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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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문드는 라이너스를 따라 응접실로 돌아갔다. 응접실이 가까워질수록 역시나 딸아이를 질책하는 후작 부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순순히 라이너스와의 대화를 허락한 건 역시 이런 이유였던 모양이었다. 셋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던 거겠지.

    그럼. 그만한 빚을 지고도 이토록 거대한 저택에서 꿋꿋이 살아온 작자들인데, 아무렴 체면 구겨지시고 화가 여간 나신 게 아니셨을 테고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었겠지.

    딱 제 외숙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도 그런 가문의 일원인 비비안느 메르고빌을 생각하면 할수록 사랑스럽다는 감상만이 남으니 저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문드는 비비안느가 저를 응접실에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눈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도 그 눈빛과 저 상황을 겹쳐보았을 때 수표만으로 결혼 허락을 받는 건 힘들어 보였다. 어차피 쉬울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응접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문을 열어 주자, 앞서 걷고 있었던 라이너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에드문드는 뒤따랐다.

    역시나 원래 자리에 돌아가 앉자마자 에드문드에게 그가 건넸던 수표가 내밀렸다.

    “다시 받아 가게나.”

    에드문드가 받지 않자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수표를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알다시피 자네가 없는 동안에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어 보았네. 하지만 역시, 자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저택을 팔고 빚을 상환한 뒤 영지로 내려가는 게 어떨까 생각을 했어.”

    맞은편의 후작 부인 뒤에 선 라이너스가 책상 위에 놓인 수표를 집어 액수를 확인하고는 에드문드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 콜트 백작은….”

    “이제는 콜트 공작이라 하더구나. 공작이라고.”

    후작이 라이너스의 말을 친히 가로막으며 그의 말을 고쳐 주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는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라이너스가 물러서지는 않았다.

    “예. 콜트 공작이 꼭 이 수표만이 아니라 제게도 도움을….”

    “일단 아직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건 비밀로 해 두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에드문드가 라이너스에게 시선을 보내자 라이너스는 영문도 모른 채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문드의 시선은 후작 부처에게로 돌아갔다.

    “제가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께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고 싶었는데 제 뜻을 몰라 주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도 두 분께 예쁨받는 사위가 되기 위해 오늘은 이쯤 하는 수밖에요.”

    후작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으나 후작 부인은 예상 밖 반응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더 애원하고 저자세로 몸을 낮추며 그들에게 더한 호의를 베풀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에드문느는 두 사람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수표는 돌려주시니 받겠습니다.”

    처음에는 결혼 허락을 내려 주지 않는 이유가 돈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귀족으로서 적선은 차마 자존심 상해서 못 받겠다 하신다.

    그러면 그들이 마지막까지 점잖을 떠는 이유는 체면치레라는 거고 어디 한 번 더 넙죽 엎드려서 딸을 달라고 애원해 달라는 거일 텐데.

    제 여자를 어화둥둥 업어 키운 가족들이면 모를까.

    그녀를 상처입히고 저들 마음대로 조종하려 드는 몹쓸 생물학적 부모들 상대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에드문드는 수표를 거두어들이고 등을 돌려 후작저 응접실에서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내 저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비비안느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를 후작저에 버리고 가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했지만, 그녀만큼은 그러는 동안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문득 이렇게까지 그녀를 생각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세상을 원하는 대로 주물러 왔지만 한 번도 제가 체스 말처럼 쓰는 이들의 생각 따위를 의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비비안느를 상대로는 달랐다. 그러니 제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구나 새삼 실감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모양 빠지게 다시 저 응접실로 돌아가는 건 내키지 않는데.

    방금의 걱정이 무색하게 곧 등 뒤로 응접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가 걸음을 옮김에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미소가 새었다.

    복도를 걷다가 뒤돌아보니, 역시 저를 바라보는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전 여기 남고 싶지 않아요.”

    비비안느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에드문드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말들을 쏟아 냈다.

    “이 저택이 팔리는 것도 싫어요. 빚을 갚는 것쯤은 메르고빌 측의 책임이라는 건 알지만… 이대로라면 공작님이 꾸며 주신 저택 전원마저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거라는 거잖아요.”

    “…….”

    “그리고 콜트 부인께서도 제게 정말 친절하셨는데, 저를 가문에 처음으로 환영해 주신 분을 놓치고 싶지도 않고요.”

    에드문드는 이대로 계획이건 뭐건 비비안느를 제 저택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정말 너를 버리려고.”

    오히려 다른 새끼가 그녀를 채 가는 게 싫어서 스스로 정해 둔 선을 어디까지 넘었던가.

    애초에 이 관계의 끈을 놓을 수 있는 건 그가 아닌 그녀였다.

    이게 만약에 게임이었다면, 그녀가 룰을 정했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걸 바치는 기물이었다.

    그러니 버린다는 건 말 자체가 되지 않았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녀를….

    비비안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표정을 훑어 내려갔다. 그때 그의 밀어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지금부터 딱 삼 일 동안, 내가 부탁한 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어?”

    “네.”

    비비안느의 귓가에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속삭여지자, 그녀의 표정에 결의가 서렸다.

    “해 볼게요.”

    그렇게 삼 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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