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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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부탁을 받은 수상은 황제의 응접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황제는 응접실에서 수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은 황제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인사했다.

    “폐하.”

    “아, 앉게나. 자네 아들과 메르고빌 영애가 샹프니야에서 무사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어. 의장이 일을 벌여 큰일 날 뻔했다더군.”

    “예. 마침 그 부분에 관련해서 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제 아들이 내각에 협조하겠다고 한 조건이 메르고빌 영애와의 결혼이라는 부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네만.”

    “저의 허락만으로는 메르고빌가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황실에 정중히 요청을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만.”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

    “제 아들이, 혹시 황실에 유능한 개인 비서가 하나 필요하지는 않은지 여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상은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며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걱정이 무색하게 곧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네 아들이 황실에서 일하는 데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네. 물론 그런 인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마침 내 개인 비서의 후임 중 하나가 그만둬서 황궁 비서실에 공석이 생긴 차였어.”

    황제는 짧은 정적 뒤에 말을 이었다.

    “…거기다, 레이디 메르고빌이 위협에 처하게 된 데에는 2황녀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영애에게 헬리콥터를 태워 준 데다, 제 고모의 저택에 영애를 숨겨 줬으니 말이야.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지.”

    “감사합니다, 폐하. 하나 제가 천거하고자 하는 이는 제 아들이 아닌, 메르고빌 영식입니다.”

    “메르고빌 영식?”

    “훌륭한 인재입니다. 경시청에서도 혼자만의 저력으로 경위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요.”

    말을 마친 수상은 황제에게 사진 하나를 건넸다. 제 아들이 제게 건넸던, 치안총감 아들의 살인 사건 증거였다.

    “이걸로 곧 경시청에 피바람이 불면 메르고빌 영식도 경찰 배지를 내놓아야 할 겁니다. 그자가 순수히 실력만으로 승진한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아무쪼록 렉스 일가와 친분이 있었으니, 본보기로 면직을 권고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내가 그 길잃은 어린 양을 거두라?”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제 아들이 메르고빌 영애의 환심을 얻으려 드리는 부탁이라더군요.”

    “음.”

    “이건 메르고빌 영식이 경시청에서 근무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저도 이토록 능력 있는 젊은이는 폐하께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황제는 수상이 내민 파일철을 받아 읽어 보았다. 그걸 다 읽은 뒤에 그는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유능한 청년이군. 황실을 위해 일할 수도 있었겠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자도 경시청에서보다는 황실에서 근무하기를 원했다더군요.”

    “그렇다면 참 먼 길을 돌아왔군 그래.”

    황제는 파일철을 덮어 수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메르고빌 영식을 내일 애프터눈 티 시간에 보도록 하겠네. 그 정도 부탁이면 자네 아들의 협조를 얻는 값으로는 싸지. 그리고 더 할 말이 있나?”

    “예, 폐하. …제가 한때 메르고빌 영애에게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더 말해 보게나.”

    “암흑가 보스를 잡는 단서를 준다면 아버지의 귀족원 의석을 돌려주겠다고 했었지요. 아시다시피 다아트로의 귀족원 의원은 제 추천을 거쳐,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시는 게 절차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폐하께 메르고빌 후작을 귀족원 의원으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알겠네. 그 부분도 잘 검토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수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만 물러가겠다는 의미로 예를 표해 보였다.

    이렇게 제 아들 에드문드는 저를 통해 메르고빌 영식을 황궁 비서실에 천거하고, 메르고빌 후작의 귀족원 의석을 돌려준 셈이 되었으니 틀림없이 메르고빌가의 마음을 살 터였다.

    에드문드가 후작저 응접실에서 메르고빌 내외와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근처의 전화기가 울렸다. 풋맨이 통화에 응했고, 그는 금방 메르고빌 후작에게 ‘수상 각하께서 아드님을 찾으신다’ 알렸다.

    후작은 난처해진 얼굴로 에드문드에게 ‘가 보게.’ 하고 뇌까릴 뿐이었다.

    풋맨은 에드문드를 전화기 앞으로 안내했다. 전화기의 금속 감촉을 느끼며, 에드문드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메르고빌 일가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선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잠시 에드문드에게 닿자, 그는 다시 앞의 벽지를 바라보았다. 수화기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귀여운 여자에게 홀려서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치게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비비안느를 저택에 데려가 단둘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그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때마침 수상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다행히도 황제 폐하께서 황궁 비서실에 공석이 났다고 하신다. 메르고빌 영식을 내일 애프터눈 티타임때 보겠다고 하시는구나.

    “예, 아버지.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그리고 메르고빌 후작이 귀족원에 복귀하는 것도 문제없을 거다. 금방 공식적인 서류가 오간 뒤 후작저에 소식이 갈 게야.

    “감사합니다.”

    - 그럼 오늘 중으로 후작 내외의 허락을 받아 올 수 있는 건가? 네 어머니가 메르고빌 영애를 아주 많이 궁금해하시는구나. 어서 날짜를 잡아서 상견례를 했으면 좋겠다고.

    “예.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보통이 아닌 분이셔서.”

    에드문드는 땅을 보고는 낮게 웃었다.

    그래. 모든 여건이 받쳐 주니, 머리를 조금 써 볼 생각이었다.

    - 그래. 이제부터는 네게 맡기마.

    “그럼요. 제가 그쯤 알아서 못할까.”

    그는 수화기 너머의 제 아버지에게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하늘이 그를 도운 걸까. 통화가 끝나고, 에드문드가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쯤 또 다른 풋맨이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게.”

    후작이 말하자 풋맨이 문 안쪽으로 향해 소식을 전했다.

    “라이너스 도련님께서 귀가하셨습니다.”

    에드문드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나머지 메르고빌 일가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메르고빌 후작 부인이 염려 섞인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왜 일찍 돌아왔을까요? 근무 시간일 텐데.”

    그때 에드문드가 나섰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메르고빌 영식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 애랑은 무슨 이유로….”

    후작 부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에드문드를 훑었으나, 후작은 ‘그냥 둬.’ 하고 말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가보게.”

    에드문드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걸음을 옮겨 비비안느의 볼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그녀는 이곳에 저를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뒤돌았다.

    사용인이 안내해 주는 대로 걸음을 옮기니 라이너스 메르고빌의 방이 나왔다.

    라이너스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공허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모양새였는데, 책상 앞에 서 있는 그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였다.

    에드문드가 부러 인기척을 내기 위해 열린 문을 노크하자 라이너스가 뒤돌았다.

    두 시선이 서로를 탐색했고 그렇게 이어진 정적 속에서 입을 연 건 에드문드였다.

    “저번에 저택으로 찾아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또다시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면 한참 근무 중이셔야 할 메르고빌 영식께서는 저택에 무슨 일이십니까?”

    에드문드의 반문에 라이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제가 경시청에서의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경찰 배지가 담긴 신분증(Warrant card)을 반납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입니다.”

    “진짜 암흑가 보스가 아닌 뤼드빅 렉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걸 눈감았다는 책임감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라이너스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뤼드빅 렉스, 그 괴물로부터 제 동생을 지키지 않아도 되어서입니다.”

    자신이 경시청에서 쌓은 경력에 미련도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아까의 공허함은 후작저의 재정 상황을 염려해서였던 걸까. 그간 경시청에서 보냈던 시간을 생각한 뒤의 복합적인 감정을 삭이려는 거였을까. 둘 다일까.

    그쯤 생각한 에드문드는 말했다.

    “잘되었습니다.”

    “예, 저는 그럼 이만….”

    라이너스가 그를 지나쳐 가려 했을 때 에드문드가 태연히 이었다.

    “마침 황궁 비서실에 공석이 났다고 들었으니 말입니다.”

    “…….”

    “메르고빌 영식께서는 그 자리에 꼭 맞는 유능한 인재라 들었는데. 혹시 지원해 보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황실을 위해 일하려면 혈통을 제외하더라도, 연줄이 필요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의 시녀께서 하신 말씀이니 정확한 정보일 겁니다.”

    아무래도 비비안느가 경마장에서 만났던 라인브릿지 여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문드 자신에게는 황실 시녀보다 더한 인맥이 있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아버지께서 추천하는 인사라면 황궁에서도 반길 겁니다.”

    “…….”

    “황실에서 일하고 싶으셨다 들었는데, 어떠십니까.”

    “…감사합니다.”

    그의 답이었다. 에드문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을 때, 무언가를 생각하던 라이너스가 그를 불러세웠다.

    “백작.”

    에드문드는 굳이 그의 말을 ‘공작’으로 고쳐 주지 않고는 라이너스를 바라보았다.

    라이너스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걸 보고 그걸 도로 닫았다. 시선이 다시 마주쳤을 때 라이너스는 입을 열었다.

    “공포탄을 구할 수 있다면 비비안느에게 하나 선물해 주시겠습니까.”

    “공포탄 말입니까?”

    “예. 되도록이면 공포탄과 모양이 구분되는 실탄도 하나 가져다가 보여 주면 좋을 겁니다. 이유는 그때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에드문드의 머릿속에 희미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눈을 붙일 동안 너는 저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권총으로 날 쏘고 떠나, 비비안느. 이건 시험이 아니라 내 마지막 자비이니까 믿어도 좋아.”

    아마도 비비안느더러 저를 쏘라 했을 때였을까. 그녀가 피스톨 안에 든 총알이 공포탄인지 의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그 정황을 알고 제게 저런 제안을 한 것이고.

    실탄과 공포탄을 함께 선물해 준다면 비비안느는 두 총알의 차이를 알게 될 테다.

    그러면 그녀는 제가 그날 집어 든 피스톨 안에 든 게 무엇이었는지 깨닫겠지. 그날 그가 그녀를 시험하려 했던 게 아니라, 정말 그녀더러 자신을 죽일 무기를 쥐여 줬었다는 사실 또한.

    이 사실을 추론해 낸 에드문드는 방금 라이너스의 말이 그의 호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은 이제 제 편인 거고.

    이제는 나머지 두 메르고빌들을 공략해야겠다고 에드문드는 생각을 굳혔다.

    ΑngKeumT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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