, 대로를 달리는 수십 대의 마차 중 하나가 분수대를 빙 돌아와서 멈춰 섰다.

    “타시죠, 누님. 회포는 저택에 가서 풀도록 해요.”

    동창회에서 술 먹고 탔던 마차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갈리프콜 대신 마정석의 노란빛이 증기 엔진 부근에서 빛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랄까. 검은 연기로 얼룩진 뒤꽁무니가 없는, 금장이 둘러진 깔끔한 외관이 낯설었다.

    운전석이라기보단 마부석에 가까운 맨 앞좌석에서 켈튼의 마부가 내려오더니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스크롤을 쓸 줄 알았는데.”

    스크롤에 하도 데여서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전 누님을 모시려고 하는 거니까요.”

    스크롤은 뭐랄까, 편리한 이동 수단이긴 하지만요. 요르문은 사교계의 레이디들에게도 해보지 않았던 에스코트를 해주며 시아와 마차에 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리는 마차에 닿았다 떨어진다. 시아는 과거에도 여전한 켈튼의 위상을 느끼며 창가에서 떨어져 앉았다.

    한 공간에 젊은 날의 요르문, 그것도 그녀에게 누님이라 부르는 양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으나, 졸음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3517년에 떨어진 지는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는 갈리프도흐 동창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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