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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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의 ‘전’ 약혼녀,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피어나다.

2주.

그의 재력과 인맥 그리고 후작 부인의 끝없는 허영이 만든 걸작이 제도 사교계의 작은 화제가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황색지의 헤드라인을 가만히 훑고 있던 에드문드는 그 너머에 있는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띤 채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불만이 있다는 거였다.

“당신, 제 어머니랑 결탁했죠?”

“그랬었나.”

에드문드는 그 모습이 귀여워 괜히 그녀를 놀리고 싶어져 말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오트 쿠튀르 브랜드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저택에 들이닥쳤을 때부터요.”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설명을 야무지게 이어 갔다.

“그분들이 드레스에 어떤 보석이랑 레이스를 쓸지 하루 밤낮을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걸 봤을 때도, 공작님이 정말로 제 어머니께 손을 내민 걸까 싶었죠.”

“그런데?”

“그러다 어머니께서 대뜸 저더러 드레스를 입어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응.”

에드문드가 커피(비비안느와 대낮에 위스키는 마시지 않기로 약속해서이다)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비비안느가 곧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귀부인들을 초대해 제 드레스를 자랑하셨죠. 딱히 이상할 건 없었죠. 어머니께서는 뽐내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그런데, 그 드레스를 보게 한 다음 말을 퍼트리게 하는 건 다른 얘기예요.”

“왜?”

재잘재잘 말을 이어가는 비비안느가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투였다. 작은 명탐정은 그녀가 모은 추론 근거들을 마저 꺼내 놓았다.

“그건 제 약혼자가 뤼드빅이었을 때도 어머니가 한 일이니까요. 혼전에 드레스를 볼 수 없는 사위를 위해서 소문을 통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려는 배려이죠.”

그쯤 말한 비비안느의 눈이 좁혀 들었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당신, 두 사람 화해했고 공모나 결탁을 한 게 맞죠?”

그녀는 팔짱을 끼며 추궁을 이어갔다.

“그건 어머니께서 그렇게 싸고돌던 뤼드빅에게만 보이는 호의인 줄로만 알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를 구워삶으신 거예요.”

“내가 네게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 드리려고 했지. 네 어머니 방식대로.”

“그럴 줄 알았어요!”

비비안느는 혀를 내두르며 작은 머리통을 옆으로 홱 돌렸다. 얼굴에 서린 배신감마저 앙증맞았다. 그러다 그녀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염려 섞인 투로 물어 왔다.

“제 화려한 드레스가 화제가 되어도 괜찮은 거예요? 사람들이 자금 출처를 궁금해할 텐데. 콜트 내외께서야 공작님 정체를 알고 있다지만,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잖아요.”

“내가 재력으로 이름난 세노윅 가문의 후계인데 누가 쓸데없는 의문을 품겠어. 게다가, 어차피 사람들은 그걸 네 어머니의 드레스로 알고 있지 않겠어?”

“그렇죠.”

“그랬으니 아무렴 상관없겠지.”

말을 마친 뒤, 에드문드는 둘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서 편지 뭉치를 집어 들어 비비안느에게 건넸다.

“신랑 쪽, 그러니까 내 사람들이 청첩장을 받은 뒤 보낸 답신이야. 다들 오겠다고 하던데. 너는.”

비비안느가 편지들을 조심스레 받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사람들도요.”

뤼드빅과의 저번 결혼식에서는 전부 불참 의사를 드러냈던 이들이었다.

“다행이야.”

“네. 이번에는 하객분들이랑 사진도 많이 찍으려고요.”

“그나저나, 신부의 행운을 위해서는 헌것, 새로운 것, 빌린 것, 파란 걸 걸쳐야 한다더니. 파랗거나 새로운 건 찾았어?”

“글쎄요. 파란 가터를 많이들 한다던데. 그건 어때요?”

그녀가 무심코 던진 그 말에 그의 귓불이 붉어졌다. 비비안느는 의아했다. 가터가 그렇게 자극적인 단어였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가터벨트.

에드문드는 틈이 날 때마다 그 단어를 곱씹었다. 이미 비비안느가 언급한 ‘파란 가터벨트’에서 푸른색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머릿속엔 토끼 같은 아가씨가 곱디고운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치마폭 안으로는 앙증맞은 가터를 하고 있었다.

어울릴 거라며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느 누구도 이토록 훌륭한 사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다가온, 결혼식 하루 전날.

비비안느는 잠시 본가로 향하기로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치장을 한 뒤 예식장으로 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에드문드. 듣고 있어요?”

소식을 전한 비비안느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이며 물어 왔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에드문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삐딱하게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혼식 당일 새벽에 저택으로 향해서 드레스도 입고 치장하겠다고 했었잖아.”

“그러긴 했는데, 아까 설명했듯 결혼식 전날 밤만큼은 친구들이랑 보냈으면 해서요.”

“이제는 내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네 친구들 뒤로 밀려나게 된 거야?”

에드문드가 미간을 찌푸려 오자 비비안느가 해명했다.

“그래 봐야 교류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제게는 결혼하게 될 사람이 제일 먼저이죠.”

“통역을 배우겠다, 사회 복지 재단 일에 따라다니시겠다, 요즘 한창 바쁘시더니.”

“공작님께서 정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비비안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에드문드는 근처에 있는 풋맨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그가 걸음을 옮겨 무언가를 가져왔다. 곧 테이블 위에 상자가 놓이자, 에드문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비비안느 쪽으로 그 상자를 밀어 놓았다.

“열어 봐.”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를 받아 들어 무릎 위에 놓았다. 그녀가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여는 순간 앙증맞은 구두가 드러났다.

웨딩드레스 색과 같은 흰색 구두였으나, 새파란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보석이 유독 눈에 띄고 아름다웠다.

“아직 결혼식 때 걸칠 ‘새로운 것, 파란 것’을 못 찾았을까 봐서. 결혼식 날 새벽에 주려고 했는데 지금 줘야 하겠네.”

“아…!”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비비안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두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다. 에드문드가 느른히 그녀에게 물어 왔다.

“이래도 나보다 친구들이 더 좋아?”

“…고마워요.”

그녀는 흰 구두코 위쪽에 일렬로 박힌 푸른 다이아몬드를 손으로 더듬어 보고 있었다.

얼음 결정 같은 마르퀴스 컷 블루 다이아가 자연광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큼지막한 보석 주위로 같은 색의 크고 작은 것들이 반짝였다.

모두 같은 색상 등급의 다이아로 에드문드조차도 단기간에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미 새로운 것, 파란 걸 찾았다면 어쩔 수 없고.”

그는 내심 그녀의 푸른 가터를 기대하며 넌지시 물어 왔다.

“아, 그거요?”

비비안느는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그의 더러운 속내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순하고 맑은 눈이었다.

“머리에 묶을 파란 리본을 샀었어요.”

리본.

그래. 리본도 나쁘지 않지. 그는 애써 실망하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려 노력했다. 비비안느는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표정을 훑다가 조심스레 구두를 상자에서 꺼내 들어 품에 꼬옥 안았다.

“그래도 이 구두가 훨씬 마음에 들어요.”

“…….”

“고마워요.”

“그래.”

“그럼… 전 이만 후작저로 가 봐도 될까요?”

“그러셔야 한다면.”

그 말에 비비안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내일 결혼식장에서 봐요.”

그러고는 문 쪽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결혼을 준비하는 짧지만 긴 시간 동안 그에게 운전도 배워, 그의 컨버터블(convertible) 자동차를 제 것처럼 몰았다.

그녀가 1층으로 내려간 뒤, 에드문드는 응접실 창가로 다가갔다. 역시나 사용인에게서 키를 받아 든 그녀가 운전석에 앉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신나 보였다.

정작 저는 그녀가 내뱉은 가터 한마디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 이후로는 쭉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에드문드는 매분 매초 신부를 그리느라 다른 일에 몰두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흰 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밟으며 걸어와 제게 웃어 보일 그녀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게 다 무의미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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