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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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과 달라진 것은 창문 앞 테이블에 놓인 편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라이너스의 경시청 승진을 축하해 주던 사람들은, 지금 저택 전원에서 라이너스가 황궁 비서실에 들어가게 된 일에 대해 떠들었다.

    생각만 해도 정말 좋은 일이었다.

    비비안느는 한때 전 약혼자 뤼드빅에게서 라이너스가 경시청에 지원한 이유에 대해 들은 바 있다.

    “네 오빠, 능력만으로 황실에서 일할 수도 있었던 라이너스 메르고빌이 왜 의장 뒷배 소리 들으면서까지 경시청에 지원했는지 아나?”

    당시 뤼드빅은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어 뵈는 게 없는 망나니였다.

    악마 같던 뤼드빅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이어졌다.

    “그 삭막한 장소에 네 편 하나라도 만들어 주겠다고 자원해서 그 대단한 전적을 가지고 학위 소지자 모집에 지원한 거잖아.”

    “…….”

    “청 내 정치 때문에 고속 승진 대상자 차순위로 밀려날 일도 없을 거라는 계산까지 마치고 내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대신 이용하기로 한 거지. 어때. 똑똑하지 않나?”

    이 사실을 깨닫고 제 오빠인 라이너스가 고마워지기는커녕, 그가 더 불편해졌다.

    원래도 나이 차이가 꽤 있는 오빠여서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날부로 라이너스에게 인생을 빚지고 있다는 기분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엇나간 삶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저택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현관문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 말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비비안느가 실외로 걸어 나오자 아직도 가든파티가 한창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올려다본 오후 하늘은 깨끗하고 맑았다.

    에드문드는 현관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힐끔거리는 사람이 많음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말을 섞기는커녕 요지부동이었다. 그 많은 시선 속에서도 그는 제 시선을 찾아내었다.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은 그의 거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해.”

    그 말에 비비안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답했다.

    “저는 금방 나온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대화는 고작 십오 분 동안이었고요.”

    자신이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거라는 사실을 의식한 매디슨의 안배 덕이었다. 에드문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십오 분? 열다섯 시간 같았어.”

    “과장이 심하시네요. 삼십 분 같았다 한 거면 믿어 드릴 뻔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비안느는 그의 발밑에 놓인 담배꽁초들을 훑었다. 저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에게는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 유추하게 해 주는 흔적이었다.

    1년 전에 집을 나와 그를 정보국 요원으로 알고 있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더욱 새삼스러웠다.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이야길 나눴는데?”

    “별거 없었어요. 그냥 안부 주고받고, 샹프니야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만 간단하게 듣고.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에드문드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걸 의식한 말이었다.

    “그냥, 가 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어때.”

    당신이랑은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비비안느는 그 말을 삼키고는 단정히 미소 지었다.

    “네. 좋아요.”

    저택의 뒷문으로 나가니 근사한 차 한 대가 도로 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의전용 리무진이 아닌 걸 보면 에드문드가 운전대를 잡을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사용인들을 부르면 차를 준비하고 운전기사를 데려오느라 시끄러워지겠지.’

    가든파티에서 조용히 떠나기에 그만한 선택지가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새삼스러웠다.

    매번 그가 이동할 땐 수상 각하의 아드님이시다, 세노윅 공작가의 후계다, 라며 수행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문드는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겨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비비안느는 차에 타며 에드문드가 차 문을 닫고 맞은편 좌석을 채우는 걸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모습을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잘생긴 옆얼굴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차의 시동을 걸 때쯤 비비안느가 입을 열었다.

    “작년이었죠?”

    “뭐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직접 운전을 했을 때 말이에요.”

    “그랬지.”

    그가 건조히 답했다. 작년이라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가 요원을 가장하며 제 앞에 나타났을 겨울의 한 순간. 손끝을 에게 하고 구두 사이로도 스미는 추위 속에서 제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 그는 마치 구원자 같아 보였다.

    차가 매끄러운 도로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자 비비안느는 고백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참 당신이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많이 좋아했고요.”

    그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그의 빌라에 신세를 지며 머물렀을 때 그의 존재가, 흔적이, 발걸음 소리마저도 위안이 되었다. 그가 곁을 내어 준 덕분에, 약혼자가 당장에라도 찾아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에 살 수 있었다. 숨통이 트였다. 그가 한 말을 하루 종일 곱씹게도 되었고, 그와 함께할 구실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저를 놀리는 그가 야속했다.

    그 풋풋하면서도 치기 어렸던 짝사랑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돌이키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선득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애써 기억해 보려 노력했다. 당시에는 보답받지 못했던 그 아릿한 첫사랑의 기억을.

    이제 그녀는 그 감정을 해방하고자 했다.

    비비안느는 손에 끼워진 자분홍색 다이아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도 많이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때 정말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때 그의 감정은 뭐였을까.

    순진했던 제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그는 그런 자신이 우스웠을 것이다. 참 쉽다고 생각했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의 커져 버린 마음이, 제게 내미는 손길이 좋아서 그녀는 그의 옆에 서기로 했다. 그를 다시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제야 그 보답받지 못한 마음을 꺼내 본다.

    “그래.”

    대답이 돌아왔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이제 됐다고. 더는 생각하지 말자고.

    “그런데 그때 나도 너 좋아했어.”

    에드문드의 말에 그만 정신이 멍해졌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비비안느는 애써 태연하게 웃으려 하며 입을 열었다.

    “…설마요.”

    “그때는 그런 줄 모르고 행동했으니까 네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알았어요.”

    그 말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딱 이 정도 다정한 거짓말쯤에서 멈춰야 했다. 저 말이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게 드러나면 이 순간이 망가질 테니까.

    이어진 순간은 조용하고 정적이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운치가 있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한적한 도심의 도로를 달리는 차의 차창 안으로 일광이 비스듬히 스며든다.

    오후가 여물어 감에 따라 광선도 빛이 바래 아늑한 누런색이었다. 세상은 천천히 어둠 속에 스밀 준비를 하는데도 저 멀리에 있는 살렌너 호텔의 불은 켜질 줄을 몰랐다.

    “이상하네요. 저 호텔 불이 꺼져 있는 날도 있고.”

    렉스 가문이 관리했던 재단 산하의 사업체들은 모두 폐업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일 텐데도 저 불야성(不夜城)이 졌다는 역설이 신기했다.

    뤼드빅의 형 집행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이런 감상은 느끼지 못했는데.

    영영 건재할 것만 같은 살렌너 호텔이, 그 화려했던 모든 기억과 함께 스러져 버린 것 같았다.

    ‘아직도 뤼드빅이 저곳의 포이어(foyer) 테이블에서 귀부인들 포커에 끼어들던 모습이 생생한데.’

    그 덧없음과 허무함에 비비안느는 작게 실소했다. 그때 에드문드가 입을 열었다.

    “작년 겨울에 우리 저곳에서 식사하지 않았었나.”

    “네. 당신이 빌라를 비워서 제가 깡통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명목이었죠. 진짜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때마침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돈 베칼로네가 올 때까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마침 레이디의 가문 측도 조용하고, 유감스럽게도 이스트웰 영애도 집에 그렇게 돌려보냈으니 언론이 모를 겁니다. 이대로 앉아서 돈 베칼로네 측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가 저를 살렌너 호텔로 데려갔던 진짜 이유는, 저를 하루빨리 암흑가 보스에게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그 말이 야속했었다.

    에드문드를 임무에 눈먼 요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저를 미끼로 암흑가 보스를 끌어들일 요량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날 선 말을 했었다.

    “저쪽 정보원 실력은 영 형편없나 보네요. 제가 나서서 광고까지 해야 알고. 그런 무능한 암흑가 보스를 당신은 왜 못 잡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에드문드는 요원의 일을 명분으로 제 약혼자를 손봐 주고 저를 배불리 먹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추측이 맞았다는 듯 에드문드가 제 말을 대신 끝맺어 주었다.

    “…첩보 공작을 광고해서 돈 베칼로네를 끌어들이겠다는 건 아니었겠지. 그냥, 네가 좋아서. 그렇게 말하고서 네 몹쓸 약혼자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었나.”

    처음엔 그 또한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들을 들어 보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작년 겨울에 에드문드가 뤼드빅을 골탕 먹인 뒤, 저와 호텔을 걸어 나올 때, 그와 그녀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방금 그건 뭐였어요?”

    “목숨값 받아 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받은 만큼은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목숨 걸고 도박하려 했으면 그날이 오기 전에 약혼자 엿 먹이는 거 정도는 해 줘야 재미 좀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날 버리려는 거였잖아요.”

    “오늘은 아니었나 봅니다.”

    정말 그 말대로였던 모양이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비비안느는 내내 마음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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