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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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양산을 써야 했다. 비비안느는 레이스 양산을 살짝 들어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서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쾌청하게 맑은 하늘의 푸른빛은 좁은 시야 속으로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아래, 수많은 신사와 숙녀들이 잘 차려입고 쌍을 이루어 완연한 봄의 전원을 거닐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에드문드를 찾고 있을 때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어머, 메르고빌가 전원이 예쁜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 눈부시네요.”

데인체스터 부인이었다. 그녀의 양자는 데인체스터 소위로, 매디슨의 소꿉친구라 선상 파티와 매디슨의 하숙집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비비안느는 데인체스터 부인이 제 청첩장을 반환했다는 쓰디쓴 기억을 곱씹다가, 그런 일로 앙금을 쌓지 말자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비비안느가 의례적인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을 때 어느 순간부터 제 옆에 다가온 에드문드가 대신 답해 주었다.

“이게 다 부인께서 후작 부인께 전원을 가꿔 보라 조언해 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어머….”

데인체스터 부인은 대화에 끼어든 에드문드를 훑더니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에드문드는 그 틈을 타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감사한 분인데, 다음번에 청첩장을 보낼 땐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그렇다면 영애와 이 신사분이…?”

데인체스터 부인은 비비안느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에드문드가 했다.

“예. 듣자 하니 후작 각하께서 오늘 이 좋은 자리에 따님의 구혼자들을 불러 모으셨다던데, 저도 아버님께서 가장 아끼게 될 구혼자로서 빠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비비안느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데인체스터 부인을 포함해 제 결혼식에는 오지 않았던 사교계 인사들 또한 모두 여기에 있었다.

에드문드는 제 오빠 라이너스와 친해진 걸로 보이니 그의 이름을 빌려서 가든파티의 초대장을 썼을 테다.

그리고 라이너스와 제 아버지가 다시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교계의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저들 눈치를 살피기 위해 이곳에 왔으리라.

‘체면을 세워 주겠다는 호의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때마침 후작이 후작 부인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에드문드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비비안느는 뒤따랐다.

역시나 후작은 에드문드를 보고 이를 갈았으나, 정작 에드문드는 정중하게 후작에게 인사하고는 말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아버님이 빚을 갚기를 바라면서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만….”

물론 방문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메르고빌 가문의 가든파티를 즐기는 중이었지만, 에드문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공갈을 이어 갔다.

“여기에서 더 면 상하는 일이 어떤 걸까요. 저들에게 갚을 돈이 없는 현 상황일지. 아니면 제 수표를 받아 주시고 결혼을 허락해 주시는 건지. 후작 각하께서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에드문드가 비비안느 쪽으로 눈짓하자, 비비안느는 가지고 있었던 수표를 아버지에게 다시 건넸다.

메르고빌 후작은 굴욕적인 낯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비비안느는 제 아버지가 수표를 떨리는 손으로 구겨 주머니에 숨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에드문드가 가든파티에 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이유가 명백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체면을 인질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에드문드는 제 손을 빌려 아버지의 채권자들을 초대하게 했다. 그러고는 라이너스의 이름을 빌려 제 결혼식에 오기로 했던 이들을 모두 이곳에 불러 모았다.

독촉자들과 구경꾼이 가든파티라는 명목하에 한곳에 모인 것이다.

그러자 에드문드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저 채권자들이 빚을 받으러 왔다는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인 후작에게는 저 평화로운 광경이 시한폭탄처럼 보일 테다.

제가 아는 아버지라면 이곳의 평화가 깨지고, 채권자들에게 빚을 독촉당하는 꼴을 만천하에 보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공포를 느낄 테니까.

에드문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메르고빌 후작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자, 이제 아버님께서는 응접실로 올라가실 겁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에드문드의 근처에 있는 비비안느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러들이시겠다던 구혼자를 하나하나 만나 보겠다는 의도로 읽히겠지요. 하지만 아니요, 실제로 아버님께서 그곳에서 차례로 만날 건 여기 앞 정원에 있는 채권자들입니다.”

“…….”

“집사를 시켜 채권자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응접실로 안내하게 하시지요. 그다음 채권자와 독대하며 차례로 빚을 갚아 나가시면, 후작 각하께서도 명예롭게 귀족원에 복귀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다시 의원이 되셨는데, 귀족원에서 의원 노릇 하시려면 제도에 그럴듯한 저택이 필요하실 테고. 마침 메르고빌 영식께서도 황제 폐하의 개인 비서가 되었으니 처남께서도 제도에 저택이 필요할 건 마찬가지일 텐데.”

“…….”

“정말 이 저택을 팔고 메르고빌 영지로 내려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의회가 제도에서 열리며, 황궁이 제도에 있다는 걸 의식한 말이었다. 아버지와 오빠의 새 근무지가 이곳에 있으니 메르고빌 일가는 영지로 내려갈 수 없었다.

“그러니 장인어른…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신다면 절 사위라 불러 보시지요. 그러면 제가 방금 따님을 통해 드린 그 수표는 조건 없이 후작 각하의 것이 될 테니.”

에드문드의 말이 끝났을 때 후작은 순수하게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비비안느가 봤을 때는 꼭 영혼이 입 밖으로 빠져나간 창백한 꼴이었다.

뤼드빅조차 제멋대로 다룰 수 없었던 아버지가 저를 미끼로 에드문드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에드문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돈 많은 사위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보다 부유한 사윗감이 이곳에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체면이 그리도 중요한 귀족 나리신 건 이해했습니다만, 역시 빚쟁이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보다는 사위에게 용돈 받는 게 덜 면 상하지 않겠습니까.”

후작은 그대로 두어 번 뒷걸음질을 치더니 겨우 손을 들어 에드문드의 단단한 어깨를 툭툭 쳤다. 정감 있어 보이려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사… 사위.”

“아버님.”

“고맙네.”

“천만에요.”

“이만 나는 응접실로 들어가 보겠네. 바람이 조금 쌀쌀하군.”

동시에 따뜻한 봄바람이 비비안느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후작은 멋쩍은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근처에 서 있던 집사에게 시선을 보냈다. 집사는 금방 후작의 뒤를 따라갔다.

비비안느는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에드문드가 말한 대로였다. 아버지는 수표를 받았고, 무려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겨진 후작 부인은 퇴로를 훑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살폈다.

에드문드가 ‘어머님.’ 하고 싱긋 미소 짓자 그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도 이만 가 보겠어. 두 사람 이야기 나누게.”

후작 부인이 에드문드를 지나쳐 가려 했을 때, 본의 아니게 그녀의 퇴로를 차단한 건 두 여인이었다.

“아, 여기들 계셨군요.”

두 사람 중 데인체스터 부인이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메르고빌 부인, 안 그래도 이쪽 귀부인께서 제게 안내를 부탁하셔서….”

후작 부인은 그 말을 듣기는커녕 데인체스터 부인의 일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제 상한 기분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귀부인은 무슨. …말세네요, 이제는 고작해야 중류층 여인네 따위가 내 저택 전원을 돌아다니다니.”

비비안느는 어머니에게 급히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어쩌자고 사용인들은 이런 행색의 여자를 들인 건지. 고작해야 길거리 양장점에서 몇 년 전에 산 양복을 아직도 입고 있잖아?”

“어머니.”

에드문드가 말하자 후작 부인이 얼 나간 표정으로 자신이 방금 들은 걸 되풀이했다.

“어머니?”

그러자 후작 부인이 ‘중류층 여인네’라고 부른 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악수하자는 듯 후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예, 이제야 인사드리는군요. 제가 바로 에드문드의 어머니, 알리사 콜트입니다. 훌륭한 따님을 제 아들의 짝으로 내어 주신 데에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왔지요.”

“콜트 부인, 제가 어머니 대신 사과드릴게요.”

비비안느가 황망히 나서자, 콜트 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신경 쓰지 못하고 급히 온 내 잘못인걸요. 개인적으로 값비싼 옷을 걸치는 걸 즐기지 않아서 오늘 아침에 입은 옷 그대로 무신경하게 와 버렸네요.”

담백한 콜트 부인의 대답에, 비비안느는 어머니의 오만이 도리어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에드문드는 특히 이런 위선을 싫어하는 사내였으니 그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콜트 부인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그만큼 비비안느 영애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사돈께서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그럼요.”

후작 부인은 멋쩍은 낯으로 대답했다. 콜트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후작 부인에게 제안했다.

“그럼 사돈께선 제게 이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시켜 주시겠어요? 아, 데인체스터 부인. 안내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데인체스터 부인은 황송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콜트 부인이 후작 부인에게 팔짱을 끼자, 후작 부인은 놀란 낯이었음에도 감히 뿌리치지 못했다. 제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겨 어느 정도 멀어지자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로 콜트 부인이 하는 말로, 한마디 한마디 저를 예뻐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따님과 오늘 처음 만나서 잠시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얼마나 똑똑하던지요. 자주 라디오를 듣는다고 하는데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외국어도 꽤 유창하게 하던데, 아는 단어들도 꽤 많고. 이대로 전문적으로 통역을 공부해도 훌륭한 통역사가 될 거라 확신해요.”

제 어머니조차도 해 주지 않았던 칭찬이었다.

콜트 부인은 제게 고작 귀족 레이디 이상의 가능성을 봐 주고 있었다. 비비안느는 콜트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작은 설렘이 마음속에 몽글 피어올랐다. 이건 다 에드문드가 저를 위해 나서 주었기 때문이겠지.

“고마워요.”

비비안느는 용기를 내어 에드문드의 손을 먼저 쥐어 보았다. 에드문드는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얽어 오며 깍지를 꼈다.

“아직은 고마워하기 이르지.”

“네?”

“앞을 봐, 비비안느.”

그 말에 비비안느는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안내를 받아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점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매디슨!”

과연 샹프니야에서 무사히 돌아온 그녀의 친구, 매디슨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도 저를 마주 보았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점잖게 걸음을 옮기던 풋맨이 매디슨과 보폭을 맞추려 애를 쓰는 모습에 비비안느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친구랑 못다 한 이야기가 있지 않나? 잘 놀다가 여기로 내려와.”

“그럴게요.”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에게 빠르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말을 알아듣고는 그가 몸을 기울여 주자, 비비안느가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친구가 저기서 오고 있는 게 아니라면 키스했을 텐데.”

그가 속삭이고는 멀어져서 비비안느는 괜히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의 열을 식혀야 했다.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역시나 곤란할 테니 드라이브는 어때?”

“드라이브요?”

“이제 네 부모님이 우리 사이를 허락해 주셨으니까, 우린 약혼한 사이잖아. 이 사람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네. 좋죠.”

약혼 첫날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내고 싶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을 예쁘고 좋은 기억들로만 채워 두고 싶었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가슴 벅찼던 순간이 언제든지 머릿속에 재생되도록. 그래서 그 기억들이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한 첫날의 파편이었다고 떠오르게끔.

거기다 그들은 금방 결혼할 테니 나눌 이야기도 많아질 것이다.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할지, 제도에 머무를지 공작령에 머무를지, 아이는 언제쯤 가질지…. 그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곳보다는 더 조용한 곳이 나을 테다.

비비안느는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질 미래를 실감하는 순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많은 게 바뀔 거라는, 뱃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그 미래에서는 이 남자가 언제든지 제 옆에 있어 줄 거라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다 봄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온기 때문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어느새 그들 앞으로 다가온 매디슨이 반갑게 인사했다.

“또 뵙네요, 백작님. 아. 이제 공작님이시죠? 오는 길에 들었거든요.”

매디슨은 등 뒤의 널따란 전원을 일별하고는 말했다.

“워낙 사람도 많고 넓어서 못 들을 수가 없더라고요.”

“예, 샹프니야에서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물론이죠. 물론이죠. 전용기를 빌려주신 덕분에 귀한 경험도 해 보고 아주 즐거웠어요. 공작님 덕에 본의 아니게 렉스 의장에 대한 특종도 잡을 수 있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죠.”

“아닙니다. 아내 될 사람의 친구인데 그쯤은 당연하죠. 그럼 저는 두 분 이야기하게 잠시 자리 비켜 드리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한 뒤 멀어지자, 매디슨이 비비안느에게 속삭였다.

“비비, 아직도 공작님이랑 완전히 끝난 거야?”

“아니.”

비비안느는 멀어지는 에드문드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말했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대화가 길어질 걸 생각해서, 비비안느는 매디슨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샹프니야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 이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었다.

‘거기다 에드문드가 매디슨 일행에게 전용기를 빌려줬다는 이야기도 궁금해.’

아마도 에드문드가 샹프니야로 향할 때 타고 간 전용기를 대신 타고 왔다는 것일 테다.

그때 저와 에드문드는 헬기를 타고 귀국했으므로 에드문드의 전용기는 샹프니야에 덩그러니 남았을 거다. 그러니 매디슨과 이카로스는 그의 허락하에 그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는 거겠지.

언젠가 에드문드가 태워 준다던 전용기에서의 비행은 과연 어땠는지 슬쩍 물어보고 싶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에드문드의 오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 전용기가 있는데 왜 그놈 헬리콥터를 타.”

그 이야기가 왜 나왔었더라.

그쯤 생각한 비비안느는 저택 실내의 홀을 물끄러미 둘러보았다.

아, 그랬었지.

헬리콥터.

에드문드가 지칭했던 ‘그놈’은 언젠가 이곳에 모형 헬리콥터를 들고 서 있던 작은 소년이었다. 지금은 근사한 공군 장교가 되었지만. 그 소년 옆에 서 있던 이가 매디슨이었지.

“있잖아, 비비안느. 나 이 저택 정말 오랜만에 와 보는 것 같아.”

마침 매디슨이 메르고빌 저택의 계단 쪽으로 향하며 비비안느를 돌아보았다.

“그치.”

잠시 매디슨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던 비비안느가 작게 미소 지었다.

매디슨과의 첫 만남은 10년도 더 된 기억이었지만 아직도 생생했다.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던 훈풍, 이 홀에서 들었던 맹랑한 목소리와 제게 내민 손까지 모두.

작년 겨울의 기억을 곱씹으며 비비안느는 말했다.

“네가 아카로 왕국과 세이브릿지 왕국 쪽으로 취재 나갔을 땐, 네가 여기로 영영 못 돌아올 줄 알고 걱정했어. 그때 겨울은 혹독했고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졌었잖아.”

“걱정은. 보다시피 괜찮고, 여기 잘 있잖아. 물론 죽을 뻔한 고비라면 최근에도 넘겼지만 그거라면 네 공작 각하께서 잘 신경 써 주셔서 문제없었고.”

“응.”

비비안느는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싱겁네, 비비안느 메르고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앞서가던 매디슨이 뒤돌아 비비안느에게 근사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그 모습까지 제가 기억하던 매디슨 같았다.

후작저 복도는 내내 매디슨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렇게 매디슨에게 샹프니야에서의 일에 대해 듣다 보니 어느새 방이었다. 비비안느는 방문을 열며 매디슨에게 말했다.

“미안. 원래 손님은 응접실에서 모시는 건데, 지금은 아버지가 손님과 응접실에 계셔. 응접실을 꽤 오래 쓰실 것 같아서 오늘은 내 방으로 안내했는데. 괜찮아?”

“물론이지. 우리 귀족 아가씨 마음만 안 불편하다면 나야 정말 괜찮아.”

“다행이다.”

비비안느가 뒤따라온 시녀에게 시선을 보내자, 시녀가 재빠르게 움직여 매디슨이 앉을 쪽 의자를 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매디슨의 말에 시녀는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답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의 친구분이시니 제게 말을 높이시거나, 감사를 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미안.”

“죄송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저는 두 분 말씀 나누실 수 있게 자리 비워 드리겠습니다.”

시녀가 비비안느까지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뒤 물러났다.

비비안느가 멀어지는 시녀에게 말했다.

“차와 다과를 내어 오련.”

“예, 아가씨.”

곧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비비안느가 매디슨에게 말했다.

“매디, 아까 샹프니야에서 전당포에 간 데까지 이야기했었어.”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인 매디슨은 매고 있었던 가방을 뒤졌다. 곧 필름 통 같은 것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특별할 것 없는 플라스틱 필름 통이었지만 안에 담긴 건 달랐다.

‘이 반지는….’

비비안느가 탄성을 잠깐 삼켰을 때 매디슨이 말했다.

“네가 샹프니야에서 집을 구하려고 전 약혼자가 준 반지를 전당포에 맡겼었잖아.”

“응.”

“다시 가져왔어. 물론 돈은 전부 동행한 변호사님이 낸 거라 걱정 안 해도 되고. 아마 그분 돈은 아닐 거야. 콜트 공작님이 그분을 통해 돈을 낸 거 같더라고.”

“아….”

비비안느의 시선이 필름 통 안에 담긴 붉은 다이아 반지로 향하자, 매디슨이 빠르게 해명했다.

“보석 상자에 곱게 담아 오지 못한 건 미안해. 상황이 상황인지라 급하게 이렇게라도 보관할 수밖에 없었어. 반지를 담을 만한 소지품이랄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매디슨.”

이 반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비비안느는 반지를 준 사람을 잠시 떠올렸다. 뤼드빅 렉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챘는지, 매디슨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말이야. 콜트 공작님이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으면….”

매디슨이 단둘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는, 비비안느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암흑가의 보스가 맞다면 말이야. 그때 선상 파티가 열렸던 그 거대한 크루즈도 공작 각하의 소유라는 거잖아.”

“응.”

비비안느는 긍정했다.

동시에 그녀는 매디슨이 그걸 설마 특종으로 여길까 봐서 조금은 긴장한 채 물었다.

“왜?”

“걱정하지 마. 그 비밀은 내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까. 의장 건도 다 공작 각하께서 보도해도 좋다고 말씀하셔서 취재한 거였어.”

“…그럼?”

“아니, 그냥.”

매디슨이 큭큭 하고 웃으며 앳된 미소를 지었다. 꼭 어릴 적 둘만의 비밀을 공유했을 때의 짓궂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웃음이었다.

“우리 귀족 아가씨는 결혼도 정말 귀족다운 짝 만나서 하는 것 같아서.”

“…….”

“진짜 귀족 같아.”

비비안느는 그 순간 잠시 에드문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널,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줄게.”

그 약속만큼은 확실히 지켜진 모양이었다.

잠시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에 관한 생각에 잠겼고, 매디슨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후 매디슨과 저택 안에서 나눈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매디슨이 비비안느더러 이만 새 약혼자에게 가 보라며 안부와 근황만을 전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조금 후련한 마음으로 매디슨에게 짧은 작별을 고했다.

방에 혼자 남겨진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려 먼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귀족가 아가씨로 살아오며 세상의 창으로 여겼던 소꿉친구 매디슨을 기다렸을 때처럼.

머지않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 밖으로 향했다.

창문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수많은 편지 봉투들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과거에 그런 편지 봉투들은 의미 없는 사교 모임의 초대장이었다.

그녀의 마음속 공허감을 메우고 고귀한 귀족이라는 위치를 확인받을 수 있는 위선의 장으로의 초대였다.

하지만 지금 저것들은 그녀가 사람들을 저택으로 초대한 데에 대한 답장이다.

저 답장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생각하면, 참 많은 게 바뀌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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