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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화 (4/292)

4화 

“갈리프도흐가 신기하십니까?”

그을림 하나 없이 깨끗한 외관이 낯설다. 광룡이 뿜어낸 브레스 탓에 미래엔 곳곳이 검게 타있었다.

“모르간 제1 대학의 별칭이죠. 당신의 친척 동생이 있는 곳인데.”

“알아요. 저도 거기 다녔어요.”

“…갈리프도흐 출신이십니까?”

켈튼의 일원이라는 소개를 들은 이래 라크시스가 또 한 번 동요했다.

“회복학 전공이었어요. 잠깐, 뭘 그렇게 의심하듯이 보세요? 아무리 학장이어도 학생 개인정보 마음대로 열람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라크시스 옌은 죽기 전까지 갈리프도흐의 학장을 겸하고 있었지. 헤어지고 나면 진짜 열람해 볼 생각이었나 보다.

일부러 그를 더 뚫어져라 보았다. 불법을 저지를 것 같은 사람을 훑는 시선으로. 혹시라도 열람하면 정말 큰일 난다.

“전 준법정신이 철저한 사람입니다. 뭐가 됐든 몰래 쉼터에 숨어있던 사람보다는 낫죠.”

“그건 이동 스크롤 좌표를 잘못 설정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왜 안 믿는 것 같지.

견학은 금방 끝났다. 아르카나 중앙역 완공식이었다면 모를까. 기공식인데 당연히 볼 게 없지. 애초에 핑계에 불과한 형식적인 견학이다.

대공의 측근에게 목격되어 증거로 박제될 만한 그림이 그려졌다 판단했는지 라크시스는 시아와 함께 시가지로 빠져나왔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그러게. 아르카나 구경도 하고 싶지만 일단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일기장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아직 못 읽은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도무지 일기장을 꺼내 읽을 수가 없었다. 새파란 시선이 가방에 처박힌 정수리를 꿰뚫었다.

조심스레 눈알만 굴려 앞을 봤더니 역시나였다. 새하얀 마법사가 대답을 듣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자세로 아까처럼 삐딱하게 서있었다.

여기선 안 되겠다. 이제 서로 볼일도 끝나지 않았나.

고대 마법사의 존재가 신기해 조금 더 만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와 일기장 내용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 꺼냈던 일기장을 도로 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작 교수 앞에서 짓던 가식적이고 세상 친절한 바로 그 미소였다.

“애초에 요르문을 찾아온 거니까요. 만나러 가야죠. 아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럼 이만.”

한술 더 떠 인사까지 했는데 라크시스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켈튼 저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데. 걸어가시려고요?”

아, 그렇겠네. 스크롤.

스크롤을 살 건 아니었지만 이 기회에 뭐 하나 물어봐야겠다.

“라크.”

시아는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들었다.

“이 돈 쓸 수 있나요?”

알리나 디아우스 세페란테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푸른 비스크화(貨)였다. 라크시스는 이젠 정말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구깃한 지폐와 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외국에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어디 변방의 오지?”

멀리서 오긴 했지. 무려 3587년에서.

“알리나 황제가 두 번씩이나 화폐 개혁을 하긴 힘들 겁니다.”

“그러니까 쓸 수 있다는 말이죠?”

“당연한 말씀을.”

이거야말로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각 지방 영지마다 남아있는 구화폐를 매개로 암암리에 형성되던 검은돈을 양지로 이끌어내기 위해 알리나 황제는 재위 초에 화폐 통일이라는 전쟁을 선포했었다. 의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몇 번이고 고배를 마셨던지라 개혁을 추진하고 근 십 년만인 3517년에 겨우 비스크화를 찍어낼 수가 있었다.

‘동창회 간다고 외출한 김에 은행을 들르길 잘했네.’

돈도 넉넉하겠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 앉는 게 좋을 것 같다. 칠십 년 전의 아르카나 번화가는 또 어떤 느낌이려나. 이왕 마도 시대로 온 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요리를 먹어볼까.

“라크, 진짜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나중에 만나면 보답할게요. 저 이제 진짜 가요.”

어차피 다시 못 만날 테니까. 공수표는 이럴 때 남발하는 거다.

라크시스의 눈빛이 아까부터 심상치 않았다. 마치 사기꾼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짓말한 게 있으니 불안하기는 했는데. 설마 요르문 님의 친척 계보가 생각나기라도 한 걸까.

이럴 땐 재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시아는 몸을 돌려 광장의 인파 속으로 달리듯이 걸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잠시만요.”

셔츠 소맷자락이 어딘가에 걸려 몸이 휙 당겨졌다.

“…식사하셨습니까?”

놀랍게도, 라크시스 옌이었다.

“안 하셨으면 같이 하죠.”

셔츠 소매를 붙잡은 손이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식사를 권유하는 사람치고 하얀 마법사의 얼굴엔 특별한 호의나 기대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던진 말인가 하면은 그것도 아니다. 초조함이 슬쩍 보인다.

이것은 도망치는 상대를 붙잡기 위한 수단이다. 살짝 긴장된 눈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이럴 때일수록 태연하게.

“보답을 식사로 받게요?”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고작 그 정도로 되겠느냐, 혹은 뭐가 그렇게 급해서 붙들기까지 하느냐. 라크시스가 딱 이렇게 해석할 만한 표정을 곁들여서 말이다.

“좋아요. 대신 라크가 안내해 줘요. 전 어디가 맛있는지 잘 모르거든요.”

“뭐, 대가를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사주신다면야.”

“그럼 왜 같이 먹자고 한 건데요?”

“점심때가 됐고, 마침 배고팠고, 그쪽도 아직인 것 같았으니까요.”

뭐야. 혼자 먹기 싫어서 그런 거야? 긴가민가했다.

“저 산다면 사는 사람이에요. 비싼 곳으로 가죠.”

물가는 지금이 훨씬 낮겠지. 점심 한 끼 정도야 충분히 사고도 남는다.

라크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에스코트가 아니었다.

‘잡으라고?’

남자의 손은 마법사답게 길쭉하니 예뻤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손목의 핏줄이 유난히 파랗게 도드라진다.

아귀에서 느껴지는 뼈대가 보기보다 꽤 단단했다. 이 시대에선 이렇게 뭘 잡으라며 내미는 게 일상인가? 에스코트의 일환인가 싶어 덥석 그 손을 잡자 라크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 꽤 잘 먹거든요.”

봄바람 같은 미소에 홀려 시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손과 손이 맞닿은 피부에서 아주 작은 반짝임이 일었다 사라진 것을.

* *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맛집은 자고로 골목에 있건만. 그들이 멈춰 선 곳은 광장 초입 코너에 자리한 웅장하고 화려한 석조 건물이었다.

“여긴 식당이 아닌데요?”

금테를 두른 동판엔 분명 이렇게 써있었다.

[아르카나 중앙 우편국]

“볼일이 있어서요. 금방 끝납니다.”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고요. 라크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마도 시대의 우편 문화는 상당히 발달했다고 들었으니까.

별천지였다. 삼 층은 족히 되는 높이의 까마득한 천장 아래 수도 모르간의 시간을 중심으로 동부, 서부, 식민지인 남대륙 가멜과 제국령 섬들의 시계가 제각기 돌아간다.

부속품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시계 밑으로 태엽 소리와 빛을 뿜는 기계들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대형 배달물 수레가 바닥을 긁어대는 소음마저 사람들의 소리에 묻힌다.

이런 곳에서 용케 볼일을 보는 게 신기할 정도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사람에게 치이지 않도록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지 않게 감싸곤 인파를 뚫으며 창구로 갔다.

무표정하게 일하던 직원이 앞도 안 보고 대꾸했다.

“줄 서세요.”

“급보를 보내려고 합니다만.”

찌든 얼굴의 마른 여자가 얼굴을 들더니 반색하는 듯하다 다시 서류에 고개를 박았다.

“옌의 마법사께선 어느 곳의 어떤 분께 보내시려는지요.”

“편지지도 한 장 부탁합니다.”

“1실랑 추가됩니다. 고급지는 2실랑인데 필요하신가요.”

고저 없는 물음에 라크시스는 아무 종이나 집어 들어 몇 문장을 휘갈겨 썼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그의 뒷모습이 꽤 성급해 보인다. 이렇게 급한 일이 있는데 점심을 먹자고 한 건가?

“바빠요? 그러면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되고요.”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라크시스의 편지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이동하는 게 보였다. 창구마다 실려 나간 우편물이 푸른 빛을 통과하자 제국 각지로 분류된 벨트로 알아서 열을 맞춰 넘어간다.

급보라고 하더니 라크시스의 편지가 조용히 날아올라 벨트 맨 앞에 놓였다. 마법진에 닿은 편지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증기가 폭 나오는 기계 위로 지역명 대신 ‘수신인 추적’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급보 하나에 무려 오만 비스크짜리 지폐를 꺼내 든 남자 때문에 직원은 한참 거스름돈을 셌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아르카나의 식당 거리로 이끌었다.

“이제 진짜 점심 먹는 거죠?”

“맛있는 곳으로 데려갈 테니 걱정 마요.”

간판에 떡하니 적힌 개업 년도와 셰프의 이름을 보자 시아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미도리 셰프 식당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가장 사랑하는 요리사의 식당이기도 하죠.”

알리나 황제가 생전에 가장 즐겨 먹었다는 매운 가재 요리 전문의 전통 있는 식당. 더운 기후의 남대륙 가멜에서 직접 공수해 온 신선한 해산물만 취급하여 하루에 받는 손님 수도 제한적이라는 맛집!

이 식당도 광룡의 부활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갈리프도흐에 다닐 때 수업만 하면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던 교수가 있었는데, 덕분에 가보지도 못할 식당의 명성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기억이 있다.

“혹시 가리는 음식 있습니까?”

없다. 오늘따라 더 없다. 세차게 고개를 젓자 라크시스는 입구에서 익숙하게 손짓하여 지배인을 불렀다. 일사불란하게 세팅된 테이블로 안내받자 빈 잔에 조르르 물이 채워진다.

유명한 요리들은 라크시스가 알아서 주문했다. 종업원이 자리를 뜨자마자 라크시스를 불러 물었다.

“라크. 누가 또 와요?”

“왜 그런 질문을.”

조심스레 속삭이자 라크시스도 덩달아 몸을 수그려 속삭였다.

“테이블 세팅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분명 이쪽은 두 사람인데,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는 삼 인분이다. 덩그러니 비어있는 자리가 마치 누군가를 채워줘야 할 것처럼 보였다.

“다른 일행이랑 헷갈렸나 봅니다. 불편하시면 치우라고 할까요?”

내 반응을 신경 쓰는 눈치다. 이제 와서야 문득 든 생각인데, 눈앞의 고대 마법사란 자는 생각보다 상대방을 배려해서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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