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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화 (1/292)
  • 1화 

    【 수상한 일기장 】

    갈리프도흐의 홈커밍데이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렸다.

    “여길 또 오네.”

    졸업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총동창회에 등록시키는 치밀함이란. 하지만 제국 제일의 대학과 연을 이어간다 해서 나쁠 건 없다. 근 일 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들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시아! 여기야!”

    “세상에, 켈튼의 아가씨가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어머 어머, 흰머리는 또 뭐야!”

    이팝나무가 한창 흐드러질 때다. 하얗게 뒤덮인 중정의 벤치에서 마리와 카트린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마리는 호들갑을 떨며 시아의 검붉은 머리카락 속에서 흰머리를 골라 뜯어냈다. 의술원에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둘 다 갈리프도흐에 다닐 때보다 인물이 훤해졌다. 적당히 차려입었다 생각했는데 둘을 보니 너무 대충 입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머리라도 손으로 빗어 넘겨본다.

    “의술원이 보통 힘든 게 아닌가 봐.”

    시아는 말없이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술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의술원 생활이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각오하고 갔는데도 상상 이상이었다.

    “너희들은 잘 지냈고?”

    마리가 곧바로 울상이 되었다.

    “말도 마. 맨틀러 영애 때문에 죽겠다니까. 공부에 관심도 없는 사람 붙들고 수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

    마리는 졸업 후 갈리프도흐 출신을 앞세워 어린 귀족들의 가정교사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갈리프도흐를 졸업한 여학생이 흔히 선택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카트린이 핀잔 조로 대꾸했다.

    “그 말만 오늘 열 번도 더 들었다. 마리 얘는 맨틀러 영애 가르치는 거만 빼면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단다.”

    “카트린 너는?”

    “나?”

    왜 뜸을 들이지?

    “…드디어 키리스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됐어! 진짜 대박이지 않니?”

    아까부터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던 게 이 때문이었나. 카트린이 애써 흥분을 자제시키는 것이 보인다. 키리스는 약초학 분야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황실 소속 약제사이자 동시에 거대 제약 회사 모사피의 주인이기도 했다.

    “잘됐네.”

    “시아. 나중에 의술원 졸업하면 의원 차릴 거지? 그럼 난 네 의원에 약 댈래. 꼭 나랑 거래 트는 거다?”

    “우선 내가 의술원을 무사히 졸업한다면?”

    카트린이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쿡쿡 웃음이 났다. 키리스의 연구실이나 의술원 생활이나 둘 다 만만치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카트린도 같은 생각이니 웃었겠지.

    서로의 가시밭길을 응원하며 세 명의 졸업생은 중정을 거쳐 거대한 홀 안으로 들어갔다.

    갈리프도흐의 중앙 홀은 예나 지금이나 특유의 고전미가 느껴졌다. 수백 년도 훨씬 전, 고대 마법사가 살아있던 고대 마도 시대의 양식이 그대로 적용한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용의 무덤이라는 갈리프도흐의 뜻에 걸맞게 홀로 향하는 길목마다 비늘을 기하학적으로 새긴 석조 기둥이 서있었다. 별과 달을 아로새긴 오더가 아름답다. 광룡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고대 마법사의 상징을 비늘 모양 기둥 위에 올렸다고 한다.

    그 위로 현수막이 펄럭였다.

    [갈리프도흐는 당신의 고향입니다]

    ‘고향까진 아닌 것 같은데.’

    갈리프도흐는 의술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곳일 뿐이었다. 수준 높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마리와 카트린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좋았지만, 갈리프도흐를 다니던 내내 시아는 항상 이유 모를 찜찜함과 우울함에 시달렸었다.

    카트린은 의술원 준비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식은 금방 끝났다. 마리는 샴페인 한 잔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카트린은 모사피를 다니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곳은 공부만 하던 모범생에겐 썩 맞지 않는다. 마리와 카트린 같은 타입과 친구가 된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시아는 홀 한구석에 기대 구름 같은 인파를 바라보며 티 푸드만 줄곧 집어먹고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목은 안 막혀?”

    그 소리에 바로 목이 덜컥 막혔다. 캑캑거리며 목구멍에 걸린 과자를 뱉어내자 누군가가 등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왠지 누구 손인지 알 것 같다.

    “헬릭스, 황자 전하.”

    “하하. 여전하네.”

    황자 전하야말로 여전하시네요. 그가 내민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헬릭스를 한 차례 훑어내렸다. 예전보다 선이 굵어진 하얀 얼굴 위로 결 좋은 금발이 흘러내렸다. 요즘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더니 눈가에 그늘이 져있다. 뭇 영애들은 그마저도 섹시해 보인다며 좋아할 테지만.

    “제 성격 아시면서.”

    “아니까 여기 있는 걸 알았지.”

    시아 켈튼은 이런 자리 안 좋아하니까. 헬릭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웃을 때마다 눈 밑이 들어가는 보조개도 여전하네.

    이렇게 인기 많은 타입은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히 황자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할 때였다.

    “줄 거 있어.”

    “네?”

    “선물인데, 안 궁금해?”

    갑자기 웬 선물. 수상한데.

    “뭔데요?”

    눈 감고 손 내밀어 봐. 황자가 그렇게 말하자 더 수상했다. 시아는 헬릭스가 제게 선물을 건넬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황자의 말을 거절할 순 없었다.

    앞이 캄캄한 가운데 딱딱하고 네모난 촉감이 느껴졌다.

    “이거… 제 일기장이잖아요!”

    이걸 왜 황자 전하가 가지고 있지. 설마 내 방에 들어왔나? 미친, 내용까지 본 건 아니겠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질문들을 겨우 누르며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보셨나요?”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헬릭스는 당황했는지 제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그거 기숙사에 두고 갔었다며.”

    “당연하죠. 일기장을 들고 환자 보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뭐?”

    뭘 잘못 말했나. 황자는 시아보다 더 당황하고 있었다.

    “갈리프도흐 기숙사에 두고 간 거 아니었어? 네 방을 물려받은 학생이 청소하다가 발견했다고 전해달랬어.”

    “그걸 왜 전하에게…….”

    “홈커밍데이라 네가 올 줄 알고 직접 주려 했는데 홀 안에 차마 들어올 순 없었다더라.”

    홀 안에는 수백 명의 대선배가 가득하니 재학생으로선 엄두가 안 났을 테지. 황자는 불쌍한 그 학생을 어떻게든 변호하려 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앞뒤 상황을 모른다면 덥석 믿고 일기장을 주인에게 찾아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하나 있다. 일단 이 일기장은 시아가 어제까지도 의술원 기숙사에 처박혀 담당인 아이작 교수 욕을 내내 쓰던 바로 그 일기장이었다.

    갈리프도흐의 기숙사에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방치되어 있던 일기장이 아니란 뜻이었다.

    시아는 캐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감사해요. 전하가 아니었다면 내일 아이작 교수님께 불려갈 뻔했네요.”

    “아이작 교수 욕을 썼어?”

    “…일기장인데 뭔들 못 쓰겠어요.”

    헬릭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지만 곧 황자를 찾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떠나는 헬릭스의 발걸음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것은 시아만 모르는 일이었다.

    헬릭스가 어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시아는 곧바로 일기장을 펼쳤다.

    누가 뭘 어떻게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손댄 흔적은 없다. 하긴 기껏 남의 일기장을 훔쳐내 몰래 봐놓고 내가 범인이오, 하는 표시를 남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뒤에 썼잖아?’

    [3587년 5월 17일]

    심지어 오늘 날짜였다. 훤한 대낮에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미리 써두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것은 일기장을 발견한 사람이 쓴 질 나쁜 장난이 틀림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뭐라고 써놨는지나 한번 보자.

    [오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아직도 꿈인 것만 같다.]

    [라크시스 옌을 만났다. 진짜 고대 마법사 옌 말이다. 3517년 5월 17일. 정확히 70년 전 오늘로 되돌아가 살아있는 옌을 만난 거다.]

    아주 그냥 소설을 써놨네. 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다. 분명 홈커밍데이 후에 다 같이 술을 마신 것까진 기억나는데. 이게 다 패트릭 그 개자식 때문이다. 마리랑 카트린 아니었으면 마차는커녕 길바닥에 쓰러졌을 거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의술원 정문에서 들었던 아르카나 광장의 종소리였다.]

    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아무리 멋대로 쓴 내용이라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오늘이 갈리프도흐의 홈커밍데이인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패트릭이 시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는 것이나 마리와 카트린이 술 마신 시아를 부축해 주었다는 건 그녀의 인간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이었다.

    기숙사 방을 물려받은 이름 모를 후배가 아니라.

    이쯤 되면 내가 일기장을 갈리프도흐 기숙사에 실수로 흘렸나 싶을 정도였다.

    불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일기장에서 봤던 놈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잘 지냈냐. 시아 켈튼.”

    패트릭이다. 소위 말하는 열등감 덩어리.

    “꿀은 빨 만해? 감기만 걸려도 엄살떠는 부자만 진료한다면서.”

    성적도 안 됐던 놈이 나 때문에 의술원을 못 갔다고 망상을 해서 문제다. 대마법사 요르문 켈튼이 딸의 뒤를 봐줬다나 뭐라나.

    “넌 시비를 안 걸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니?”

    “내가 시비를 걸었다고?”

    “미안해서 어쩌나. 아버지 뒷배 믿고 의술원에 들어간 바람에 시비 병을 고치는 방법은 모르겠네.”

    패트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실시간으로 토마토가 익어가는 과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놈이 또 뭐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발동 걸린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 때까지 오늘 갈리프도흐 중앙 홀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다.

    * * *

    “아까 패트릭 그 자식 벌게진 거 봤어?”

    마리가 깔깔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카트린도 반쯤 취해선 뒷담화를 늘어놨다.

    “말빨도 없는 게 맨날 시아한테 덤빈단 말이야. 자기야말로 부모 잘 만나서 갈리프도흐 들어와 놓고.”

    마리와 카트린은 부어라 마셔라 아주 정신이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 다시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아 너는 왜 안 마셔? 잔이 그대로인데?”

    마리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어허! 켈튼의 아가씨께서 이거 왜 이러실까! 우리랑 노는 거 재미없어? 진짜 서운하게 정말!”

    세상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술잔을 들이미는 것도 재주다. 원래는 내일 있을 아이작 교수 면담 때문에 자제하려고 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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