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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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문드의 주문은 간단했다.

    “내가 너를 여기에 영영 두고 간 것처럼 후작 부부를 속여 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말을 남기고 에드문드가 저택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오후.

    비비안느는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손에 들린 체크 리스트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첫 번째 줄에는 ‘오빠가 부모님 몰래 황궁에 다녀오게 하기.’가 적혀 있었다.

    체크.

    두 번째 줄에는 ‘메르고빌 후작저 사용인들의 협조를 얻기.’라고 적혀 있었다.

    체크.

    세 번째 줄에는 ‘아버지의 채권자 리스트 얻기.’라고 적혀 있었다.

    체크.

    마지막으로 네 번째 줄에는 ‘부모님 몰래 가든파티 열기.’라고 적혀 있었다.

    비비안느는 체크 리스트를 놓고 펜을 고쳐 쥐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거세게 두근거려 와 숨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차분히, 네 번째 줄 좌측에 있는 네모 박스를 훑었다.

    체크.

    만년필의 촉이 네모 박스 위로 체크 모양을 그려 냈다.

    에드문드는 오늘 그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제 아버지가 결국 수표를 받을 거라 단언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제 아버지를 알지 못해 그렇게 확언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의 청사진을 따른 이제는 그 일이 현실이 될 거라는 게 보였다.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편지 봉투들로 향했다.

    페이퍼 나이프로 한 번 가른 편지 봉투들은, 그녀의 초대에 대한 상대방들의 답신이었다.

    봉투에 적힌 이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아버지가 돈을 꾼 상대라는 것.

    그들은 지금쯤 모두 저택의 앞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에 감탄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채광이 훌륭한 창문 쪽으로 걸음을 조심스레 옮겨 보니, 역시 수많은 신사와 숙녀들이 앞마당을 거닐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물론 그들은 메르고빌 저택에서 가든파티를 한다는 말을 듣고 방문했겠지만, 아버지에게는 빚쟁이들이 하나같이 영문 모를 이유로 모여들어 제 전원을 어슬렁거리는 위협적인 광경으로 비칠 터였다.

    역시나 제 짐작이 맞았는지 화가 잔뜩 난 걸음걸이가 복도에 울렸다. 곧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게 다 무슨 짓이냐!”

    후작은 씩씩거리며 비비안느에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제 빚쟁이들에게까지 목소리가 들릴 게 걱정되었는지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저, 저… 밖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짓이 네 작품이라 들었다.”

    “네.”

    “내가 분명 오늘은 네 구혼자들이 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 일렀건만.”

    “그랬나요? 잊고 있었네요.”

    후작은 할 말을 잃었는지 실소만 흘렸다.

    비비안느는 더 이상 아버지가 두렵지 않은 데다, 제 손으로 결혼 허락을 받아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 그의 앞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축하 파티를 열려고 했었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축하 파티?”

    후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낯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가 위협적으로 방 안에 걸어 들어오며 섬찟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축하 파티. 축하할 일이 있어야 축하 파티라고 부를 거 아니냐.”

    “아. 모르셨나 보네요. 오빠가 황제 폐하의 개인 비서가 된 걸 축하하는 파티에요.”

    그녀의 오빠, 라이너스 메르고빌은 에드문드의 권유에 따라 황궁으로 향해 간단한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합격.

    그는 황궁 비서실에 들어가게 되었고, 둘은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오늘을 위해서였다.

    “참. 아버지께서는 그때 응접실에서 오빠의 말을 막으셨으니, 모르고 계실 법도 해요. 에드문드 공작이 떠난 그다음 날 오빠가 황궁으로 면접을 보러 가서 합격했거든요.”

    “…….”

    “그리고 이건 아버지 거예요.”

    비비안느는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편지들 중 유일하게 뜯지 않은 것을 후작에게 건넸다.

    “아버지께서 귀족원 의석을 되찾으셨다는 편지이죠. 수상 각하께서 황제 폐하께 아버지의 귀족원 의원직을 제청하셨고, 황제 폐하께서 승인하셔서 금방 이 내용을 알리는 편지가 저택으로 도착할 거라고 에드문드가 말해 줬어요.”

    잠시 표정이 바뀌었던 후작은 편지를 구기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이 저택을 팔고 영지로 내려갈 거야. 그때 응접실에서 셋이 남았을 때 그 수표를 돌려주기로 하지 않았었나.”

    “수표라면 그때 다시 되돌려받았어요. 복도에서요.”

    “그러면 네가 직접 경매에 부치기로 했던 보석들은?”

    “역시 안 팔았어요.”

    “…오늘 노튼가의 아들을 비롯한 구혼자들이 너를 만나러 오기로 했는데.”

    “죄송해요, 아버지.”

    비비안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이만 내려가 봐야겠어요. 중요한 손님들인데 저분들을 더 기다리게 둘 수는 없잖아요? 아래층에서 뵈어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후작을 지나쳐 갔다. 후작은 그 자리에 가만 서서 방금 무슨 일이 지나갔는지 곱씹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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