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세페란테 황가의 17대 황제이자 헬릭스 황자의 외종조부가 되는 차탈 세페란테.
무위가 대단하다는 역사의 기록이 사실인지 제복 너머로 드러나는 체격이 좋다. 그가 남겼던 업적들처럼 인상도 선하고 좋아 보였다. 전해 내려오는 초상화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예상치 못한 삼자대면에 대공과 고대 마법사, 수상한 침입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곤란한 건 난데 어째 라크시스가 더 긴장한 것 같아 보이네.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로군. 천하의 라크시스 옌에게 숨어서 만나는 여자가 있다니!”
차탈이 난데없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황망히 눈꺼풀을 떨고 있는 라크시스를 지나쳐 곧장 시아에게 손부터 내밀었다.
“노든의 차탈 세페란테라고 합니다만. 레이디의 성함은?”
온화한 성품이라 배웠는데 실제로 만난 차탈은 저돌적이기가 맹수 저리 가라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미친 듯이 눈짓을 보냈다. 대공에게 뭐라고 말해?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해? 하지만 라크시스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차탈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얼굴로 실실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습을 기대하긴 글렀다.
“시아 켈튼이라고 불러주세요.”
켈튼이라는 말에 대공은 라크시스와는 다른 의미로 눈썹을 밀어 올렸다.
“…설마 요르문의?”
“네. 요르문의 먼 ‘친척’이에요. ‘친척’ 동생을 보러 수도에 올라온 참이거든요.”
친척이라는 단어에 두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쐐기를 박았더니 차탈의 눈동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대와 다른 반응이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공은 굴하지 않았다.
“요르문에게선 레이디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데. 이쪽, 아니 옌 경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전하!”
의지가 보통이 아니시네. 라크시스가 소리치는데도 대공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니 라크시스 옌이 어지간히 오래 혼자 살긴 했나 보다.
아홉의 고대 마법사 중 살아남은 사람은 라크시스 옌이 유일하다고 알려진다. 제국이 생기기도 전인 고대 마도 시대, 인간의 사념에 물든 용이 타락해 대륙을 파괴했고 그때 고대 마법사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광룡의 심장을 봉인했다.
광룡은 일기장 속의 시대, 3517년을 기준으로 오 년 후 다시 깨어난다.
최후의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이 광룡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지만 영광의 마도 시대는 재앙과도 같은 그날을 기점으로 몰락한다.
대기를 채우고 있던 마력 대부분이 봉인에 휩쓸려 증발하면서 마법으로 지속되었던 모든 것들이 동력을 멈추는, 대문명의 종말이었다.
차탈의 기습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라크시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켈튼 경이 친척 누님의 아르카나 중앙역 공사 현장 견학을 부탁하기에 제가 구경시켜 주기로 한 겁니다.”
“누구 허락받고 국가 사업장을 구경시켜 줘?”
“전하.”
“됐다. 고대 마법사가 그러겠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말리나?”
제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고대 마법사는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들은 신의 사도였고, 세계가 창조될 때 태고룡의 심장에서 비롯되어 영생을 허락받은 유일한 존재였다.
차탈은 김이 샜는지 훨씬 더 정중하고 데면스러운 태도로 다가왔다.
“레이디 켈튼.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멋대로 찾아와 폐를 끼쳤는걸요. 옌 경을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이렇게 무릎을 구부리는 게 이 시대의 예법이었지. 있지도 않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성의 없이 답했다.
시선이 움직이다 마법사의 푸른 눈과 맞닿았다. 짧은 눈빛 교환에서 순식간에 대화가 오갔다.
이쯤이면 대공이 가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이대로 쫓아내 보도록 합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차탈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옌 경을 그렇게까지 감싸주시는 걸 보니 레이디 켈튼은 참으로 상냥하신 분이로군요.”
침묵 끝에 대공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해버리고 말았다.
“대공 전하. 무엇을 생각하셨든 전혀 아닙니다.”
차탈은 대답 대신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차탈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 대공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려다 뒤돌아선 그가 라크시스, 정확히 말하면 잔뜩 약이 올랐으나 차마 황족에게 욕을 할 수는 없었던 독거 마법사를 겨냥했다.
“옌 경, 천천히 나오도록. 밖에 딱히 바쁜 일 없으니까.”
문이 배려하듯 살포시 닫혔다. 뒷모습을 노려보는 파란 시선이 아주 살벌하다.
“후.”
차탈이 사라졌으나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다 대공이 던지고 간 폭탄 때문이었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애꿎은 셔츠 자락만 만지작대면서 라크시스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대공 전하는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른 분이시네요.”
“겉모습은 가식이죠. 속에 뱀 한 마리는 품고 있는 자입니다.”
뱀이라고 모두 나쁜 건 아니지만요. 라크시스는 성마르게 얼굴을 문질러댔다. 귀 끝은 여전히 빨갛다.
“그나저나 호칭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호칭이요?”
“황제에겐 아직 자식이 없고, 대공은 지지자가 많거든요.”
한 나라에 황제가 둘 이상 존재할 수는 없다. 한 번의 말실수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면 이쪽도 보통 곤란한 게 아니었다.
“어, 음. 고마워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한 번 쳐다보곤 대답했다.
“고마울 것까지야.”
마법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낯을 포장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까부터 피어오르던 의구심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켈튼가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그 말은 켈튼가의 구성원 같은 기본 정보는 귀족 사회에서 어지간히 까발려져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시아 켈튼이라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다. 당연하다. 요르문에게는 방계가 없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수상한 것투성이였다.
만약에 그녀가 켈튼가의 일원이라는 게 사실이더라도, 과연 그 정도 되는 영애가 단신으로 수도를 헤매면서 기본 상식도 없이 함부로 황제라는 말을 입에 담던가?
평소였으면 곧바로 경찰에 넘겼을 테지만 미묘한 호기심이 그를 붙잡았다.
유창한 모르간 억양을 보건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옷차림이나 행동은 상류 사회와 거리가 멀다. 이곳 물정을 잘 모르는 척하지만 정보의 괴리가 있을 뿐 알건 다 아는 것 같고.
진짜 사기꾼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며 라크시스는 태도를 바꾸어 눈앞의 불청객을 조금 더 관찰하기로 했다.
“할 일 없으면 온 김에 견학하고 가시죠.”
“견학이요?”
“아까 공사 현장에 견학 온 요르문의 친척 누님이라 전하께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아, 요르문 니, 임 말이지. 요르문 님의 누나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일단 여기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요르문 켈튼의 먼 친척 행세를 자연스럽게 해내야만 했다. 언제 다시 원래 시대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정신도 바짝 차려야 했다.
‘일기장을 끝까지 못 봤는데.’
일기장 뒤엔 분명 이 쉼터를 나서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이 적혀있을 것이다. 라크시스의 관심이 소홀해질 무렵 반드시 정독해서 외워버려야 한다.
조심해야 했다. 일기장의 내용을 들키는 순간 요르문의 누님으로 친 사기는 가벼운 애교가 된다.
일기장에 적힌 건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될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녀가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시고. 일단은 나갑시다.”
라크시스가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이 시대의 레이디들은 이럴 때 상대에게 팔을 감았던가? 초면인 사람과 접촉하는 건 원래 시대에서 흔한 일이 아니었다. 갈피를 못 잡고 있자 라크시스가 재촉했다.
“바깥에 의심병 걸린 대공 하나가 있어서 말입니다.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겠군요.”
가까이서 본 남자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원래 시대에서도 시아는 꽤 큰 편이었는데, 라크시스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살짝 들어야 했다.
“레이디 켈튼?”
너무 뚫어져라 봤나. 그렇지만 신기한 건 어쩔 수 없다. 고대 마법사가 내가 살던 곳의 칠십 년 전 모습을 구경시켜 주겠다는데.
게다가 상상했던 것보다 미인이었다. 마력이 깃들어 반짝이는 은발이 그를 사람을 홀리는 요정처럼 보이게 만든다. 입술은 왜 그렇게 물 먹은 앵두 같은 건데.
“…그렇게 부르면 국가 사업지에 몰래 데려와 구경시킬 만큼 가까워 보이지 않는데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레이디 켈튼이라는 호칭이 어색했던 걸까?
아니다. 갈리프도흐의 교수들에게서 켈튼 양이라는 소리는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그럼 시아?”
듣기 좋다. 목소리빨인가. 맑은 종소리가 연상되는 울림이 귓가에 닿는다.
“괜찮네요.”
라크시스는 호칭이 뭐가 됐든 상관없는지 일단 문부터 열었다. 안과 밖을 단절시키던 네모난 판자가 사라지자마자 환희와 생기가 뜨거운 열기처럼 쏟아진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알록달록한 종이 가루가 발치에 밀려들었다.
시아는 마구 뒤엉키며 눈을 찔러대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외치듯 물었다.
“그럼 당신은 뭐라고 부를까요?”
앞서가던 라크시스가 멈췄다.
“라크.”
그는 별 고민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거면 될 것 같군요.”
* * *
“딱 붙어 다녀요.”
모든 것이 찬란했다. 마폭탄이 지축을 울리는 것조차 구경거리인지 펜스 너머에서 사람들이 무지갯빛으로 터지는 땅을 신나게 지켜보고 있다.
색색의 깃발이 머리맡에 드리우고, 오밀조밀 들어선 오래된 건물엔 마도 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텅 빈 아르카나 중앙역 부지 너머로 거대한 동상이 보였다. 용의 심장에 칼을 꽂은 아홉의 마법사. 분수대 뒤편을 장식한 동상의 자리에는 후에 아르카나 시계탑이 들어서게 된다.
시계탑은 종말 이후 광룡에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다. 수도 모르간의 시설 대부분이 파괴된 후 재건된 광장은 지금보다 넓고 황량했다.
대공을 마주칠까 전전긍긍하며 현장을 활보하는 라크시스의 뒤를 따르면서 시아는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뒷골목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라고 어둠이 없겠냐마는 글쎄. 대놓고 드러난 것과 찾아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진 않겠지만,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셔야……. 시아. 대체 어딜 보고 있습니까?”
라크시스의 시선이 시아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 고정되었다.
회색의 신전 비스무리한 거대한 건물이 광장 반대편에 무리 지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