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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화 (2/292)
  • 2화 

    “카트린, 나 어떡해? 시아가 의술원 갔다고 나 버리려나 봐.”

    이런 술은 거절할 수도 없다. 곤란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상대가 마리이기 때문이다. 의술원에 가자마자 너무 바빴던 탓에 그간 마리가 서운해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술잔이 기운다.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핑 돌아 휘청거리기 시작할 무렵, 마리와 카트린과 함께 술집을 나섰다.

    “시아, 괜찮아? 마차에서 내려도 혼자 걸어갈 수 있겠어?”

    아니.

    “카트린! 여기 마차 잡아놨어! 시아 가방 챙겨!”

    두 사람이 취객 하나를 꾸역꾸역 마차에 구겨 넣는 모습에 기사가 좀 놀란 듯했다. 그러나 목적지를 듣고 삯을 선불로 받자마자 프로답게 곧장 거리를 내달렸다.

    갈리프콜 연기를 뿜으며 마차가 텅 빈 거리에 궤적을 남겼다.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별이 쏟아져 내리는 아르카나 광장에 새하얀 시계탑이 달빛을 받아 빛난다.

    분수대를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세상도 둥글게 돌았다.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밤거리 시장이 요지경처럼 오묘하고 반짝이는 풍경으로 보였다. 멈춰서 보면 어둡고 지저분해 보일지 모르는데도.

    패트릭 자식이 말했던 감기만 걸려도 엄살떠는 부자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그래도 예쁘네.”

    한참을 그렇게 달려 마차는 의술원에 도착했다. 술도 좀 깨서 한결 머리도 가벼워졌다.

    의술원은 고요했다. 까마득한 내정을 바라보며 정문을 넘어서려는데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뎅―

    자정을 알리는 울림이 열두 번 이어졌다. 아르카나 광장의 시계탑이었다.

    기시감이 들면서 불현듯 낮의 기억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의술원 정문에서 들었던 아르카나 광장의 종소리였다.]

    그랬었지.

    왜 기시감이 드나 했다. 결국 오늘 하루는 일기장에 쓰인 대로 되지 않았나.

    술이 확 깼다.

    하지만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자각하는 동시에 시야가 창백하게 번지며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 70년 전의 아르카나 】

    매캐한 연기가 착실하게 코 속으로 파고들며 정신이 들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기침을 해대며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청소를 언제 했는지 모를 더러운 마룻바닥이었다.

    술집에서 잤나.

    아닌데. 마차까지 탔는데. 하얀 빛이 아릿하게 잔상으로 남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제야 어젯밤 일기장대로 하루가 흘러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그만 창으로 흘러든 햇살에 뽀얀 먼지가 꽃가루처럼 나풀거린다. 아무리 눈알을 굴려봐도 딸린 방 없는 이 작은 공간은 기억에 없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한 가운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공간에 시아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숨을 죽여가며 그녀를 지켜보는 듯한 오싹함.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울 만치 집요하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깨어나신 거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계속 기절한 척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목소리를 들으니 미성의 젊은 남자다. 엎어진 채 보이는 건 발뿐이지만 열심히 탐색해 본다.

    하얀 구두 위로 흙먼지가 소복이 달라붙어 있다. 바닥에 끌리는 순백의 로브 자락도 새카맣게 먼지가 묻었다.

    참 더럽게 산다, 싶다가 이상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요새 저런 로브를 입는 사람이 있나?

    고대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고대 마법사?

    ‘일기장!’

    시아는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 옆에 서있던 남자는 시아의 정수리에 그대로 턱을 가격당했다.

    “아야야……. 괜찮으세요?”

    “제가, 괜찮아 보입니까?”

    남자가 짜증을 잔뜩 담은 말투로 대꾸했다. 그제야 남자가 제대로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턱만 빼면 남자는 달빛을 머금은 듯 온통 하얬다. 얼핏 가녀리게 보이는 얼굴이나 눈매가 퍽 날카롭다.

    박물관에나 걸려있을 법한 예식 로브 위로 은발이 반짝였다. 마도사학 책에서나 봤던, 현시대에선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던 바로 진짜 은발.

    남자의 정체를 단박에 직감할 수 있었다.

    “…라크시스 옌?”

    남자는 찡그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뭘 그렇게 보고 서있습니까?”

    헐. 진짜인가 봐.

    일기장에 쓰인 건 장난이 아니라 예언이었다.

    “죄송해요. 턱 아프시죠. 그런데 제가 지금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서있는 고대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 가방부터 뒤졌다. 가방이 몸에 붙어와서 다행이다. 재빨리 가장 마지막으로 봤던 부분을 펼쳤다.

    “…이게 뭐야.”

    아르카나 광장의 종소리 얘기를 끝으로 텅 비어있던 종이가 새카만 글자들로 꽉 차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난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현장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뭐?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고대 마법사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알면서 여길 들어온 겁니까?”

    “죄송한데 진짜 잠시만요.”

    [그래. 라크시스 옌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차탈 황제의 철도 사업에 동참했었으니까.]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손바닥만 한 이 먼지투성이 공간은 앞으로 제국 교통의 요충지이자 수도 모르간을 관통하는 아르카나 중앙역이 될 공사 현장의 인부 쉼터였다. 라크시스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관악대의 연주와 폭죽 소리,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엉켰다. 직접 목격한 창밖의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정말 아르카나 중앙역이 없잖아.”

    거대한 기차역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있는 대신 휘장 달린 단상 너머로 수많은 인파가 넘실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빛무리가 일며 사람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동 스크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돛을 펼친 비행선이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른다. 정령들을 풀어 꽃가루를 날리는 마법사도 보인다.

    모든 것이 칠십 년 전의 마도 시대를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미쳤어.”

    “감상은 다 끝나셨습니까?”

    일기장 뒤 내용이 더 남아있었지만, 의심을 가득 품은 눈초리로 쳐다보는 남자를 더 이상 무시하긴 힘들었다.

    “일단은요.”

    “궁금한 게 산더미 같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해봤자 불안해집니다만.”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에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변명도 귀찮았다. 마도 시대가 막을 내린 칠십 년 후의 시대에서 왔다고 한다면 라크시스 옌은 고개를 끄덕일까? 어차피 안 믿어줄 게 뻔했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정말로 그 말을 안 믿는 눈치였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있는 자세부터가 그 증거였다.

    “이름은?”

    “시아 켈튼이요.”

    “켈튼? 그 꼬맹이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켈튼이라는 말에 라크시스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무심결에 말하고 나자 아차 싶었다. 켈튼가는 이 시대에도 존재할 테니까. 그런데 이 싸한 느낌은 뭘까.

    왠지 그가 말하는 꼬맹이가 누군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 요르문 님을 말씀하세요?”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님?”

    젠장. 맞는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이젠 어떻게 이 대화를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이었다.

    “아아, 제가 요르문의 먼 친척 누나예요. 오랜만에 놀래주려고 아무 말 없이 수도에 온 바람에.”

    잔뜩 의심하던 것치고 라크시스는 조용했다. 보아하니 그도 켈튼가의 사정은 잘 모르나 보다.

    그렇게 얼떨결에 아버지의 누나가 되었다. 친아버지였으면 거짓말하기 더 찜찜했을 텐데.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지.

    “요르문 니, 임이랑 친하세요?”

    “글쎄요. 친척 누님이란 분이 보시기에 제가 그 꼬맹이와 친할 것 같습니까?”

    안 친하군.

    차라리 다행이다. 안 친하다면 굳이 요르문 님에게 가서 네 친척이 수도에 왔다느니, 그 사람이 기공식에 난입했다느니 하는 걸 캐묻지 않겠지.

    “안 친하게 지내주셔서 감사해요.”

    “예?”

    고대 마법사가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축하용 폭죽과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터졌다. 두 사람이 들어있는 쉼터의 마룻바닥까지 지진이 난 듯 떨렸다.

    “뭐, 뭐예요?”

    시아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양 몸을 떨었다. 라크시스는 굉음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터질 텐데요.”

    콰과광―

    “악! 뭘 터트리는데요?”

    “마폭탄이요. 지하에 화물선이 다닐 공간을 확보해야 하니까요.”

    아르카나 중앙역이 제국의 중심지가 된 건 여객 철도와 화물철도가 동시에 다니는 최초의 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북부 지르가나의 마정석 광산과 서부 에이즈번의 갈리프콜 광산에서 시작된 화물철도가 제국 전체로 확장된 이래, 수십 개의 선로를 화물 운송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다.

    마차나 이동 스크롤은 목적지를 정교하게 설정할 수 있는 대신 매우 느리거나 혹은 비쌌다. 당시 대공이었던 차탈은 여객 노선 개발을 알리나 황제에게 권했고, 알리나 황제는 심사숙고 끝에 철도 사업 전권을 차탈에게 주어 아르카나 중앙역 건설을 추진했다.

    황제의 결단은 옳았다. 세금이 상당히 들어간 탓에 중신들이 반대하던 사업이었지만, 아르카나 중앙역 건설로 인해 수도 모르간은 향후 스무 배 넘게 번성한 도시가 된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스크롤 없습니까? 들어올 땐 어떻게 들어오신 건데요.”

    뭐라고 대답하지. 미래엔 마도구가 없다? 이런 곳에 들어오려면 스크롤을 쓸 게 아니라 문을 따든 부수든, 어쨌든 물리적인 방법으로 열고 걸어 들어와야 한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나 남은 스크롤을 좌표 설정을 잘못해서 쓴 거라. 근처 스크롤 상점에 들러야 할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그럴싸하게 들리겠지. 다행히도 라크시스는 역사책에서 그대로 베낀 듯한 이 거짓말을 믿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문을 성급히 두드렸다.

    “옌 경. 별일 없는 거 맞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쉼터에 생긴 이상을 확인하러 간 라크시스가 금방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황급히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무단침입을 들키면 최소 연행이다. 다행히 라크시스는 바깥에 이 상황을 알릴 생각이 없는지 그저 고개만 까딱였다.

    “예. 아무 일도 없습니다. 대공 전하.”

    설마 차탈 황제예요? 시아는 입을 벙긋거렸다. 황제란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사람이 왜 안 나오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붉은 머리의 황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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