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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에드문드는 제 전용기의 맞은편에 앉은 비비안느를 상상하려 했었다.
그때의 공허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그는 오늘 그녀가 그 상상의 공백을 메꿔 주지 않을까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창가 쪽 자리였다.
한참 비행기 안을 구경하던 그녀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에드문드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플로리스트를 고용할까?”
“네? 왜요.”
“네가 결혼식장에서 꽃을 어떻게 쓸지 고민을 많이 했으니까.”
“오늘 꽃 얘기는 안 했는데요.”
“넌 모르겠지만, 너 일할 때 귀여워.”
그러니까 저택에서 일할 때 계속 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집중할 때 코끝을 찡긋거리는 습관도 있고.”
“네, 플로리스트 좋죠. 다음은요?”
비비안느가 의도적으로 말을 돌리자 에드문드는 기꺼이 장단에 맞춰 주었다.
“결혼식에 잔뼈 굵은 귀부인들을 고용할까. 뭐가 근사한지는 그들이 잘 알 테니까.”
“네.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손에 잉크가 묻었네.”
“…보기 싫으면 다시 장갑을 낄까요?”
“아니. 네가 이렇게 정성 들여서 청첩장을 직접 하나하나 준비했는데, 그걸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운일까 생각하고 있었어.”
“부끄러워요….”
비비안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창밖으로 옮겨 갔다. 이제야 그는 그녀가 오늘 저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선을 마주하는 게 편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 결혼식은 정말 성대하고 아름다울 수 있게 나도 최선을 다할게.”
“…….”
“네 전 약혼자와의 결혼식과는 다르게.”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구름을 구경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에드문드는 비비안느를 좌석에 편히 기대게 하고는 탁자에 놓인 서류를 읽었다.
그날 본 극 내용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저택 앞에 매일같이 찾아가며 그토록 함께 보고 싶었던 오페라인데, 남은 건 온통 그녀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그녀가 피곤한 눈을 잠시나마 붙인 순간. 로열 박스석에서 오랜만에 오페라를 본다며 눈을 반짝인 순간….
그런 것들 외에는 전부 중요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에게 그녀만큼 중요하고도 예뻐 보이는 게 없어서일지도.
오페라를 보고 온 날,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에게 결혼 준비를 돕겠다 단언했다. 그래도 그가 도울 수 없는 단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바로 드레스를 고르는 것이었다.
다아트로 제국에서는 신랑이 혼전에 신부의 드레스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비안느의 드레스나 베일에 관한 일만큼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고를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기억 속 비비안느의 모습을 떠올리며 호기심을 달랬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뤼드빅 렉스의 아내가 되기 위해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앳된 얼굴도 그때만큼은 조금 달라 보였고,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니 희고 긴 목덜미가 드러나 귀부인 태가 났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숨이 턱 막혔다.
그녀를 되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그가 그녀의 옆자리에 서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그는 그녀의 드레스 의상실 근처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에드문드는 제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면서도 신부에게는 가장 중요할 문제에 개입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그가 그녀의 웨딩드레스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 건,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다.
비비안느는 방 탁자 앞에서 바쁘게 무언갈 하고 있다가 전화 한 통을 받고 저택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 곁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던 에드문드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는 말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아, 어머니께서 결혼하실 때 입었던 옛 드레스가 후작저에 도착했다고 해서요.”
“옛 드레스?”
에드문드는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들렸다.
“새로 맞추는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공작님 돈 써서 결혼 준비하는 거기도 하고, 그래서 욕심을 부리기가 조금 꺼려지더라고요.”
“…….”
“지금 배우고 있는 통역 일이라도 잘 해내서 번 돈으로 보태 보려고도 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아직 갈 길이 멀다 싶어서요. 그런데 마침 어머니께서 결혼하실 때 입었던 드레스가 있다고 해서 빌리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 드레스를 보러 가 보겠다고.”
“네, 그거죠. 메르고빌 영지에 있는 걸 오늘 제도의 저택에 옮겨 왔다고 하더라고요.”
비비안느는 대답한 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부연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아트로에서는 새 신부들이 길운을 비는 의미로 헌것, 새것, 빌린 것, 파란 것을 구해다 걸치곤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제 어머니께 헌 웨딩드레스를 빌리는 거일 테니 뜻깊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네 어머니께 헌 드레스 말고 다른 걸 빌리는 건 어때.”
“왜요?”
“이번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네가 웨딩드레스 입을 일이 없을 텐데, 기왕이면 드레스만큼은 최고로 구해서 입어야지.”
“굳이 그럴 필요는….”
“드레스를 골라 줄 수는 없지만, 디자이너를 골라 줄 수는 있겠지.”
“…….”
“우리 레이디께서 기성품 마다하시는 걸 내가 모를까. …네가 허락만 해 준다면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를 불러서 너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게 할게.”
비비안느가 선뜻 답하지 못하자 에드문드가 덧붙였다.
“이번 결혼은 네 지난 결혼이랑은 달라야 하잖아.”
“고마워요.”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겨 에드문드에게 다가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제가 어떤 드레스를 입든 공작님께는 똑같이 예쁘고 고귀해 보이겠죠?”
“응.”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 당장도 그녀의 고운 미소밖에 뵈는 게 없는데, 결혼식 날이라고 다를까.
그에게 정말 중요한 건 드레스가 아니라 그 흰 웨딩드레스를 걸치고 있을 사람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도, 지금 눈앞에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비비안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그렇게 비싼 드레스는 필요 없어요. 공작님을 알아 오며 제게 중요했던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공작님이 절 어떻게 생각할지 뿐이었으니까요.”
그로서는 정말 생경한 이야기였다.
그러면 그녀가 여태껏 그토록 절차를 중시한 것도 오직 제게 고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저토록 완벽한 그녀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제게는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의 추측을 긍정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제가 사람들에게 진짜 귀족으로 비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
“그래도 선상 파티에서 했던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마워요. 제게 새 삶을 선물해 준 것도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응.”
“그것만으로도 정말 큰 선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다녀올게요.”
비비안느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휙 뒤돌아 문가로 향했다. 에드문드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가만 바라보다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정작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이런 나날을 꿈꾸며 제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기꺼이 해냈을 만큼.
그러니 그간 마음이 얼마나 엇갈려 왔던 걸까.
다행히도 이제는 그가 그녀의 마음을 따라잡았고, 그에게는 그녀와 함께할 수많은 나날이 있었다.
그 시작을 조금도 허투루 하지 않겠다며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비비안느가 아무것도 더 내어 줄 필요가 없다고 저에게 말은 했다지만 그녀의 허영 넘치는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메르고빌 후작저에 전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작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에드문드가 친근하게 후작 부인을 부르자 잠깐의 정적 뒤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자네가 전화를 다 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예전보다는 조금 더 저를 내켜 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딱딱한 음성.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제 약혼자가 낡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겠다는데, 어머님께서 여태껏 제게 전화해서 말씀 한마디 해 주지 않으셔서요.”
- …….
“…물론 의미 있는 오래된 드레스를 물려주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좋게 말해 빈티지(Vintage) 드레스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게 고귀한 메르고빌의 여식에게 어울리는 건 아니겠지요.”
- …자네 정말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참 잘하는군.
“디자이너를 보내려 합니다. 가봉 명목이라지만 보석과 레이스를 아끼지 않고 드레스를 새것처럼 꾸며 줄 겁니다. 비용은 전부 제가 대겠습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 그래야지.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와 저와의 사이를 가로막던 메르고빌 후작 부인의 허영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의 입가에 완벽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