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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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음 날.

    결혼식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에서 치러졌다. 가장 큰 성당에서는 오직 황족들만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식이 치러질 성당의 교구 목사와 그의 어머니가 사회 복지 재단 일로 알고 지내던 사이라 장소를 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드문드는 일정보다 한 시간 더 일찍 결혼식장에 찾아갔다.

    웨딩 카에서 내리자 장엄한 성당의 석조 몸체가 그를 압도하며 시야를 에워쌌다. 벽면에 우뚝 서 있는 성인, 현자의 동상들과 시선을 맞추다 그는 성당 안쪽으로 향했다. 여름의 광활한 하늘 위로 성당 종소리가 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대리석 건물 내부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스미고, 그의 시야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햇볕의 잔상에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수많은 자리를 채운 하객들이 보였다. 축의 목적의 선물을 들고 온 모양인지, 그들 중 몇몇의 무릎에는 작은 선물 꾸러미가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앞으로 향했다.

    성가대가 한창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께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신부 측 하객석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메르고빌 후작 부인과 비비안느의 오빠가 앉은 곳에 닿았다.

    “어머님. 메르고빌 영식.”

    “자네, 일찍 왔군.”

    후작 부인이 에드문드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말했다. 그는 비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 신부가 저택에 없으니 달리 할 일이 없더군요.”

    정제되지 않은 본심이 튀어나왔다. 에드문드는 이런 상황이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습관처럼 그녀를 생각했는데, 제 부인이 되기 위해 드레스를 입을 그녀의 모습을 숨 쉬듯 상상했는데 이제 와서 점잔을 떠는 것도 이상하다.

    에드문드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요즘 사교 클럽의 가장 큰 화두가 레이디 메르고빌의 드레스 아닙니까?”

    “자네 덕분이지.”

    후작 부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문드가 갈증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도 아름다운 드레스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데, 정작 메르고빌 영애의 남편 될 저는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이미 얼추 짐작이 가지 않는가.”

    후작 부인의 냉소가 이어졌다. 그녀는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딸이 뤼드빅 렉스의 약혼녀일 때 의상점에 찾아왔다고 들었네. 드레스 입은 모습은 그때 실컷 봐 두지 않았어?”

    “다릅니다.”

    “그래?”

    “그때는 다른 치의 여자가 되려 드레스를 입은 건데, 오늘은 아니잖습니까.”

    “…….”

    “그러니 틀림없이 다를 겁니다.”

    그 말에 후작 부인이 에드문드의 옆얼굴을 한번 살피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 끝에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짐작도 못 했지.”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후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

    “내 딸을 잘 부탁하네.”

    후작 부인은 그 말을 할 때조차도 꼿꼿하게 목을 세운 채, ‘그간 홀대해서 미안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드문드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곧 오늘의 주례를 보게 된 주교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문드에게 신부 입장 전까지의 한 시간은 잔혹했다. 너무나도 느리게 흘렀기 때문이다.

    그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태피스트리 창문 앞 정중앙에 서서, 저 멀리 있는 성당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전부 나열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성가대의 리허설이 멈추었다. 하객들이 문을 가리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신랑 측 좌석에 아는 얼굴들이 늘어났다. 그러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라도 들리는가 하면 그는 긴장으로 얼룩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새삼 그는 살면서 무언가를 기다려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오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목이 탔다. 심장이 생생히 살갗 뒤에서 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설령 무슨 일이라도 생겨 제가 이곳에 영영 혼자 남겨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불현듯 치밀었다.

    그 순간 그는 인정했다.

    여태껏 그가 그녀에게 느껴 온 감정은 극한의 자기 절제로 걸러진 아주 일부였다고. 그녀가 그의 삶이 되어 버렸다는 걸 인정하면, 그녀가 역설적으로 그걸 망쳐 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걸 무너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겨우 억누르고 억누른 감정이라는 것의 편린을 맛보았었다. 내내 그녀를 안으며 향기를 맡고 그녀의 곁에서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이 새로운 감정이 뭔지,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편린의 숨겨진 거대한 일부를 알고자 갈구했다. 그러다 그는 세상을 보았다.

    그녀가 있는 세상을 온전히 느껴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샹프니야에서 그녀를 되찾았을 때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자각할 틈도 없이 한쪽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방울이 볼을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여는 순간, 에드문드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영영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문가 풍경에, 흰 레이스에 파묻힐 것 같은 작은 토끼 같은 여자가 차 문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이 더해졌다.

    그는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워서 웃었다.

    신부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하객들은 그가 눈물을 흘리다 미소 짓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녀가 햇볕 아래 서자 하얀 솜뭉치 같아 보였던 드레스가 눈 결정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다. 디자이너들이 하나하나 손수 단 다이아몬드가 치밀한 그물을 이루고 제 모습을 뽐냈던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객 중 그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섞지 않다가, 성당의 심장부 정중앙에서 서 있는 제 쪽에서 고개를 멈추었다.

    까마득하게 먼 거리였지만 그는 그녀가 베일 속에서 수줍게 웃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쿵.

    그건 뭐였을까?

    그의 끝없는 기대가 보답받았단 걸 알리는 심장 박동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빛을 앗아 간 신께서 그에게 삶을 돌려줬다는 개벽의 소리인지.

    그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에드문드가 정신을 차린 건 비비안느가 버진 로드 양옆에 있는 성가대를 온전히 지나쳤을 때였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었구나, 하고 자각했다.

    그녀는 그의 눈 색을 닮은 푸른 장미 부케를 손에 모아 쥐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눈 색을 닮은 붉은 장미 부토니에를 한 것과 상반되었다.

    저 흰 드레스는 고전적인 디자인에 근대적인 감각이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이자 걸작으로 불리며 세간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소문의 드레스는 조금도 훑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신비롭게 덮은 베일이 보였고, 그 너머로 티아라의 다이아몬드들이 반짝였다.

    성가대가 노래하는 걸 멈추지 않아서였는지, 그의 눈에는 그녀가 천사로만 보였다.

    후작이 그녀를 버진 로드 끝에 데려다주고는 멀어지자, 에드문드가 다가가 그녀의 베일을 넘겨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잘 뻗은 손가락 끝이 떨렸다. 갈망하는 푸른 눈이 비비안느의 입술을, 그녀의 선홍색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정말 예쁘네.’

    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는데도 용케 알아들었는지 긴장해 있던 비비안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두 사람이 어찌나 서로를 열띠게 쳐다보았는지, 주례를 보기 위해서 주교가 목청을 골라야 했다. 곧 그의 목소리가 신성한 성당 안에 울려 펴졌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곳에 모인 것은, 이 사내와 여인이 하나 되는 순간의 증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에드문드의 시선이 비비안느의 흰 목덜미 쪽으로 옮겨 갔다. 그랬더니 웬 낯익은 목걸이가 보였다.

    선홍색 다이아몬드를 하얀색 다이아들이 정교하게 감싸고 있는 디자인. 펜던트 고리까지도 흰 다이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올해 신년제쯤 익명의 이름 뒤에 숨어 그녀에게 저 목걸이를 선물했었다. 그녀가 그걸 뤼드빅 렉스와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걸치고 있는 걸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제가 떠나고 난 뒤의 빈자리를 이 선물이 채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또한, 결별 뒤에도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가리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날것의 감정들. 그걸 깨닫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지금 그녀가 그의 앞에 있어 그는 안도했다.

    때마침 주교가 에드문드에게 물었다.

    “…에드문드 콜트 공작 각하께서는,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를 아내로 맞으시겠습니까?”

    “예.”

    영영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교는 고개를 돌려 비비안느를 훑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께서는, 에드문드 콜트 공작 각하를 남편으로 맞으시겠습니까?”

    숨이 멎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비비안느가 에드문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긴장감이라는 생경한 감각이 그의 온 혈관을 타고 흘렀다.

    “네.”

    그녀가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에드문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참았던 숨을 가쁘게 내뱉으면서도 그는 비비안느의 눈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주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일평생 멈춘 시간 속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이제 신랑께선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습니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던 이름 하나를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디 비비안느 콜트.”

    목소리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짙은 소유욕이 배어 있었다.

    “네가 또다시 도망쳐도 내 가문 이름만큼은 네 예쁜 이름 뒤를 평생 뒤쫓겠지.”

    “안 도망쳐요.”

    그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이 둘은 오늘부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주교의 말과 함께 성당의 종소리가 퍼져 나갔다.

    화려한 결혼식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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